내 몫에 충실한 인생이 뭐가 어때서?
넌 니 일만 하지?
작년 초 인사 발표가 난 다음 날, 굳이 내 자리로 전화를 걸어 자기 방으로 내려오라던 상무가 나에게 했던 말이다. 예상대로 승진은 되지 않았고 전혀 원치 않는 부서로 이동까지 해야 했던 나에게, 굳이 자신이 다른 본부로 가려던 나를 자기 관할 부서로 붙잡았다는 쓸데없는 말까지 덧붙이면서. 처음엔 위로의 말을 하려던 것 같았지만 돌아오는 반응이 영 시원치 않자 마치 이런 일이 일어난 게 자기 때문이 아닌, 이기적으로 일하는 나 때문이란 걸 못 박고 싶었던 듯 뱉은 게 바로 저 말이었다. 하지만 그 말을 들으면서 문득 궁금해졌다. 회사에서 내 일만 제대로 하면 안 되는 것일까?
왜 상무가 나에게 저런 말을 했는지 짐작되는 일이 있긴 하다. 자신이 근무하던 예전 직장에서 부탁한(떠넘긴), 우리 기관에는 하등 도움이 되지 않을뿐더러 오히려 훗날 문제의 소지가 큰 일을 가져와서는, 꼭 해야 하는 건 아니지만 시간을 많이 줄 수는 없으니 '잘' 검토해 오라는 지시를 한 적이 있다. 물론 난 '잘' 검토해 줬다. 예산 문제는 물론이고 법적으로도 해결되지 않는 부분이 있고, 우리 회사에 리스크로 작용할 가능성이 커서 일단 리스크 해소가 된 이후 진행하는 게 좋겠다는 검토 결과를 아주 완곡하게 보고했고, 상무가 쓴웃음과 함께 알았다며 그 페이퍼를 옆에 툭 던진 이후 그는 내 업무에 관심을 갖지 않았다. 그가 말한 '잘'과 내가 생각한 '잘'의 간극은 은하수만큼이나 컸고, 그 간극을 메우지 못한 나는 졸지에 '내 일만 하는' 사람이 된 셈이다. 물론 그가 나에게 이런 얘기를 직접 하지 않았으니 이건 그저 내 짐작일 뿐이다.
남들에게 민폐를 끼치지 않고 1인분의 몫을 충실히 해내는 삶에 대해 마치 조직을 생각하지 않는 이기주의자인 것처럼 몰아가는 이들이 있다. 왜 직장 생활에 최선을 다하지 않느냐면서. 니가 자기 앞가림만 하기 때문에 인정도 못받고 남들이 더 고생한다는 듯이. 하지만 그런 사람들은 자기 몫만 해도 돌아갈 수 있는 시스템을 만들지 않은 조직에 대해서는 결코 비난하지 않는다. 1인분도 하지 않으면서 오로지 회사 내 정치와 광팔기로 생색 내기에 몰두하고, 광이 나지 않는 일은 습관적으로 남들에게 떠넘기는 사람들이 되려 조직을 생각하는 직원으로 평가받는 현실은 아무리 적응을 하려 해도 참 쉽지가 않다.
어느 조직이든 그 안에서 변두리 업무 취급받는 일을 하는 파트가 있다. 그 일들은 빛이 나지 않고 들이는 품에 비해 성과도 나지 않지만, 정작 그 업무에서 문제가 생기면 조직에 미치는 파급력이 큰 것들이다. 사람들은 그 업무를 하는 부서를 기피부서로 여기고 그 속에서 일하는 사람들을 은연중에 무시하지만, 그들이 있기 때문에 자신들이 상대적으로 높이 평가를 받고 궂은일도 하지 않는다는 사실은 애써 외면한다. 그리고 정작 자신이 그 일을 맡게 되는 청천벽력 같은 상황이 되어서야 그동안 비웃고 은근히 멸시했던 그 일이 결코 만만한 것이 아니고, 그런 냉소와 과소평가를 감내하는 것은 더 힘든 것임을 느끼게 된다. 그 속에서 묵묵히 자기 몫의 일을 성실히 해도, 그저 자기 업무만 챙기는 사람이란 평가를 받을 수도 있다는 것도.
보이지 않는 곳에서 남에게 피해를 주지 않으면서 나에게 맡겨진 일을 티 내지 않고 깔끔하게 수행하는 것의 가치가 높이 평가받는 시대는 쉽게 오지 않을 것 같다. 스마트함을 과시하고, 무능함을 경멸하는 사람들이 주도권을 쥐는 것이 당연한 세상에서, 평범하지만 성실한 사람들은 늘 사람들의 시야 밖에 가려져 있으니까. 하지만 그런 평범한 사람들이 자기 몫을 충실히 하기 위해 들이는 노력들이 폄하받지는 않았으면 좋겠다. 소위 '엘리트' 행세를 하는 이들이 자신이 해야 할 최소한의 의무도 지키지 않고 수많은 사람들에게 고통을 주는 작금의 현실에서, 1인분의 삶을 성실하게 살아가는 사람들 덕분에 이 사회가 유지되고 있다는 것은 부정할 수 없는 사실이기 때문이다.
후일담을 얘기하자면 나에게 핀잔을 줬던 그 상무는 그 이후에도 자기 관할 부서들을 이간질하며 충성 경쟁을 시키고, 자기 실적 채우기를 위해 회사에 딱히 필요 없는 업무를 막무가내로 내리며 직원들을 괴롭히다가 임기 연장의 꿈을 이루지 못하고 쓸쓸히 짐을 쌌다. 외부 입김에 의해 억울하게 물러난다는, 전혀 임원답지 못한 못난 핑계를 구구절절 말하고 다니면서. 그는 나에게 절대 저 사람처럼 1인분의 삶을 열심히 살아가는 사람을 폄하하며 살진 말아야겠다는 타산지석이 되어 주었다. 참 고맙게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