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고양이요람 Mar 15. 2022

4. 폐허에서

기억되지 못한 나날들 - 전염병 시대를 위한 즉흥곡

 인간은 흔적을 남긴다. 그리고 세상은 너무도 빠른 시간 속에서 변해가기에 우리는 그 느낌만을 간직할 따름이다. 우리가 매일 보는 풍경들조차도 이렇게 언젠가는 전혀 다른 풍경들로 대처되어 갈 것이다. 시간이라는 흐름 속에서 세상은 무수하게 만들어지고 부서지기를 반복했다. 하지만 때로는 이러한 시시각각 변해가는 풍경들 사이에서 우리는 자신의 운명을 다 해 버린 전혀 다른 풍경들을 만날 때가 있다. 쓰임을 다 하고 버려졌다는 표현이 더 걸맞을 이곳은 어떤 이의 기억들이 먼지가 가득 낀 체 바닥을 뒹굴며 잊혀 간다. 우리는 이곳을 폐허라고 부른다. 그리고 폐허는 응당 그곳을 무단으로 점유하고 있던 인간의 쓰임이 다하면 원래의 주인인 식물과 자연이 찾아들기 시작하고 그렇게 천천히 인간의 흔적은 지워지기 시작한다. 이 과정은 늘 그랬듯 우리가 생각하는 것 이상으로 빠르게 진행된다. 그리고 강한 생명 활동 속에서 한때는 인간의 생활을 나타냈던 지표들은 멈춰버린 시간 속에 박제되어 그렇게 긴 시간 동안 쇠퇴해가는 것이다.

 


 21년도 봄, 우연한 기회로 나는 전시를 보러 갔다. 오랫동안 방치되어 폐허가 되어버린 국군병원에서 수십 점의 미술품들이 전시되어 있었던 이 기획전은, 코로나 상황으로 인하여 무리를 지은 소규모의 관람객 편성으로 질서 있게 관람되고 있었다. 운 좋게 우연한 기회로 보게 된 이 전시는 그 해에 본 가장 놀라운 풍경을 보여주었다. 침식되어가는 폐허 속에서 각 방에, 그리고 홀에 아주 독특한 작품들이 가득했고 전시를 보는데 꼬박 세 시간 정도가 소요되었다. 하지만 나를 사로잡은 것은 미술품이 아니었다. 미술품 너머에서 여전히 생존 활동이라는 자신의 역할을 묵묵하게 해나가고 있는 자연과 기억이 퇴적되어 가는 멈춘 시간 속 국군병원이라는 ‘공간’이었다.


  깨지고 먼지가 잔뜩 껴 뿌연 유리창 너머로 녹색의 나뭇잎들이 빗물에 젖어 더 짙은 초록색으로 빛나고 있었다. 그리고 어두 컴컴한 복도를 따라가면 저 멀리 어딘가에서 들어온 빛이 보인다. 양 옆으로는 무언가 쓰임이 있었다는 증거-녹이 슬어 있는 소방함과 녹슨 자물쇠로 잠겨 있는 수없이 많은 문들이 보였다. 미술품들은 공간과 녹아들어 있었지만, 미술품 이상의 음울하면서도 매혹적인 느낌이 공간에서 느껴졌다.


 이 전시를 보면서 나는 미술품에 집중할 수 없었다. 다시 인간의 손이 끊긴 곳의 자연이 공간을 침식해가는 과정을 관찰하며, 무수하게 약동하는 아우성들을 듣는다. 하지만 그곳에 인간은 없었고 침묵만 있었다. 우리는 이 침묵과 인간이 빠져나간 자리의 폐허 속 아우성을 구경하고 있었던 것이다. 이것을 우리는 ‘폐허’라고 부를 수 있을까? 문득 이런 생각이 머리를 스친다. 가만히 들여다보면 단지 인간만 빠져나갔을 뿐, 이곳은 여전히 끊임없이 움직이며 변화하고 있는 살아있는 공간이었다. 이 공간은 원래 이런 모습일지도 모르는 것이다. 멈춰버린 시간 속에 흐르는 또 다른 시간의 이름은 자연이다. 인간이 만들어낸 것들은 인간의 손이 닿지 않으면 멈추지만 자연은 끊임없이 움직인다. 문명의 투쟁은 늘 이렇게 호시탐탐 인간이 만든 무언가를 집어삼켜가는 자연과의 싸움이었다.


✳︎


 2019년도. 나는 터키의 파묵칼레를 방문했었다. 하지만 나를 사로잡은 것은 거대한 석회암 온천 절벽이 아닌 그 옆에 있던 로마시대의 웅대한 잔해였던 ‘히에라폴리스’의 폐허였다. 주위로 풀들이 자라나고 오랜 시간 속에서 침식된 벽돌의 잔해들과 일부는 무너져 내려 용도를 알 수 없는 건물, 그리고 내용을 알 수 없는 낯선 로마어로 쓰여있는 비석이 보였다.    


 히에라폴리스는 로마 시절 상당히 유명한 휴양지였다고 한다. 이곳의 온천은 건강에 좋다는 소문이 났고, 전쟁으로 지친 병사들과 귀족들이 이곳에 와서 휴양을 즐기곤 했다고 하며, 각종 유락시설의 흔적이 보인다. 거대한 로마식의 극장은 지금도 상당히 잘 보전되어 있었고, 그들이 사용했을 온천은 여전히 뜨거운 물이 넘처난다.

 

나는 이 무너져내려 간신히 형체만을 간직한 건축물들의 흔적에서 어떤 한 사람의 노력을 상상할 수 있었다. 그는, 혹은 그들은 길을 만들고, 건물을 쌓아 올렸을 것이다. 이 한 사람 한 사람이 오랜 시간에 걸쳐 이곳을 만들었고, 이것이 모여 하나의 도시가 되었을 것이다. 그리고 아주 오랜 시간 이곳은 번영했을 것이다. 하지만 히에라폴리스가 몰락한 이유는 다른 것이 아니었다. 로마 시대부터 비잔틴 제국까지 번영하여 이어져 온 도시인 히에라폴리스는 난데없이 1354년 대지진으로 인해 폐허가 된 체 버려진 도시가 된다. 그리고 이 도시는 처음 1887년 처음 발굴을 한 이래 130년째 발굴 작업이 진행되고 있다.


 하지만 현대에 와서 이와 같은 재해에 의한 몰락을 보기란 쉽지가 않다. 알다시피 많은 변화 속에서 인류는 아주 많은 것을 발견해왔고, 또 알아냈다. 그래서 자연의 불가해한 재해 속에서도 한 사회가 이주라는 극단적인 방법을 통해 도시를 버리고 떠나는 모습을 보기란 쉽지 않다. 물론 무수한 재해적 상황에 대한 완전한 대비를 할 수 있다고는 할 수 없지만, 재해에 대한 리스크는 확연히 이전에 비해 줄어들기 시작했고, 우리는 많은 것을 예측하고 대비할 수가 있게 되었다. 이제는 각 문명을 가르는 경계선이 희미해져가고 있고, 우리는 세계라는 시대 속에서 각자의 영역과 문화만을 가지고 살아간다. 그러나 한 사회가 점유하고 있던 공간을 버리고 떠나갔을 때, 이제는 그 공간의 본질적인 변화는 자연의 불가사의한 혹독함에 의한 결과가 아니다. 산업혁명 이후로 인류는 전혀 다른 종류의 변화와 마주쳐야 했다.


 문명의 본질에는 ‘자원’이라는 절대적인 요소가 존재하며 자원은 에너지를 내기 위한 필수 동력이면서도 유한한 것이다. 물리학적 세계에 살고 있는 우리는 엔트로피 제2 법칙이 주는 절대적 한계, 즉 최고점에서 점점 소멸로 나아갈 수밖에 없는 숙명을 타고났다. 자원 또한 무한한 것은 아니니 이 또한 언젠가는 소멸할 수 밖에는 없는 것이다. 산업사회 초기, 한 공간이 폐허가 되는 것은 주로 이런 자원의 고갈에 의한 경우가 컸다. 1차적인 자원이 경제적 가치로 환산되고, 한 공간은 이 유한한 자원을 재화로 교환하여 성장할 수 있었다. 하지만 자원이 고갈될 경우 재화의 교환은 불가능하게 되고, 사회적 협의로써의 경제적 교환의 수단은 사라지게 된다. 그러면 이 공간은 더 이상은 사람이 살 수 없는 공간으로 바뀌게 된다. 사회에서 쓸모가 다한 무가치의 땅이 되는 것이다. 경제적 가치로 환원되는 자원의 생산성은 결국 그 수명을 다하면 그 공간은 이전과는 전혀 다른 공간으로 바뀌어 버린다. 산업사회의 초기 우리는 이러한 모습을 수없이 발견할 수가 있었다. 이를테면 유럽의 19세기 말부터 성행하기 시작한 과도한 청어잡이는 결국 산란을 통한 개채수의 증가를 가로막는 결과로 나타났고, 일부 청어잡이로 성행한 도시 중 일부는 청어 때가 더 이상 잡히지 않자 폐허로 몰락했다.


 물론 인간이 한 공간을 떠났을 때의 이유는 다양하다. 하지만 어떤 이유에서건 그 공간은 특정한 쓰임이 다 되었기에 비어있다는 사실에는 변함이 없다. 이 공간이 무엇으로 채워질지 모르지만, 인간이 떠나간 그 자리는 침묵이 지키고 있다. 무수한 작품에서 다뤄지는 종말의 모습은 어쩌면 우리가 피하지 못했을 미래의 어느 지점들을 이야기하고 있겠지만, 이제는 이 종말이라는 단어가 주는 의미는 이전과 같을 수가 없다. 이제 우리는 이 단어가 주로 창작물에서 다뤄지는 이지적인 판타지의 일부로 생각된다. 이를테면 핵폭탄이나 원전이 가진 파괴적인 위험도 또한 이전과 같을 수 없다. 복잡한 헤게모니 대립 안에서 인류는 냉전이라는 이름의 위기를 피부로 감지한 적이 있었고, 기후의 변화가 몸으로 느껴지는 현대 사회 속에서 우리는 이를 늘 인식하고 있었다고 하지만, 이러한 일상으로부터 떨어진 이지적인 자극들이 계속된다면 우린 이를 문제로써 인식하기 힘들어진다. 오늘날 지구엔 무수한 핵 보유국이 있고, 한 나라엔 무수하게 많은 원전들이 있다. 그럼에도 오늘날 이를 위협으로 받아들이면서 일상을 살아가는 사람은 얼마 안 될 것이다.


 마찬가지로 코로나 바이러스라는 위협은 일상성이라는 영역 안에서 그 위험성이 천천히 무뎌졌고, 방역 생활은 우리의 일상 가운데 하나가 되면서 전염병이란 보이지 않는 위협이라는 하나의 분명한 ‘실체’가 되었다. 우리는 이제는 이 대상을 너무나도 잘 알고 있다. 하지만 이를 물리칠 방법은 알지 못한다. 이 병의 성질이 너무나도 변화무쌍하기 때문이다. 반면 늘어가는 숫자만큼의 공포는 이전만 못하다. 병의 치명성도 약해졌을뿐더러 점점 우리의 몸이 컨트롤할 수 있는 병의 일종이 되었기 때문이다. 이제 늘어가는 숫자들을 보며 사람들은 무던하게 확진자 수를 본다. 언제부턴가 진정으로 두려워하게 된 것은 정체불명의 바이러스보다는 그 바이러스에 의해 지장 받을지도 모르는 사회적 활동이 되었다.


✳︎


 2020년도 나는 포스트 아포칼립스 유튜브 영상을 하나 작업했었다. 원래는 당시 읽고 있던 융의 <레드북>에서 영감을 얻은 무성영화를 작업하고 싶었지만, 한정된 사업기간의 촉박함 속에서 준비를 채 하지 못했기에, 보름 동안 8페이지짜리 대본을 작업하여 바로 촬영 작업에 들어갔었다. 그리고 사진작가 형님과 함께 소극장에서 사진을 백 컷 정도 찍어서 이를 이어 붙여 사진과 내레이션으로 이뤄져 있는 영화를 만들었다. 지금에 와서 생각해보면 영화라고 하기도 힘든 조잡한 완성도이지만, 당시 나는 좋아하던 크리스 마르케의 단편 영화 ‘방파제 La Jetee’를 오마주 하면서 내가 겪은 코로나 시대의 일부를 엮어 넣고자 했었다. 물론 이야기 자체는 실제 일화는 아니었고, 종말이라는 극단적 비약이 있었다. 즉 에세이가 아닌 완전한 허구, SF였던 것이다. 전 세계가 바이러스에 감염되고 일부 항원을 가진 사람들을 반대로 격리되는 이야기였고, 그 남자의 독백으로 이야기가 진행이 되는 형식이었다. 작품의 제목은 ‘ISOLATION’이었다. 이 작품의 시나리오를 쓸 때 당시 내가 사회적 거리두기로 사회가 락다운 되어 있던 순간, 집에서 머물면서 느꼈던 너무나 고요했기에 혼돈스러웠던 감정들이 일부 담겨 있다고 할 수 있다.



 종말 이후의 텅 비어버린 공간들의 장면을 찍기 위해서 오전 12시 무렵 나는 거리로 나왔다. 상점들은 일찍 문을 닫았고, 당시 영업시간이 오후 9시로 축소되어 있었기에 대로변에 차가 한 대도 없었다. 그리고 몇몇 간판들과 신호등에만 불이 들어와 있었다. 그리고 눈이 내리기 시작했다. 숨죽인 도시의 풍경은 을씨년스러웠고, 나는 묘한 소름을 느꼈다. 물론 종말이 찾아온 것은 아니었다. 하지만 이전과는 다른 풍경을 상상도 할 수 없었던 나로서는 쉬이 납득이 가기 힘든 풍경이었다고 생각한다. 나는 오랜 시간을 이 거리를 보며 살아왔지만 이렇게 텅 비어버린 침묵이 이곳에 존재할 수 있으리라고는 생각하지 못했던 것이다.


 만약 세상에 하나 남은 인간이 이곳에 서있다고 했을 때, 느꼈을 감정은 무엇일까? 천천히 쇠퇴해 가는 것과 소멸로 나아가는 것 사이에는 몇 가지 차이가 있다. 그리고 그 사이엔 무수하게 많은 이야기들이 놓여있을 것이다. 모든 게 영원하지 못할 것이라는 것을 우리는 알고 있다. 그렇기에 그는 이렇게 사라져 가는 것들에 대한 안타까움을 간직한 체 그곳을 점유하던 인간이 떠나간 자리에서, 여전히 자신이 있어야 할 위치에 남아있을 뿐인 흔적들을 바라보는 한 남자를 생각해 본다. 이 흔적은 한때는 많은 쓸모와 의미를 담고 있었을 것이다. 우리가 일상에서 마주하는 많은 것들이 이렇게 무의식 적인 의미를 담고 있다. 당신이 마주하는 거리의 간판들, 버스 정류소, 그리고 매일 마셨던 커피…. 물건이 가진 의미는 그렇게 인간이라는 대상이 없다면 자신의 역할을 잊게 된다. 이 흔적들은 인간이 사라진 시기에 어떤 존재로 남게 될까? 한때는 인간의 것이었지만 이제는 인간의 것이 아닌 것들이 점유하고 있는 공간 속에서, 이 이질적인 요소들이 충돌하고 있는 공간 속에서, 남자는 불멸을 꿈꿨던 인류의 흔적들을 거닐며 천천히 자신이 있어야 할 자리를 찾아 방황할 것이다. 반면 폐허의 침묵 속에서 천천히 진행되어가는 인공성의 쇠퇴 속에서 이름 모를 침묵만이 그 자리를 지키고 있을 것이다. 찬란했던 과거의 꿈을 간직한 체 박제되어 버린 공간들 속을 거닐면서 남자는 그 흔적들 속에서 과거의 삶에 대한 향수를 느끼며, 이전과 같아지려 노력할 것이다.


✳︎


 이처럼 어쩌면 지금의 현재와 닮아 있을지도 모를 이 황량한 공간에 대해서 생각할 때면, 누군가를 마주 할 수 있는 현실이 반갑게 느껴지기도 한다. 이는 공포의 감정이라기보다 절대적인 고립에서 오는 황량함이다. 그리고 우리가 멈춰버린 그 길이만큼 교감은 점점 메말라가고 있으며, 이전과 같은 열정은 점점 옅어진다. 이것이 시대가 그런 것인지 아니면 코로나 바이러스라는 일시적인 상황 때문에 그런 것인지는 알 수가 없지만, 우리가 다시 일어설 수 있는 힘이 있다면 그것이 무엇일지 고민이 되는 것은 사실이다. 나는 이 미술적 상상력으로 재조성 된 폐허를 벗어나 다시 마스크로 꽉 막힌 활기 없는 세상을 보았다. 이 황량한 시대 안에서 천천히 사라져 가는 어떤 것들을 떠올려보며 나는 천천히 거리를 걸어 집으로 돌아왔다. 지금 인간은 도대체 어떤 꿈에 취해 있는 것일까? 이 목적 없는 질문 속에서 나는 퇴근 시간의 부정맥처럼 꽉 막혀있는 도로를 보았다. 어쩌면 우리는 이 세상에 홀로 남아버린 남자와 닮아 있는지도 모르겠다. 많음 속에서의 소외와 고독, 어쩌면 우리는 이 무수한 실체 없는 비생물들 속에서의 고독 속에 살아있는지도 모를 노릇이다. 하지만 부정할 수는 없다. 이것이 현대 사회이니까. 단지 언제 올지 모를 어떤 시대를 기다리고 있었다는 사실에는 틀림이 없을 것이고, 이것이 불가능할 것을 알면서도 우리는 이것을 기다린다. 이 끝없이 반복되는 즉흥극들 속에서 더 나은 내일을 기다리는 것은 인간의 본능이다.

작가의 이전글 3. 닻
작품 선택
키워드 선택 0 / 3 0
댓글여부
afliean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