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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잠만보 Jul 24. 2023

차라투스트라는 이렇게 분열했다

이상한 나라의 할머니-자아 분열이 세포 분열을 이긴다

나는 요즘 "내 안에 내가 너무도 많다"라는 사실을 매일매일 깨닫고 있다. 가시나무새도 아닌데 그렇다. 아무리 못해도 다섯 명의 '나'가 살고 있는 듯하다. 물론 양자경 씨에게 견줄 바는 못되지만 말이다.


우선, 내가 가장 사랑하고 이게 진짜 나라고 생각하는 '게으른 자아' 잠만보가 있다. 얘는 잠을 아주 많이 잔다. 기뻐도 자고 슬퍼도 자고 배고파도 자고 배불러도 잔다. 추워도 자고 더워도 잔다(별명도 울보에서 잠보로 진화했었다. 아주 어렸을 땐 너무 울어서, 사춘기 무렵부터는 너무 많이 자서). 책을 읽다가도 자고 드라마를 보다가도 자고, 버스에 서서도 잔다(중학생 때 83번 버스 타고 학교 가던 중 앉아서 자다가 떨어진 적도 있다). 얘는 잘 잔 덕분에 성격이 좀 좋은 편이어서 낙천적이고, 웃기고, 명랑하다. 대개 내집 내방이나 자동차 안에서, 좋아하는 탄수화물 많이 먹었을 때 출몰한다.


"숙면 취하고 잠만보 키우세요" 연합뉴스 2023


그다음으로 직장생활하면서 친하게 지내게 된 '정치적 자아'가 있다. 이 아이의 특징은 목소리다. 툴툴거리며 어물쩡대는 제1자아는 얘가 나타나면 목소리부터 180도 바뀐다. 특히 사회에서 만난 사람들이 전화를 하거나 시댁에 가거나 직장동료들이 말을 시키면 이 아이가 격하게 반응한다. 이때 가장 흔하게 나오는 말은 "어머, 안녕하세요, 잘 지내시죠?" "형님, 얼굴이 환해지셨어요" "응, 무슨 일이에요?" 등등이다. 목소리는 하이톤으로 올라가고, 두 눈은 슈렉에 나오는 사기꾼 고양이처럼 깜빡이고, 얼굴엔 세상 해맑은 미소가 번진다. 이 현상은 동시다발적으로 일어난다. 그러니까 내가 뭐 계획적으로 그러는 건 아니라는 얘기다.          


[이안의 컬처필터] 영화 <장화신은 고양이>


세 번째 아이는 내가 알고 있는 모른 윤리와 도덕의식을 어떻게든 길어올려 만들어낸 '친절한 제롬씨'다. 이 아이의 개성은 특히 엄마 역할을 할 때와 딸 역할을 할 때, 그리고 을 역할을 할 때 아주아주 잘 드러난다(아내 역할을 할 땐 네 번째 자아가 나온다,여보 돈 벌자). 이 자아는 어렸을 적에 꼬인 마음을 먹고 자라나 당당하게 더 써드 자아가 되었다. 우아하고 멋지고 세련된, 그래서 막 동물적으로 물고 빨고 하는 일이 전혀 없는 엄마를 보면서-나는 특히 엄마의 움푹 팬 눈두덩이 너무 부러웠다. 나는 북망민족 출신이 틀림없는 부계 DNA를 받아 눈두덩이 언제나 밤탱이다- 나중에 엄마가 되면, 아니 '어미'가 되면, 내 아이에겐 무조건 동물적인 사랑을 퍼부을 거라고 다짐했었다. 그 다짐을 쬐금 지키고 있다(있나?). 그런데 왜 딸 역할에선 좀 더 자주 헉헉대는 것일까?



네 번째 자아는 욕망으로 점철된 '자본주의 자아'이다. 평소에 사회주의자 자아로 살아가는 내가 스위치 온 하여 드러내는 자본주의 자아는 보통 영화/드라마를 볼 때, 술 마실 때, 쇼핑할 때 나타난다. 잘생긴 히어로가 절대 죽지 않고 악당을 무찌르거나(어이,제국주의자!) 세상 야비한 용의자들을 기필코 잡아내어 범죄자로 만들어버리는 이야기(이봐 감옥은 답이 아니라고)는 언제 봐도 재미있다. 네 번째 이 아이는 술 마실 때 이따금 나오고 쇼핑할 때도 종종 나타나지만, 출몰 간격은 좀 드문 편이다.


다섯 번째 아이는 대학시절과 신혼시절의 나를 지배하던 아이인데, 얘에 대해선 나도 잘 모른다. 이 아이는 정말 이따금, 비오는 초겨울 밤이나 11월 말의 어느 개와늑대의시간 가로수길이나 사람 많은 기차역이나 고속도로 휴게소에서 문득 나타난다. 아직 몇 번 못 만났다. 다행이다. 얘가 나타나면 별로 안 좋은 일이 생길 거 같다(증발, 가출... 뭐 이런 일들?).


그런데 놀랍게도, 요즘 여섯 번째 자아가 내 안에서 자라고 있다...는 것을 깨달았다. 이 자아는 아직 정체가 혼미해서 이름을 붙이지 못했다. 주로 아픈 엄마를 돌보러 가서 자는 날 등장한다. 성격은 약간 안 좋은 편이다(좀 더 겪어봐야 알겠지만). 특징은 착한 척했다가 짜증을 내고, 미안한 척했다가 곧 무심해진다는 거다. 한 달 동안 관찰한 바에 따르면 이 자아는 목소리가 하루에도 수십 번 바뀐다는 특징이 있다. 현재 상태로는 연구 대상이다(좀 더 파봐야겠다).



오, 이런 식으로 나의 자아가 계속 분열되면, 하나둘 증식하기 시작하면 나는 어떻게 되는 거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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