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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미라지 May 14. 2020

주부의 책 읽기

괜찮은 취미, 독서

집안일은 설명하기도 뭣할 만큼 단순하다. 주부라면 맡아해야 할 식구들 뒤치다꺼리와 심부름. 소위 '일머리'가 있으면 유리하지만 그건 어떤 일이든 마찬가지다. 밥 차리고 청소 빨래하는 것도 익숙해지면 운전이나 자전거 타기처럼 무의식적으로 하게 된다. 만나는 이는 주로 동네 엄마들이다. 아이 키우는 재미(라 쓰고 고달픔이라 읽는다)를 나누고 학교에서 도는 소문이나 학원, 과외 교사 연락처 등 소소한 정보를 교환한다.  평소 행동반경이 3km를 벗어나지 않는다.


살림이 주로 몸 쓰는 일이라면 식구들 대하는 일은 일종의 감정노동이다. '신이 모든 집을 방문할 수 없기에 어머니를 보내셨다'는 서양 격언이 있던데 요즘은 이 말이 '모성'을 강요한다는 비판을 받기도 하는 모양이다. 식구들 뒷바라지를 고귀한 일로 포장하며 엄마들에게 무급노동을 강요하는 듯한 느낌이 나기도 한다. 게다가 난 신을 흉내 내고픈 마음도 없다. 그래도 어쨌든 가정을 돌보는 사람이니 식구들의 기분을 살피게 된다. 옆에 있어달라면 있어 주고, 혼자 있고 싶다 하면 피해 준다. 이유 모를 짜증을 내면 '밖에서 무슨 일이 있었겠거니' 하고 간식을 챙겨 준다.


그렇게 하루를 보내고 드러누우면 허무할 때가 있다. 예전에 아이들이 졸라햄스터 두 마리를 웠다. 대형마트에서 사 왔던 '사랑이'는 그래도 꽤 오래 살았다. 신발 박스만 한 케이지 안에 먹이통과 배변통, 쳇바퀴톱밥을 넣어 주었다.  좁은 곳에서 사랑이는 경사로를 바쁘게 오르내리다 자기 수명이라는 2년을 다 채웠다. '별 일 없었어? 밥 먹었어? 숙제했어? 방 치웠어?' 알맹이 없는 대화만 오간 날이나 불쾌했던 감정이 남은 날이면 케이지 속에 살던 사랑이 생각이 났다. 나도 집구석에서 왔다 갔다 하다 하루를 보낸 건가, 사랑이가 참 답답했겠구나 했다.


내가 가장 오래 머무는 공간인 집이 '집구석'처럼 느껴지지 않으려면 아이들을 돌보면서도 짬짬이 즐길 수 있는 뭔가가 필요했다. 집에서 혼자 할 수 있는, 몰입되면서도 혼을 쏙 뺄 정도는 아닌, 돈이 많이 들지 않는, 아이들이 크면 함께 할 수 있는 . 독서! 아이가 생긴 후 삐뽀삐뽀 119』와 베이비 위스퍼를 시작으로 육아서를 줄곧 읽다가 육아 멘토들의 조언이 지루해져 손에서 책을 놨었다. 이제는 즐길 거리를 가장 편안한 자세로 읽기로 했다. 몇 년 사이 나는 300권 정도는 얹을 수 있는 나만의 책꽂이를 구입했고 '집구석'은 작은 '도서관'이 됐다.


틈 나는 대로 몇십 쪽씩 읽는다. 아이들이 숙제할 때나 게임할 때, 저녁 식사 마치고 설거지하기 전에, 자기 전에, 어쩌다 일찍 일어났을 때도. 야금야금 읽는 책은 냉동실에 넣어 둔 마카롱을 하나둘씩 해동해 먹는 맛 같다. 특히 꿀잠의 지름길인 취침 전 독서는 지인들에게 강력 추천하고 있다. 너무 재미있는 걸 집었다가 밤을 새우면 어떡하나 하는 걱정은 할 필요 없다. 경험상 내 눈꺼풀 무게를 당해낸 책은 없었다. 요즘 읽은 것 중 『여자 둘이 살고 있습니다』와 『굶어 죽지 않으면 다행인:이후북스 책방일기』 같은 에세이는 독보적으로 재미있어서 정주행 하고 싶었지만 다음 날을 위해 잠을 청하긴 했다.


잠깐이라도 책에 몰입했다 빠져나오면 잠깐 저자를 만나고 온 듯 외출 다녀온 기분이다. 늘 유쾌한 나들이는 아니다. 전쟁이나 사회 문제 같은 무거운 주제를 읽으면 기운이 빠져 쉬었다 읽기도 한다. 읽다 말아버려도 저자는 섭섭해하지 않고 책을 놓아둔 그 자리에 머물러 있다. 책장 귀퉁이를 접고 본문을 형광펜으로 덧칠하며 저자와 다시 가까워진다. 김영하 작가의 『읽다』에 이런 구절이 있다. "(...) 읽는 것은 바로 이 광대한 책의 우주를 탐험하는 것입니다. 우리는 『나니아 연대기』의 옷장처럼 하나의 책을 통해 그 우주에 들어갑니다. 책은 새로운 세계로 통하는 문이자 다른 책으로 연결해 주는 징검다리입니다." 멋지다.


일상의 스트레스를 풀고 여가를 즐기는 방법은 사람마다 다르다. 사실 주변에는 책 읽는 이들보다 운동을 하거나 넷플릭스를 보는 이들이 훨씬 많다. 게임을 하거나 그림을 그리거나 목공예를 배우거나 교회에 가기도 한다. 손재주가 별로인 데다가 누워 있는 걸 좋아하는 나는 독서로 여가를 채운다. 책으로 지금, 여기에서 벗어난다. 지식과 정보와 감동을 얻는 방법은 독서 말고도 여럿이지만 책을 읽을 때 나는 주도적인 사람이 되는 것 같아 기분이 좋다. 알고리즘 추천도 좋지만 책은 수천수만 권 중 내가 직접 고른다. 손 닿는 곳에 두고 읽고 싶을 때 원하는 만큼 읽다. 책 읽는다고 하면 특이하지만 괜찮은(?) 사람 취급받는 건 덤.



Photo by Alice Hampson on Unsplash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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