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 속마음을 읽기
대학에서 만난 그 여자애는 처음부터 싫었다.
몸에 딱 달라붙는 미니원피스에 진한 스모키 화장이 과하게 느껴졌다. 그 아이는 말을 할 때면 카메라 앞의 연예인처럼 세상 사람들의 관심을 받고 있는 냥 자기 이야기에 몰입했다. 자신의 성취를 드러내는데 겸손 따위는 없었다. 그녀의 당당함 속에는 ‘세상 사람들은 다 나를 예뻐해’라는 굳은 심지가 있는 듯했다. 그 아이를 보고 있으면 그 믿음을 부러뜨려주고 싶은 충동이 불쑥불쑥 올라왔다.
하루는 새로 산 옷을 입었고 그 아이는 내게 ‘옷 샀지?’라고 물었다.
순간 내 입에서 퉁명스럽게 말이 나갔다. ‘그럼 사서 입지, 얻어 입냐’
말을 뱉고 나서 아차 싶었다. 살짝 뻘쭘해하는 그 아이의 모습에 통쾌함과 미안함이 버무려졌다. 왜 나는 고작 ‘옷 샀냐’는 말에 기분 나빴을까? 그 아이는 나의 외면에 대해 자주 언급했다. 지각해도 놓치지 않던 풀 메이컵, 처음으로 시도했던 핫팬츠들을 콕 집어 말해주었다. 그것은 일종의 견제처럼 느껴졌다. 나는 상담실에서 퉁명스럽게 뱉은 나의 말을 합리화하듯 그 견제가 얼마나 괘씸한지를 털어놨다.
“그런데 그 견제는 네가 하는 거 아니니?”
상담 선생님은 내 말을 다 들으시고 뱉은 한마디. 순간 뒤통수를 맞은 기분이었다. 어떻게 나를 그렇게 볼 수 있단 말인가! 그 말은 상담실에서 처음 경험한 직면이었다. 그 당시에는 불쾌감에 그 말을 바로 받아들일 수 없었다. 그러나 시간이 한참 지나고 인정할 수밖에 없었다. 모든 사람들의 주목과 인정을 독차지하고 싶은 것은 나의 욕구였다. 스스로 그 욕구를 인정하지 않았지만, 은밀하게 그 욕구를 충족시키길 소망하고 있었다. 반면 그 아이는 자유롭게 그것을 드러내는 것처럼 보이니 얄미웠던 거다. 사실 내 외면 변화에 대한 언급은 그 아이 나름의 관심 표현이었을지도 모른다.
그렇게 ‘투사’라는 개념을 처음 배웠다. 투사란 스스로 인정하기 힘든 생각이나 감정을 다른 사람의 것으로 여기는 것이다. 나는 그 아이가 싫었던 것이 아니다. 내 안에 사랑과 관심을 독차지하고 싶은 마음이 싫었다. 질투와 견제로 사랑받고 싶음을 강력히 어필하던 그 마음을 가슴으로 만났고 내가 더 돌보겠다고 약속했다. 그 아이는 달라진 게 없었지만 전처럼 싫지가 않았다.
우리는 마음의 아주 일부만을 의식적으로 자각한다. 나머지 마음을 의식화시키는 방법은 투사에 있다.
투사된 마음의 주어를 ‘나’로 바꾸면 된다.
저 사람은 내가 ~ 하다고 무시하는 것 같아서 싫어
→ 나는 내가 ~하다고 무시하고 있어서 싫어.
저 사람의 무능력한 모습은 참 별로야.
→ 내 안에 무능력한 모습은 참 별로야.
저 사람은 나를 잘 배려해주지 않아.
→ 나는 나를 배려해주지 않아.
누군가에 대해서 강렬한 부정적인 마음이 들 때, 바로 마음속 퍼즐 조각을 찾을 기회다. 타인은 내 마음을 비춰주는 거울이 된다. 누군가에 대한 비난, 질투, 혐오 속에 자신을 향한 그것들이 숨어 있다. 타인에게 비친 내 마음을 이해할 때, 진짜 타인을 바라볼 공간이 생겨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