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는 여행을 좋아한다. 온갖 이유를 붙여서라도 가고 싶은 게 여행이다. 사진과 여행을 모두 좋아하기에 나한테 여행은 최고의 취미이자, 삶이다. 웃기게도, 나는 사람이 많은 곳을 싫어한다. 아주 조용한 곳을 좋아한다. 유명한 관광지들을 잘 가지 않는 이유가 바로 이것 때문이다. 그런 곳을 찾기에는 한국에서 정말 힘들다. 사진을 좋아하는 사람들이 많기 때문에 유명하지 않은 곳도 출사 나오신 분들로 가득하다. 물론, 어떤 때는 그분들의 도움도 받아가면서 나만의 사진을 찍어 나가지만, 대부분의 경우 자리를 피하거나 아예 다른 포인트로 가버린다.
산보다는 바다를 좋아하기 때문에 줄곧 바다로 떠난다. 장소를 밝힐 수 없다. 정말 그곳은 사람이 안 오기 때문이다. 나는 그곳을 ‘나만의 바다’라고 부르는데, 작은 해변은 나만 알고 있다는 희소성과 함께 정말로 나만 반겨주는 것 같은 기분이 들기 때문이다. ‘나만의 바다’는 나를 포근히 안아준다. 언젠가는 사람들의 입소문을 타게 되어 유명해지겠지만, 적어도 지금은 알려줄 수 없다.
‘나만의 바다’를 찾을 때는 대부분 답답함을 느낄 때이다. 이리저리 일이 안 풀릴 때, 책 한 권 들고, 커피 한 잔 사고, 캠핑용 의자 하나 챙기고, 카메라에 렌즈 하나만 끼워서 바로 간다. 매번 똑같은 모습에, 똑같은 분위기라지만 사람은 의미를 부여하는 동물이라고 갈 때마다 새로운 의미를 부여해 버린다. 그러면 그 바다는 매번 다른 의미의 바다가 된다. 다른 의미로 다가오는 바다는 새로운 깨달음을 주기도 하고, 꼭 그렇지 않더라도 우선순위를 정리하게끔 도와준다.
다행히도 이번 주 주말에는 일이 없었다. 요즘은 통 회사가 바빠서 주말 출근이 잦았다. 주말까지 일하게 되면 물론 돈을 벌지만, 나의 마음은 말라가 버린다. 어쩔 수 없는 것들 가운데 서서 외로이 서 있는 내가 비로소 자유의 시간을 얻게 되었다. 아침 일찍 ‘나만의 바다’로 갔다. 큰길, 작은 길을 오고 가며 도착했다. 익숙한 냄새였다. 주차장처럼 보이지 않는 곳에 대충 주차를 하고 주섬주섬 짐을 챙겼다. 도착 전에 카페에서 산 아메리카도 한 잔, 작은 가방, 카메라 그리고 캠핑용 의자까지. 늘 똑같은 짐을 챙겨 바다로 나아갔다.
바다로 나가는 낡은 데크 길은 걸을 때마다 삐그덕 삐그덕 거렸다. 그 소리는 기분 나쁜 소리가 아니라, 잠시 후에 바다가 보인다고 알려주는 신호이다. 그 소리를 들으면 마음은 설렘으로 바뀐다. 이내 바다는 모습을 보였다. 탁 트이는 모습을 기대하기는 어려운 바다이나, 그 바다는 분명 지난번과 다른 마음으로 찾아온 나를 반겨주었다. 마치, ‘오늘도 왔는가?’하고 묻는 듯했다. 그 목소리에는 여유로울 뿐만 아니라 한결 강한 소리였다. 이런 바다의 반김은 복잡하고 답답한 나의 마음과는 너무나도 대비되었다. 적인 동시에 이웃인 다른 사람에게는 느낄 수 없는 여유로움이었다. 이러니 내가 여기를 찾아오지...
질질 끌고 온 의자를 펼쳤다. 뜨거운 해는 조금 기울었다. 한참 전에 왔을 때는 바다 쪽으로 뻗은 해송 밑에 아무것도 없었는데, 언제 떨어졌는지 모르는 큼직한 나무 기둥이 놓여 있었다. 어디서 떨어진 걸까. 나는 서둘러 그 나무에 걸터앉았다. 들고 온 의자는 저만치 놓았다. 책을 폈다. 어쩌다 바람이 불면, 책은 사라락 넘어간다. 커피는 어느덧 다 식었다. 그래도 불쾌하지 않았다. 남은 커피를 다 털어 넣고 다시 읽던 페이지로 돌아갔다. 다시 바람은 책을 반대로 넘겨주었지만, 돌아가는 수고로움도 행복했다. 아직 나는 ‘나만의 바다’에 있기 때문이다.
몇 시간이 지났을까. 해가 지기 시작했다. 바다도 그새 제 자리를 찾아 돌아오고 있었다. 설치해 둔 의자를 빼야 했다. 바다는 이런 부분이 참 좋다. 백날 천날 거기 머무르게 하지 않는다. 몇 시간 앉아 있더라도 그 후엔 반드시 자리를 털고 일어나야 한다. 절망할 시간도, 불안에 떨 시간도 없다. 길고 길었던 고민과 걱정도 바다가 제자리로 돌아오면 끝내야 한다. 바다는 잠시 나를 위해 집을 비워줬을 뿐이다. 엉덩이 툭툭 털며 일어났다. 아쉬운 마음은 돌아서는 순간 싹 사라진다. 그리고 그동안 괴롭혔던 답답함과 괴로움에 대한 해결책도 금방 떠오른다. 그 맛을 한 번 맛보니 자꾸 이곳을 찾을 수밖에.
인생을 여기서 배운다. 어떤 일이라도 계속해서 주저앉을 수 없다. 파도는 결국 제자리로 돌아온다. 제자리로 돌아올 때까지 비키지 않으면 그대로 파도를 맞는다. 어떤 이들은 그대로 맞기도 하지만, 대부분의 사람들은 그 파도에 맞지 않기 위해 바지를 털고 자리를 정리하고, 한 걸음 혹은 그 이상을 물러난다. 한 번 일으켜진 몸은 관성에 따라 다시 앉지 않는다. 그렇게 인생의 어려운 한 부분을 지나가게 된다. 반복되는 일상만큼이나 이런 과정이 반복되면, 나의 기초는 튼튼해진다. 그 기초는 며칠 뒤 찾아올 절망과 불안에서 쉬이 나올 수 있게 하는 힘이 될 것이라 확신한다.
아쉽지만 벌써 주말이 끝났다. 내일 교회 다녀오면 금방 월요일이 된다. 차가운 새벽 공기를 느낄 시간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