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는 종종 다른 사람에게 위로의 말을 해줘야 하는 상황을 만난다. 그때마다 나는 성심껏 최선을 다해 위로의 말을 전한다. 하지만 내가 경험한 것과 내게 위로의 말을 듣기 원하는 사람의 경험 사이에는 많은 차이가 있기 때문에 백 퍼센트 위로가 될 수 없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나는 나의 위로가 최대한 힘이 될 수 있도록 정성을 다하는 편이다.
누군가에게 위로를 해줄 수 있다는 건 참으로 어려운 일이지만 행복한 일이다. 혹시나 그 사람이 나의 위로를 통해 힘을 얻었다고 말을 하게 되면 (빈말일지도 모르지만) 기분이 너무 좋다. 나의 경험과 그 사람의 경험 사이가 조금은 가까워졌다고 생각하기 때문이다.
나와 지속적으로 연락하던 친구가 있었다. 대학에 가서 만난 친구였다. 대학을 다닐 때는 소위 ‘재수 없는 애’였다. 머리도 비상했고, 인맥도 있었다. 부족할 게 없어 보이는 친구였다. 나와는 단지 같은 과였기에 인사만 하고 지내는 정도였다. 우연한 기회로 그 친구에 대해서 더 알기 시작하면서 그 친구에 대한 인식이 180도 바뀌었다. 그리고 우린 친구가 되었다.
서로의 일들로 바쁘게 지내던 와중에, 그 친구의 소식을 접하게 되었다. 피폐해진 삶을 살아가고 있다는 소식이었다. 과정을 굳이 설명할 수 없지만, 잘 나가던 친구가 연속된 실패로 인해서 삶의 의욕을 잃어가고 있었다. 모든 것이 다 자신의 잘못이라고 자책에 자책을 더하고 있었다.당장 그 친구를 만나야 했다. 아이들을 가르치고 있었던 나는 양해를 구하고 일찍 끝내었다. 그리고 그 친구를 만나서 그동안에 있었던 일을 들었다. 이런저런 이야기들이 오고 가는 중에, 그 친구의 삶이 참으로 불쌍해졌다. 밑바닥을 경험해 보지 못한 사람들이 한 번 바닥을 치면 잘 올라오지 못하는 것을 들었다. 그 친구가 겪었던 삶 전체를 내가 전부 가보지는 못했지만, 나는 나와 비슷한 경험을 했고, 같은 고민을 하고 있기에 위로의 말을 해주었다. 그리고 지속적으로 친구를 만났다. 외부와도 격리된 채 살아가려 하는 친구가 너무 걱정이 되었기 때문이다.
우려했던 부분들은 잘 넘어갔다. 그리고 현재 하고 있는 일에 잘 적응을 해 나가는 중이었다. 나는 그 무렵 제주도에서 눈코 뜰 새 없이 바쁜 시간을 보내고 있었다. 그러던 어느 날이었다. 새벽 두 시였다. 종종 있던 일이었기에 그 시간에 전화가 온 게 불쾌하지는 않았다.
“어. 왜.”
나는 잠긴 목소리로 말했다. 잠이 솔솔 오던 참이었다.
“나 이런저런 일이 있었는데....”
라고 말하면서 있었던 일들을 늘어놓기 시작했다. 나는 얼굴을 베개에 파묻은 채 그의 전화를 받았다. 솔직히 너무 피곤했다. 다 말하고 나는 위로의 말을 전했다. 그런데, 돌아오는 반응이 심상치 않았다.
“야! 그 따위 말 들을 거면 너한테 전화 안 했어!”
갑자기 전화를 확 끊어 버렸다. 나도 짜증이 나서 핸드폰을 내팽개치고 잠자리에 들었다.
그 다음날 일어나서 곰곰이 생각을 해보았다. 나는 위로를 한 것이 아니었다. 나는 충고를 했다. 그것도 상처를 주는. 내가 왜 그랬을까? 평소에 굉장히 조심스럽게 접근하는 나였는데 말이다. 아무리 피곤해도 그렇지 뭔가 다른 이유가 있을 것이라고 생각했다.
습관, 그 습관이 문제였다. 많은 사람들을 상담하고 이야기를 하면서 생긴 습관이 문제였다. 온 마음을 다 써가면서 했던 위로의 말들이 이제는 습관이 돼 무의식적으로 튀어나오는 말이 되었다. 공감하지 못한 채 공식처럼 딱딱 대답하게 된 것이다. 전화받는 태도도 문제였고, 피로도도 한몫을 했다. 전화를 받다 보니 길어지는 통화에 짜증이 나는 것도 사실이었다.
나의 위로가 ‘필요 없다’고 말한 사람은 지금까지 단 한 번도 없었다. 빈말일지라도 예의상, 힘이 되었다는 말만 들었었다. 그런데 가장 친한 친구에게 ‘필요 없다’는 말을 듣고 나니 일이 손에 잡히지 않았다. ‘내 말이 상처를 주었구나.’
얼마 전 한 지인이 자신의 SNS에 이런 글을 올렸었다.
“타인이 규정해 준 울타리 내에서의 행복은 생각보다 범위가 크고 넓어서 헤어 나오고 싶지 않을 때가 많다. (중략) ‘나는 네가 행복했으면 좋겠어’라는 말은 사실 ‘나는 네가 딱 이 정도만 행복했으면 좋겠어’, ‘네가 이런 방식으로만 행복했으면 좋겠어’라는 말일 수 있다는 게 꽤나 슬픈 일이다. 당신이 빌어주는 행복은 어쩌면 당신의 이기심과 긴밀히 얽혀 있는 것 같아서.”
나의 위로는 그 친구에게 ‘이렇게 살아야 돼’라고 정해주는 것 같았다. 그것은 더 이상 위로가 아니다. 어느 누구도 타인의 삶에 대해서 이렇다 저렇다 말할 수 없다. 위로란, 단지 그 사람의 선택을 더 쉽게 도와주는 것뿐이다. 나는 오만했다. 내 습관대로 말하려던 것을 당장 멈추어야 했다. 그동안 운이 좋았던 게 분명하다. 하지만 알지 못했던 수많은 부분에서 나는 분명 다른 사람에게 위로는커녕 힘이 빠지는 소리를 해댔을 것이다.
나와 연락을 끊었던 그 친구와 다시 연락을 하게 되었다. 더 이상 누군가의 위로가 필요 없을 정도로 안정된 삶을 살고 있었다. 오히려 그 친구는 다시 되돌아간 내 삶에 새로운 질문과 가능성을 던져주고 있었다. 위로가 필요 없는 세상이 오면 좋겠다. “네 위로가 필요 없어!” 보다 “네 위로가 필요 없어.”라고 말할 수 있는 세상이. 느낌표가 아니라 마침표가 되는 세상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