farewell, 2017 - 2018
나는 신학대를 졸업한 전도사였다. 신학에 딱히 큰 뜻이 없었던 26살 막막한 청년은 그동안 몸담고 있었던 단체를 통해 일자리를 얻게 되었다. 당연히 전도사였기 때문에 교회가 내 직장이 되었다. 신학과 목회에는 큰 뜻이 없어서 대학원에 가지 않았지만, 아이들을 좋아하고 가르치는 것에 뜻을 두고 있어서 즐거운 마음으로 일을 할 수 있었다.
교회가 운영하는 방과후학교가 내 첫 직장이 되었다. 보통의 교회라면 집을 얻어주기도 하고, 아니면 교회 내 사택을 이용할 수 있게 해 주었는데, 이 교회는 그렇게 해주지 않았다. 결국 나는 집에서 출퇴근을 하게 되었다. 그 당시 차를 급하게 구하려니 쉽지 않았다. 그때 운이 좋게도 같은 단체의 선생님이 그냥 주셨다. 연식은 좀 되었지만, 주행 거리가 많지 않아 막 타기에는 나쁘지 않았다. 그렇게 당진-인천 출퇴근이 시작되었다.
10년 전도 지금도 언제나 인천 들어가는 길은 막힌다. 장수 IC를 반드시 지나야 하는데 그 지옥 같은 곳은 시골에서만 운전하던 나의 멘탈을 부시는 곳이었다. 몇 번 그 짓을 해보니 도저히 안 될 것 같아, 이른 새벽에 올라가고 저녁 늦게 내려오는 강행군을 하게 되었다. 고속도로 한가운데에서 차가 멈추기도 하고, 눈길에 심하게 미끄러져 가드레일 박을 뻔하기도 하고, 타이어가 터져 갓길에 한참을 기다린 후에 고쳤던 적도 있다. 그런 많은 아찔한 순간들을 겪으면서도, 딱히 힘들다는 생각은 들지 않았다. 솔직히 즐거웠고, 배울 수 있는 좋은 기회였기에 긍정적일 수 있었다. 글을 써 내려가는 지금 생각해 보면 미친 짓거리였다.
지속되는 출퇴근으로 주행 거리는 점점 늘어나게 되었다. 채 1년도 되지 않아 56,500km를 타게 되었다. 내 차는 아파서 병원을 들락날락거리게 되었다. 덕분에 안 그래도 조금밖에 안 되었던 월급으로 인해 생활고까지 겪게 했다. 한 끼는 먹어야 하는데, 돈이 없어서 컵라면 한 개를 먹었고, 그 짓을 한 달 정도 한 뒤 나는 깨달았다. 이러다 죽겠다는 사실을.
그렇다고 퇴사하지는 않았다. 사명이라는 이름 하에 포장된 노동력 착취는 그 당시 교회에서 성행하던 관습이기도 했고, 전도사 나부랭이가 퇴사해 봤자 결국 교회이니 이미지만 나빠질 뿐이었다. 그래도 아이들이 좋아서 잘 참을 수 있었다. 하지만 방법을 찾아야 했다. 이대로 계속 출퇴근하는 것은 상황을 더 악화시키는 것밖에 안 되었다. 그래서 교회 내 다락방 좁은 공간을 허락받았고, 거기서 잠을 잤다. 보기보다 예민한 나는 바뀐 잠자리에 쉽사리 적응하지 못했고, 몇 달을 불면의 밤을 보냈어야 했다. 건강도 더욱 나빠졌다.
한참 뒤에 깨달았고, 퇴사했다. 좋아하는 것을 이런 식으로 하면 안 된다는 사실을 말이다. 성공한 사람들의 이야기를 들어보면, 어떤 인고의 과정과 함께 숙성되어야 하는 과정들이 있어야 한다고 말들을 하던데, 글쎄 이렇게 익는 것은 썩는 것과 다르지 않다고 생각했다. 노동력 착취의 댓가는 참혹했다. 사명과 열정 뒤에 숨겨진 나의 불만과 불안은 폭탄 터지듯이 터져 나왔고, 다른 인격의 탄생도 기대할 만큼 다른 사람이 되어 버렸다. 끝없는 가난, 끝없는 고통, 프로메테우스가 받은 고통처럼 나의 삶도 그렇게 되어 버렸다.
56,500km의 주행 거리를 통해 내가 깨달은 게 참으로 많다. 세상에는 나쁜 사람이 많다. 그리고 좋은 교회도 별로 없다. 그리고 나는 바보다. 바보니까, 사명과 열정을 무기로 내세운 사람에게 홀랑 넘어가 내 꿈에 더 가까워지고 있다고 믿었겠지. 그렇게 모진 2년 반을 견디며 보낸 나는 인생을 한 층 더 두껍게 다지었다. 얻은 것은 그뿐이었다. 이것은 과도한 열정과 열심이 나에게도, 다른 사람에도 좋은 것이 아니라는 사실까지 깨닫게 해 주었다. 절망과 행복을 오고 가는 인생 속에서 버릴 수 있는 건강한 하체를 가졌으니 만족한다.
달이 참 밝은 밤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