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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목연 Apr 02. 2024

홀로 걷기: 나만의 속도로 걷는 올림픽공원

햇살을 귀하게 여기는 이들에게





창문 너머 아침의 따스한 햇살이 나의 눈과 머리, 어깨에 내려앉는다. 잠과 깸의 경계에서 길 잃은 아이처럼 갈팡질팡하는 내게 햇살은 부드럽게 손 내밀고, 고요한 아침 햇살은 요란한 알람시계보다 나의 잠을 더 확실하게 깨운다. 잠들었던 시간을 지나 눈을 뜬 나는 입꼬리를 아주 살짝 올리며 침대에서 몸을 일으킨다. 


침대에서 몇 걸음 걸어 나오면 이웃집 옥상과 마주한 창문이 나를 맞이한다. 그곳에도 햇살은 깃들고, 나는 그 햇살을 맨살로 느끼기 위해 커튼을 가볍게 당기며 창문을 연다. 몽롱하지만 개운한 기분으로 햇살을 받으면, 아침의 상쾌하고도 기운찬 느낌이 내 몸 곳곳에 스며드는 기분이 든다. 피부 사이로 스며드는 햇빛의 기운을 느끼며 눈을 감고, 오늘 하루도 무탈하기를 기도한다.


직접 싼 김밥과 동네 빵집에서 산 소금빵을 들고 산책을 나선다. 빵과 함께 산 아메리카노는 쓴 맛이 강하다. 입 안 가득 퍼지는 커피의 쓴 맛을 느끼며 나는 걷는다. 책이 든 가방과 돗자리를 어깨에 메고, 씩씩하게 홀로 걷는다.


올림픽공원은 제법 커서 처음 이곳에 왔을 땐 휴대폰으로 지도 어플을 켜고 걸었다. '이쯤에 나홀로나무가 있어야 하는데.' 생각하며 지도와 공원을 번갈아봤다. 시간이 지나 공원을 찾는 날이 많아지며 이제 지도를 켜지 않고도 자연스럽게 걸을 수 있게 되었다. 물론 공원의 세세한 장소까지는 다 알지 못하지만, 적어도 내가 자주 찾는 장소가 어디에 있는지는 알 수 있다.


은빛으로 빛나는 돗자리를 편 건 어느 잔디밭. 평일 낮이라 사람은 많지 않았다. 햇빛을 등지고 사람이 만든 인공 구조물에 등을 기대고 앉으면 '천국이 이런 곳일까' 싶을 만큼 좋은 기분이 들었다. 머리 위로 뜬 해는 내 어깨와 종아리, 허벅지를 따스히 감싸고 나는 몸으로 그림자를 만들며 책을 읽는다. 너무 밝은 햇살은 눈을 시리게 해서, 책을 읽을 때면 손차양을 만들어서라도 글자가 잘 보일 수 있게 했다. 


직접 싼 김밥과 빵집에서 산 소금빵, 요시모토 바나나의 '그녀에 대하여'


오늘 읽은 책은 요시모토 바나나의 '그녀에 대하여'. '데이지의 인생'을 재밌게 읽은 후 연달아 그의 책을 읽는 중인데, 요시모토 바나나만의 차분한 문장과 생에 대한 의지가 나를 기쁘게 했다. 힘든 일을 겪고도 삶을 포기하지 않는 인물의 모습이 나의 지난날을 돌아보게 했다.


두 시간쯤 책을 읽다 팔을 쭉 펴고 기지개를 켰다. 등과 겨드랑이, 팔뚝으로 시원한 바람이 부는 게 느껴졌다. 두꺼운 맨투맨을 입어 바람을 온전히 느낄 수는 없었지만, 목덜미로 스치는 바람에 기분 좋은 닭살이 오소소 돋았다. 책을 덮고 커피를 홀짝이며 다시 올림픽공원을 걷는다. 얼음이 녹은 커피 위로 기름이 둥둥 떠 있어 커피를 버리고 컵을 버린다. 손이 가벼워져서 기분이 다시 좋아진다.


지도 없이 걷는 길은 익숙하지 않다. 특히 서울에 온 뒤로 어딜 가든 휴대폰으로 지도 어플을 켜고 걷는 일이 많아졌다. 대구에 있을 때는 머릿속에 지도가 그려졌는데, 서울에서는 먼 길을 걷지 않아도 휴대폰 지도를 보게 되었다. 하지만 오늘만큼은 휴대폰을 가방에 넣고 걷는다. 공원을 모두 알지는 못하지만, 내가 가고자 하는 방향은 알 수 있으므로.


나홀로나무 근처에는 사람들이 많았다. 서로 사진 찍어주기 바쁜 연인과 유모차 끌며 느리게 걷는 엄마들, 신난 강아지와 함께 가볍게 뛰는 보호자까지. 좋은 날씨는 사람의 기분을 이렇게나 바꿔놓는구나, 생각했다. 얼마 간 흐렸던 날들을 떠올리며 오늘의 햇살이 얼마나 귀한 것인지 생각했다. 그리고 내가 햇살을 이토록 좋아한다는 걸 다시 한번 깨닫는다.


눈앞에 펼쳐진 봄


함께 걷는 사람들 속에서 홀로 걸으며 내 주변의 것들을 떠올린다. 소중하게 여겼던 이와 나를 사랑하는 사람들, 내가 사랑하는 이들의 얼굴을 떠올린다. 그들에게도 지금의 이 볕을 주고 싶다, 그들 손에 따스한 햇살을 쥐여주고 싶다, 푸른 잔디밭에 누워 온몸으로 햇살을 맞고 싶다, 아픈 곳이 하나도 없어질 때까지 오래 함께 있고 싶다. 따스한 햇살이 없었다면 떠올리지 못했을 얼굴이다. 걷지 않았더라면 느끼지 못했을 감사함이다. 오르막길을 걸으며 숨이 차오를 때, 그럼에도 감사하다고 읊조렸다. 살아 있음에 감사하고, 걸을 수 있음에 감사하고, 푸름을 볼 수 있음에 감사하다고. 


산책하며 많은 것에 감사함을 느낀 오늘이다. 하루를 기록하며 이 기억을, 감정을 오래오래 간직하려 한다. 푸르게 돋아나는 생명들을 보며, 다시 한번 돌아온 계절에 고마움을 전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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