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색 숙소로 소설, 영화 속 주인공이 되는 여행기 1화
호그와트행 급행 열차에 탑승한 것 같은 느낌을 주는,
아가사 크리스티 소설 속 객실 같은
고풍스러운 매력을 지닌
호화 열차에서 하룻밤 머무를 수 있다면?
공간에 스토리를 입히는 콘텐트 기획자의
과몰입 맛집 이색 숙소 여행기_1화
산업혁명 시기부터 사람들은 기차를 통해
본격적인 여행을 시작해왔다.
돈이 많은 사람들의 전유물이었던 예전과 달리,
기차를 통해 '대중적 여행'이 가능해진 셈.
교통이 더 발달한 뒤로도,
오히려 느린 기차는 낭만의 상징이 됐다.
기차의 낭만
비행기나 버스가 줄 수 없는,
오직 기차만이 가지고 있는 낭만이 있다.
마법이 제아무리 발달했어도
해리포터는 기차를 타고 호그와트에 갔고,
비포 선라이즈에서
두 주인공의 여정이 시작된 곳도 기차다.
창 밖을 보며 펼쳐지는 풍경들을 통해
내가 이동하는 장소들을 영화처럼 마주하는 것도
비행기의 편리함이 주지 못하는
기차만의 설렘이다.
생각해보자.
그런 기차에서 머무르는 하룻밤은
나에게 어떤 마법같은 하루가 될지.
오늘 내 집이 될 기차 호텔은,
영국 중부 지방 요크에 위치해 있다.
요크는 철도덕후들의 심장을 뛰게 하는 대규모
철도박물관으로도 유명한, 교통의 중심지다.
기차도시 요크와 너무나도 어울리는 오늘의 숙소는 바로,
기차를 개조해 호텔로 만든
sidings hotel이다.
20세기 고급 열차 풍으로 만들어져,
각기 다른 컨셉의 객실을 고르는 것도 재미다.
내가 선택한 객실은 고풍스러운 매력의 silver jubliee다.
(무려 오리엔트 익스프레스 객실도 있다...!!)
시딩스 호텔을 찾아가는 길은,
그 자체로 뚜벅이 여행자에게 작은 모험이다.
요크역에서 도보로 갈 수 있는 위치는 아니고,
버스를 타고 꽤나 들어가야 하는데,
덜커덩 나를 실어가는 버스 창문으로 바라보는
요크 외곽 한적한 모습은,
한층 더 설레게 만들었다.
버스는 이런 허허벌판에 나를 내리고 홀연히 사라졌다.
막 비가 내려 질척한 풀밭과 캐리어를 씨름하면서,
이 벌판에 과연 호텔이 어디 있는 걸까 고민했다.
손필드 저택으로 가는 길목에
처음 내던져진 제인 에어의 심정이 이럴까?
질척이는 캐리어 바퀴와 씨름하다 겨우 도착한 이곳은...
거대한 입구, 그리고 길게 늘어진
칸칸의 객실들.
확실히 여느 호텔과는 다르다.
단순히 기차를 흉내낸 게 아니라,
시골길에 뚝 기차를 옮겨놓은 마법의 공간처럼
위풍당당하게 자리잡고 있었다.
떨리는 마음으로 문을 열고
들어가는 순간,
1930년대 영국으로 빨려들어온 것만 같다.
며칠 내내 야근에 찌들다가,
15시간의 비행 후에 런던에 도착.
또 기차를 타고 요크에 왔다.
하지만 요크에서 이 문을 열고 들어선 순간에는
유럽여행 온 직장인이 아니라,
20세기 고급 열차에 탄 모험의
주인공이 되어버렸다.
하지만 호화 열차의 매력은 이제부터 시작이다.
자,
아무리 특급 호텔이더라도
호텔 체크인을 위해 거닐었던 복도가
금방이라도 소설의 주인공들이
객실에서 나와 인사할 것만 같은
이 복도만큼 설렐 수 있을까?
어디 이뿐일까.
드디어 '내 객실'로 들어가기 전,
체크인을 하는 순간마저 특별하다.
객실 카드키(?)가 아닌, 티켓키(!)를 통해
삐그덕 소리를 내며 열쇠를 돌리면,
그제서야 내 객실에 입장할 수 있다.
음... 제대로 갖춰진 샤워부스와
혼자 쓰기에 충분히 넓고 안락한 침대.
이 정도면 에든버러까지의 여정이
매우 안락하겠어-라는 대사가 절로 튀어나온다.
괜스레 모험 소설 속 주인공이 된 듯한 기분이다.
(미안하지만 필자의 직업은
공간에 스토리를 입히는 경험 콘텐츠 기획자다.
장소에 대한 과몰입과 상상으로 밥벌이를 하기 때문에,
앞으로 이런 상상을 계속 듣게 될 것이다!)
다시 현실로 돌아와..
달칵. 스탠드의 불을 켜니
훨씬 더 근사한 공간이 된다.
객실에는 따뜻한 불빛이 일렁이고,
창 밖에는 기차가 철로를 달린다.
아무것도 하지 않고,
그저 이 곳에 머무는 것만으로
모든 상상력과 모험심이 충족된다.
자, 피곤한 몸을 뉘였으면
이제 배를 채울 시간.
식당칸으로 이동해볼까?
시딩스 호텔은 지중해풍 요리가 강점인
레스토랑도 운영하고 있다.
12월 중순에 방문한 덕에,
크리스마스 장식으로 한껏 꾸며져 있었다.
내 혼밥 레벨이 꽤나 높다는 생각을
막연히 하면서,
혼자라도 이 작은 사치를 즐기기 위해
가장 나를 행복하게 만들어줄 메뉴를 한껏 골라본다.
짭짤한 리조토 한 입에
맥주 한 잔까지 주문해
따뜻한 분위기를 즐긴다.
창 밖에는 어느 새 비가 내리고,
음식으로 따뜻하게 속을 데우는 순간.
너무나도 완벽하다.
관광객 틈바구니에서 복작이던
런던의 유명한 거리를 걸을 때보다,
훨씬 더 크리스마스다운 크리스마스처럼 느껴진다.
다시 한 번 ‘좋은 숙소’ 가 주는 매력을 실감한다.
잠시나마 오롯이 '내 공간'이 되어,
나만 누릴 수 있는 선물같은 시간.
장시간의 비행 후
런던에서의 추위에 지쳐있던 탓인지,
시딩스 호텔이 주는 안락함에 금방 골아떨어지고 말았다.
다음날 아침에 일어나
조식을 먹으러 향한 또 다른 식당 칸에는
요크셔의 드넓은 들판이 펼쳐져 있었다.
갓 구워져 나온 잉글리시 브랙퍼스트와
우유와 설탕 퐁당 넣어 마시는 차 한 잔은
국밥만큼이나 내 속을 든든하게 만들어줬다.
12월 매서운 추위에 서울을 떠나 영국에 왔지만,
이 아침식사를 먹을 때 만큼은 여기가 내 휴양지랄까.
내 앞에 펼쳐진 요크셔 들판에 울려퍼지는 바람 소리가
세차고 시원하게 들릴 정도로 말이다.
기차 호텔에서의 여행 포인트
- 소설 속 주인공이 된 듯한 객실
- 걷기만 해도 설레는 복도!
- 곳곳에 느껴지는 기차 호텔의 디테일
- 음식을 먹는 순간까지, 여행하는 기분
매거진이 궁금하다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