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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박종일 Aug 18. 2019

[걸어서 동네속으로] 이탈리아 화장실 견문록

화장실 헌터의 이탈리아 여행기.


"특정한 곳에 오래 머물면 좀 더 색다르고 깊은 부분에 대한 이해가 가능해진다. ... 좀 더 깊은 이해는 달콤한 신혼 같은 순간이 지나고 모든 이들이 겪는 일들을 함께 겪기 시작할 때에야 경험할 수 있다. ... 이것이 바로 한 도시를 이해하게 되는 순간이다."

 관찰의 힘_얀 칩체이스, 사이먼 슈타인하트



가장 내밀한 곳에서 발견하는 아름다움, 이탈리아 화장실


처음 혼자 떠난 해외여행이라서 그랬던 걸까? 거리의 모든 것들이 달라 보였다. 나는 서로 다른 그림을 놓고 동그라미를 쳐가는 사람처럼 이 '다른 그림 찾기'를 계속했다. 엉뚱하게도 나는 이탈리아에서 '화장실 헌터'가 됐다. 조금 민망하지만 이번에는 화장실 이야기를 해볼까 한다.

왼쪽부터 푼타 델라 도가나, 그라시 궁

처음 화장실을 찍자고 결심한 건 첫 여행지인 베니스에서였다. 건축가 안도 타다오, 카를로 스카르파가 리스토레이션 하고 설계한 미술관과 전시장을 모두 둘러볼 생각이었고, 수많은 다리로 이어진 섬과 섬을 걸어서 드나들었다. 첫째 날, 안도 타다오의 손길이 닿은 푼타 델라 도가나(Punta Della Dogana)를 거쳐 두 번째로 그라시 궁(Palazzo Grassi)에 도착했다. 전시를 관람하던 중 요의가 밀려와 화장실로 향했다.

그라시 궁의 화장실은 크게 특별하진 않지만 단출한 구성이 마음에 들었다. 무엇보다 한국의 화장실과 구성이 똑같으나 크기나 모양이 달랐다. 캡슐같이 동글동글한 소변기가 귀엽다고 생각했고, 개수대 옆의 핸드 드라이어나 벽에 붙은 타일의 깔끔함도 눈에 들어왔다. 특히 핸드 드라이어의 모양이 심플하니 마음에 들었다.


 모든 것이 규격화되고 공공시설의 세부사항까지 통일된 한국과 다르게, 이탈리아는 같은 모양을 하고 있지만 다른 디테일을 가지고 있는 것들이 널려있다. (세상의 모든 관찰자들에게, 이탈리아는 기회의 땅이다!) 특히 화장실은 건물의 가장 내밀한 부분 중 하나로, 모두가 들어가 볼 수 없다는(남/녀의 구분 때문에) 특징이 있다. 한국에서 무심코 지나쳤던 화장실에서 어떤 아름다움을 발견하자 나는 가는 곳마다 어떤 모습을 한 화장실이 숨어 있을지 궁금해 지기 시작했다.


 인상 깊었던 소변기를 꼽아보자면 단연코 베니스의 폰다코 데이 테데스키(Fondaco Dei Tedeschi) 백화점의 것이 있다. 유명 건축가 제이미 포버트가 설계한 이 백화점은 우아하게 설계된 내부에 걸맞은 화장실을 갖추고 있었다. 이탈리아는 대리석 산지가 많아서 그런지 고풍스러운 대리석 개수대를 볼 수 있었는데, 이곳은 소변기마다 대리석 칸막이가 쳐져 있어 소변기가 이렇게 멋스러울 수 있다는 것을 보여준다.

저 입체감을 보시라, 쉴 새 없이 기계는 돈다.

이외에도 개성 넘치는 모양을 가진 소변기를 계속 발견했다. 이것들을 모아놓아 전시를 해놓는다 해도 이상하지 않을 정도로, 소변기들은 하나같이 (내 눈에는) 제각각이었으며 심미적이었다.


모든 화장실은 로마로 통한다. 


(남자) 화장실에는 소변기 말고도 재미있는 디테일이 많다. 개성 있는 모양을 가진 개수대나, 멋진 대리석으로 장식된 벽면, 재치 있는 휴지걸이까지. 절에서는 화장실을 해우소라 하던가, 이탈리아의 화장실도 해우소라고 불러야 한다. 독특한 모양이나 장식을 관찰하느라 근심 따윈 잊어버릴 테니까.


개수대는 화장실의 피날레다. 볼일을 해결하고 나른하고 한 결 가벼워진 마음으로 개수대에서 손을 닦게 되니까. 하지만 다 쓴 비누 디스펜서에, 물로 흥건한 개수대가 있다면 아무도 그 앞에 오래 있고 싶지 않을 것이다. 그러나 이런 곳들이라면 다르지 않을까?


베니스 아카데미아 미술관(Galleria dell'Accademia di Venezia)의 화장실을 보자. 베네치아 화파의 주요 작품들을 모아놓은 유서 깊은 장소답게 화장실 또한 기가 막힌다. 총천연색의 대리석 타일은 화장실이 더럽다는 인상을 확실하게 날려버리기 충분하다. 페기 구겐하임 컬렉션(Peggy Guggenheim Collection)은 아담하지만 실용적인 개수대를 가지고 있다. ㄱ자 모양의 아이보리 색 대리석 개수대를 직접 보게 된다면 아마 그 위에 담뱃갑이라도 올려놓고 사진을 찍게 될 거다.

왼쪽부터 아카데미아 미술관, 페기 구겐하임 컬렉션

커피와 다이닝을 겸하는 피렌체의 어느 카페는 냄비로 개수대를 만들었다. 수도꼭지는 휘어짐 없이 막대 모양으로 돼있다. 이는 한국에서 본 적 없던 세련된 모양이었다. 피렌체의 유서 깊은 미술관, 우피치 미술관(Galleria degli Uffizi)의 화장실도 명성에 걸맞은 엄청난 스케일과 질감을 자랑하는데, 비누 디스펜서와 수도꼭지가 세련되진 않았지만 깊게 파인 모양의 대리석 개수대는 소장하고 싶을 정도였다. 주요 미술관들은 이렇게 대리석으로 돼 있었다. 수도꼭지 등의 디테일도 좋지만 대리석이 가진 특유의 질감이 화장실을 좀 더 우아한 곳으로 만들어준다.

왼쪽부터 피렌체의 어느 카페, 우피치 미술관

로마 국립현대미술관(MAXXI)은 미니멀리즘의 끝을 볼 수 있는 화장실이었는데, 특히 얇게 휘어있는 수도꼭지가 인상적이다. 온수와 냉수 조절은 어떻게 하지?라는 의문이 들었다.

저 얇은 수도꼭지는 비누 디스펜서가 아니다.

웃긴 얘기지만, 나는 명소나 유명 건축가의 작품을 보러 가면서 가장 먼저 화장실에 들렀다. 이곳 화장실은 어떤 모습일까 하는 궁금증을 참을 수 없었기 때문이었다. 내 인생 최고의 화장실(아마 가장 자극적인 화장실)은 여행의 마지막 날, 로마에서 발견하고 말았다. 모든 길은 로마로 통한다 했던가, 이제는 모든 화장실은 로마로 통한다고 바꾸자. 화장실의 끝판왕이 여기에 있으니까. 로마의 또 다른 현대미술관, MACRO는 세상 어디서도 본 적 없는 기묘한 화장실을 가지고 있다. 화장실이 급해 들어갔다가 신세계를 만날 수도 있으니 기대하시길.

이 세상 화장실이 아니다.

처음 화장실 문을 열면 이곳이 화장실인지를 의심하게 된다. 그럴 수 있다. 한가운데에 이상한 모양의 개수대가 있고 유리로 된 벽면은 화장실이라기엔 너무 갔나 싶으니까. 개수대는 다가가 손을 대면 빨갛게 변한다. 그러면 화장실이 온통 빨간빛으로 가득 찬다. 혼자라면 공포감을 느낄 수도 있을 것 같다. 소변기는 마치 걸레를 빨던 개수대 같이 생겼다. 이곳이 이탈리아를 떠나기 전 마지막 일정이었는데, 나는 이 화장실에서 기꺼이 20여분을 보내고 나왔다. 다른 나라를 가보진 않았지만 어딜 가도 저 개수대는 다섯 손가락 안에 들 것이다.


같은 그림에서 차이 발견하기


이탈리아에서 화장실을 찍고 다닌 것에 대해 누군가는 '이탈리아에서 본 게 겨우 그거냐'라고 하지만, 화장실을 비롯해 그곳에서 발견한 것들은 내 일상을 바꿔놓았다. 현실에서도 나는 여행을 계속하고 있었고, 이탈리아를 걷던 그대로 서울을 본다. 그래서 정말 중요한 것은 코스가 아니라 관점이다. '모든 것은 마음먹기 나름이다'라고 하지 않던가. 일상에서 특별함을 끌어올릴 수 있는 눈을 가지고 있다면 여행은 얼마나 더 재밌어질까. 이 생각은 나로 하여금 퇴근 후에 서울을 거니게 만드는 힘을 줬다.

을지로 바캉스 커피 화장실

그래서 나는 서울에서도 화장실을 본다. 물론 서울 화장실은 어릴 때부터 봐 왔던 터라 기시감으로 식상하기 그지없다. 하지만 요즘은 재밌는 곳이 많이 생기고 있으니, 나는 그들의 화장실을 주목해볼 생각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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