급하게 온 팀장님 전화, 지금 어디에 있냐며 지금 심리실로 갈 테니 만나자 하신다. 이런 갑작스러운 호출은 불길하다. 역시 예감은 틀리지 않는다. 임상심리실로 VOC(고객불만사항)이 접수되었다며, 상황을 알고 있는지, 그리고 환자의 주관적인 불만인 건지 아니면 심리실의 실수가 있는 것인지 심리실의 입장을 들어보고자 심리실로 오신 것. 듣자마자 누구인지 짐작이 되었다. 오전에 시행했던 병동검사의 환자가 그 주인공. 우리 2년차 수련 선생님에게 했던 말과 태도를 이미 전달받고는 깊은 한숨과 짜증이 올라왔던 터였다.
오전 환자는 50대 중반의 여성 환자로 실신을 주호소로 타과에 입원한 분으로, 실신을 유발할 만한 신경학적인 이상의 여부를 확인하는 여러 신경학적인 검사를 받았으나 이상 소견이 발견되지 않는 상태였다. 즉 환자의 실신 증상이 신경학적인 문제에 기인하지 않는다는 뜻이었고, 환자의 실신이 심인성 장애의 한 유형이라 판단한 타과 주치의는 정신건강의학과로 협진의뢰하였다. 우리과 주치의는 환자와 면담한 뒤 현재의 심리적 상태와 성격적 특성을 살펴보자며 종합심리검사를 처방하였다. 50대 여성이고 신경과적 문제가 없는 심인성 장애로 실신 증상을 보이는 환자. Histrionic한 경향이 있을 수 있겠네, 라며 환자를 담당하게 될 2년차 수련 임상심리사 선생님(내가 지도한 수련선생님으로, 이 글에서는 2년차 선생이라 칭하겠다)과 케이스에 대해 얘기나누고 심리실에서 환자와 검사를 시작한지 1시간이 조금 지났을까한 즈음, 2년차 선생에게 연락이 왔다.
"선생님, 환자분이 검사를 거부하시면서 병동으로 올라가셨습니다. 환자분께 어떻게 햇병아리 선생님을 배정했냐고 불만을 말씀하셨어요."
"뭐? 햇병아리요?"
"네.. 환자분이 원장님 지인이시라는데, 어떻게 햇병아리 선생님이 검사를 하냐며 화를 내셨어요."
"하...알겠어요. 우선 나랑 얘기 먼저 합시다."
임상심리전문가로 20년 가까이 일하는 동안, 이런 어이없는 VOC도 처음이었고 '햇병아리' 라는 비유도 처음 들어보았다. 간접적으로 듣는 내가 당혹스러움 그 자체였으니, 우리 2년차 선생은 오죽 심정이 복잡할까...
심리실로 가서 2년차 선생을 만나니, 우리 2년차는 검사 중에 자신이 실수한 게 있는지를 반추하며 기죽어 있는 상태였다. 그리고 본인 때문에 환자가 검사를 거부했다고 생각해서인지 죄송하다고 하면서, 병원장님 지인이시라는데 혹시 본인 때문에 나나 심리실에 피해가 있지 않을까를 걱정하고 있었다.
"아니야, 이건 선생님 잘못이 아니고, 본인이 VIP 대우를 받아야 한다고 생각하는 환자의 잘못된 태도와 갑질인 거에요. 그거 자체가 그 환자의 문제 행동의 한 측면일 수 있어요. 선생님 잘못 아니야.. 그리고 '햇병아리' 라니, 이렇게 무례한 경우는 또 처음이다. 선생님 당황했겠어요. 검사는 어디까지 진행된 건가요?"
검사는 지능검사까지 마친 상태였다. 인지기능을 측정하는 지능검사는 과제 전체가 문답 형식의 질문과 추론과정을 요하는 인지과제인 만큼 환자 스스로도 수행하면서 자신이 수행을 잘 하고 있는지, 수행을 못하고 있는지를 지각할 수 있고, 그만큼 수행의 성공과 패스에 따라 위축되거나 거부적인 태도를 취하는 검사이기도 하다. 아마도 오전의 그 환자는 지능검사의 수행이 원하는 만큼 되지 않는 것에 대한 자기 불만족감과 무안함을 우리 2년차 선생에게 투사(projection)해서는 자신의 수행 곤란을 어린 '햇병아리' 선생이 검사를 진행해서 라고 합리화하고 싶었는지 모르겠다. 아니면 정신과 협진과 그 결과 생각하지도 못했던 임상심리검사를 수행해야 하는 본인의 상황에 대한 화를 상대에게 던져내서 자신만큼 상처를 받게 끔 하고픈 욕구에서 비롯된 부적절한 표현일 수도 있겠지. 흔히 자신의 문제를 직시하기 어려운 사람들은 이렇게 자신의 어려움이나 불편감을 상대에게 던져 버리고는, 이 문제의 발생은 '너 때문이야' 라고 해버리는게 익숙하니까. 그리고 이점이 들의 문제행동이기도 하고 대인관계 갈등을 유발하는 요인이 되기도 하니까 말이다.
심리실에 온 팀장님께 상황에 대해 공유드리니, 안 그래도 별일 아닐 거 같기는 했다 하시면서도 환자가 VOC를 접수한 점이 걸리니 이후 검사는 상위 관리자인 내가 하는 게 어떨까하는 의견을 말씀해주셨다. 그렇게 후처리를 해주는 건 딱 환자가 조작하고픈 상황(병원장의 지인이니 내게 걸맞는 연차 높은 심리사와의 검사진행)과 '병원장 지인인데 더맞춰라' 하는 환자의 욕구와 의도를 그대로 수용하는 결과가 되버리는 것.. 환자의 성격적 특성과 그에 따른 부적절한 갑질 행동임을 설명해드리고 그럴 수 없다고 단호하게 선을 그었다. 심리사가 아닌 팀장님은 정신과 환자의 역동을 이해하기 어려워하면서 두어 차례 내게 남은 검사를 진행하기를 권하다, 내 태도가 강경하니 더 이상 말씀은 못 하시고는 남은 검사를 수행하는 동안에 문제되지 않게 하라는 말씀만 남기고는 총총히 돌아가셨다. (나중에 들어보니 병원장님이 자주 가시던 음식점의 사장님이셨다고 하더라..)
2년차 선생을 불러서는 다시 다독이고, 환자의 행동과 역동에 대해 설명해주고 중립적이고 전문적인 자세로 이후 검사를 진행하라고 다시금 지도해주었다. 그리고 VOC가 걱정된다고 환자의 태도에 쩔쩔 매지 말고 여느 환자를 대할 때와 동일하게 검사와 면담을 수행하라 지시했다. 특히 검사를 진행하는 심리실 안에서는 선생님이 전문가인 만큼 선생님만이 검사에 대한 전문성을 가지고 있고 상황을 통제할 수 있는 존재임을, 그렇기에 환자의 한 두마디에 휘둘리지 말고 주도권을 가지고 검사를 진행하라 다시금 다독였다. 다행히도 환자는 2년차 선생의 흔들림 없는 태도에 당황해서인지, 아니면 오전에 본인이 제기한 VOC가 좀 부적절했다는 자각이 들어선지, 그도 아니면 이제 인지기능 검사처럼 시험보는 것과 같이 불편한 검사와 본인의 능력이 드러나는 상황에 더 이상 당면하지 않아도 되는 안도감 때문인지, 남은 투사 검사들의 진행과 면담에서는 협조적으로 임했다고 한다. 더불어 마지막에는 '햇병아리' 선생님이라고 한 것에 대해서 미안했다며 사과하셨다고 한다.
둘째의 협찬 그림_햇병아리
대부분 대학병원 내 존재하는 임상심리실은 대부분 수련과정을 운영하고 있다. 수련과정을 운영한다는 것이 비전공자에게는 익숙하지 않을 테지만, 의사의 레지던트 과정과 유사한 임상심리사 교육과정이라고 접근하면 이해하기 쉬워진다. 의사가 자신이 원하는 전공 분야의 전문의가 되기 위해 해당 임상과에 지원하여 4년 동안 레지던트 과정을 이수하고 전문의를 취득하듯이, 공인된 자격을 갖춘 임상심리사가 되기 위해서는 임상심리학회와 보건복지부가 지정한 기관(일반적으로 대학병원)의 임상심리실에 입사하여 임상심리실에서 운영하는 수련과정에 등록한 후 3년의 임상심리수련 과정을 이수하여야 하고, 이후 소정의 시험과 면접을 통과해야 한다.
수련과정을 운영하고 수련 임상심리사의 교육을 담당하는 사람은 수련감독자(슈퍼바이저라 불린다)이며, 공인된 정신건강임상심리사 자격과 임상심리전문가 자격을 가지고 있어야 수련교육 업무를 진행할 수 있다. 통상 1명의 수련감독자가 3명의 수련 임상심리사의 수련교육을 시키는 구조이고 레지던트와 유사하게 1년차, 2년차, 3년차 3년의 수련과정을 거친다.
임상심리사의 수련은 통상 대학원을 졸업하고 시작되며, 전공의 특성 상 남녀의 비율은 여성이 9:1 또는 8:2의 비율로 절대적으로 많다. 그렇기에 대학병원의 임상심리실에 근무하는 수련 임상심리사들은 통상 20대 중후반~30대 초반 정도의 여선생님들이 대다수를 차지한다. 임상심리사가 만나는 연령층은 24개월 전후의 유아들부터 80대의 노인층까지 전 연령과 성별을 아우르는 환자들이며, 심리검사가 처방된 경우에 만나게 된다. 그리고 임상심리사보다 연령이 높은 환자들과 보호자들 중 일부는 수련 임상심리사들에 비해 당신들이 단지 '나이가 많다'는 이유 하나에 근거하여 평가자가 갖는 전문성을 무시하거나, '나이가 어리기에' 자신의 문제를 이해하거나 파악하는 것에 한계가 있을 것이라는 단편적이고 지엽적인 판단을 내리고 종종 무례한 태도를 취하기도 한다. 그리고 중장년층의 남성 환자분들은 나이 어린 여성 임상심리사와의 평가를 불편해하고 자신이 경험하는 어려움에 대해 이해 못할 것이라며 면담에 거부적인 태도를 취하기도 한다.
대학병원의 임상심리실의 주된 업무는 환자들의 주호소 문제의 내재한 원인을 탐색하고 호소 문제로 인해 환자가 본래 가지고 있던 기능들의 손상과 어려움의 정도를 파악하기 위해서 실시된다. 그만큼 검사를 수행하고 판독하는 임상심리사는 환자들의 주호소 문제의 원인을 파악해낼 수 있는 검사에 대한 이론 및 수행 지식, 정신병리, 이상심리, 발달심리 및 진단에 대한 지식 등을 갖추고 있으며, 대학원 과정부터 학습한 이론들과 실무 경험들 통해 그 전문성을 좀 더 날카롭게 연마해간다. 따라서 비록 나이라는 '숫자'로 만나는 수련 임상심리사의 모습이 당신들의 기준에서 어려보인다 할지라도, 검사의 진행과 분석에 있어서는 전문적인 지식을 가진 임상가이며, 환자가 호소하는 어려움과 문제 행동 이면에 자리한 환자의 핵심 정서, 어려움을 유발하고 지속시키는 역동, 대상관계의 어려움 등을 이해하고자 애쓰며 문제의 원인을 파악하는 치료진임을 기억하자.
적어도 '햇병아리' 라는 표현으로 평가절하될 수 있는 존재가 아님을, 직업적으로 존중받을 예비 전문가의 가치를 가진 사람들, 그들이 임상심리실의 수련 임상심리사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