떨림의 농도
그렇게 불쑥 그것이 찾아오는 밤이 있다.. 그런 밤엔, 그냥 늪처럼 계속 깊이깊이 빠져들어가는 슬픔 속을 허우적거리다 어쩔 수 없이 잠에 들곤 했다.
일정을 확인하던 중이었다. 돌아오는 토요일에 지인의 결혼식에 가야 한다고 했던 것이 생각나, 몇 시인지 알아두려던 것이었다.
- 오빠 이번 토요일에 결혼식이라 그랬지?
- 아, 응
- 질문이 묘하게 느껴지네- 하하
- 결혼식 잘하고 올게
분명 내쪽에서 먼저 잘못 내뱉어진 말이었다. 그리고 또 내가 나서서 질문이 이상했다고 인정해 놓고서- 장난으로 받아친 그 사람의 말을 듣는 순간 멍청하게도 왈칵 눈물이 쏟아졌다. 전화 너머 그 사람에게 행여나 이 바보 같은 눈물을 들킬까 숨을 죽였다. 아주 찰나의 순간, 말이 끊긴 것을 감지한 그가 수습한다.
- 구경 잘하고 올게~
잘 들리지 않았다. 이미 말로 형용할 수 없는 슬픔이 온몸에 가득 차 출렁이다 거친 파도를 만들어내고 있었다. 이윽고 해일이라도 덮친 것처럼 덩치가 커진 감정은 생각지 말아야 할 결말까지 떠오르게 하고서야, 황폐해진 가슴 틈틈이로 유유히 빠져나갔다. 겨우 숨을 고르고, 갑자기 조금 슬퍼졌다고 다른 이야기로 말을 돌렸지만, 벌게진 눈에선 그렁거리던 눈물이 뚝뚝 거리며 떨어졌다. 그 사람의 목소리에서 염려 섞인 감정이 읽혔지만, 괜찮다고 말해줄 수가 없었다. 나는 괜찮지 않다.
학창 시절, 우리는 어긋났다. 서로를 향한 마음은 때를 놓쳐 첫사랑으로 영글지 못한, 설익은 자두 같았다.
긴 시간을 거슬러 올라와 ‘우리가 연인이 되어도 괜찮을까', 질문을 한 건 그였다. 여태처럼 앞으로도 쭉 곁에 있기를 원한다 했다. 친구에서 연인으로 발전하는 모든 이들의 공통된 우려인지도 모르겠다. 함께일 때 세상 그 누구보다 가까운 둘의 관계가, ‘안녕’ 하는 순간, 단골 식당의 사장님보다 멀어지고 마는 것은 나도 싫으니까, 무슨 마음인지는 안다.
- 왜 만남을 시작하는데, 헤어짐을 염려해? 오래오래 만나면 되지.
쉽게 던진 말은 아니었다. 나는 늘 그런 마음으로 사랑을 한다. 하지만-
하지만, 하고 덧붙였다. 혹시나 몇 년 이내에 결혼을 하고 아이를 낳겠다는 인생의 계획이 세워져 있다면, 고민을 좀 더 해보는 편이 나을지도 모르겠다고.
내 머릿속 사랑의 결말은 결혼이 아니다. 또, 결혼 다음엔 아이, 라는 순서도 정당하다고 여기지 않는다. 오히려 아이를 원한다면 결혼, 이라는 순서가 더 이상적이라고 생각한다. 그래서일까. 내가 가질 수 있는 것이 아니라고 판단하고 결정한 '아이' 때문인지, 나에게 결혼은 인생을 완성하기 위해 해치워야 할 미션 같은 것이 아니다.
이십 대 후반을 넘기고, 이것이 연인에게 공유되어야 할 아주 중요한 가치관이라 여겨, ‘제대로 된 연애' 가 시작될 무렵이면 늘 못 박듯 이야기했다.
하지만, 대부분의 상대방들은 비슷했다. 함께 쌓은 시간이 길어지고, 서로에게 안정감을 느끼게 될 만큼 최선을 다한 어느 순간이 지나면, 이제는 때가 되었다는 듯, 스윽. 은연중에 결혼에 대한 욕심을 비추거나, 아쉬움을 드러내거나 했다. 언제까지고 그들을 사랑하겠단 내 마음의 준비 태세는 그들의 변심에 조금씩 무너져갔다. 그리고 관계들은 자연스럽게 끝을 향했다.
- 그런 계획은 없는데, 그건 왜?
고민 없이 빠른 대답을 하고 그 사람이 되물었다. 나는 대꾸도 않고, 그저 다행이라고, 참 다행이라고 생각했다. 그 당시 나는 그에게 푹 빠져 있었다. 물론 지금 보다는 조금 덜했지만. 아무튼 으레 거치는 관문을 통과한 그와 나는 연인이 되어 오래오래 행복하게 잘 지내기만 하면 될 줄 알았다. 적어도 내가 이 사람을 이렇게 사랑하기 전까지는.
나는 이토록 사랑이 많은 사람을, 다정하고, 냉철하고, 순수하고도 영악한 사람을, 연인인 내가 외롭다 느낄 순간을 단 1초도 만들지 않으려 노력하는 사람을 만나본 일이 없다. 내가 좋아하고, 싫어하고, 필요로 하고, 알고자 하는 것들을 공부하고 체득해서 나에게 보여주는 사람.
너무나 소중해서, 내가 이렇게 그를 붙들어 두고 있어도 괜찮은 건지. 살며 처음으로 이렇게 얼토당토않은 것이 진심으로 고민스러워졌다. 턱시도를 입고 환히 웃으며, 웨딩드레스를 입은 누군가를 바라보는 그를 떠올리고 말았던 그날. 2초 남짓이던 상상 속의 그 표정 하나가 나를 쉴 새 없이 뒤흔들었다.
나는, 내가 줄 수 없는 행복을, 그가 원하게 될까 봐 두렵다. 그리고 내가 얼마나 진심으로 그의 행복을 바라는 지도 깨닫는다.
어떤 결론도 내리지 못한 밤이 흘렀다. 그 누구도 낸 적 없는 숙제를 미처 끝내지 못한 초조함으로 온 밤을 갉아먹고 새벽이 되었다. 밖으로 나가 파란빛이 감도는 놀이터를 뱅글뱅글 걷고 돌아왔다.
뜨겁던 여름의 열기가 식어간다. 어쩌면 언젠가 당신을 놓아주어야 할지도 모르겠다는 생각이, 끝없이 나를 괴롭힌다.
나의 사랑은 당신이 원한다면, 결국, 언젠가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