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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Bluese Sep 18. 2024

우리를 기념하는 일

떨림의 농도


연인이라는 이름으로 함께한 지 2년. 반드시 당일에 무언갈 함께 하고 싶었지만, 갑자기 어떤 일로 미팅이, 출장이 생길지 모르는 우리는 서로의 수고를 달가워하지 않으므로, 멀지 않은 풀 빌라를 빌리기로 한다.

나의 요구 조건은 멋진 노을을 볼 수 있을 것, 그 사람의 조건은 수영을 하다 쉬다 할 수 있을 것. 운전해서 20분이 채 안돼 닿을 수 있는 곳에 우리 둘을 모두 만족시켜 주는 숙소가 있어 예약을 했다.


함께 여행을 하거나, 늘상 함께 있지만 간혹 약속을 잡아 어딘가 나갈 일이 있을 때 꼭 북카페나, 서점을 들른다.

나는 어쩌면 아주 수동적인 연애를 하는 사람인지도 모르겠다. 20대 때, 파티를 좋아하던 사람과는 모든 주말을 빠짐없이 파티로 보냈고, 30대에 음악을 좋아하던 사람과는 연주를 보러 가거나 음악을 함께 듣거나 했다. 그 시간들로부터 조금 떨어져 바라보니, 어떤 것을 해도 함께 즐길 줄 아는 게 장점이라 매번의 연애에서 배우게 되는 것들이 많았었다는 생각이 들기도 하고, 그보다 그 시절의 나에게 필요한 부분을 채워주는 그 사람들이 좋았었던가 싶기도 하다.

운동도, 책도. 지금의 내 나이에 습관이라면 좋을 것들을 마침 그 사람이 좋아하고, 습관 삼아하고 있기에, 나도 슬쩍 발을 들여놓아 본다.


숙소가 출판단지 근처라, 통나무집 같은 내부 인테리어가 아기자기하게 매력적인 헌책방에 들르기로 했다. 각자의 취향대로 커피와 에이드를 고르고, 각자의 취향대로 그 사람은 경제 관련 서적을, 나는 오래된 가게들을 컨셉팅하여 인터뷰 소설로 옮겨 놓은 얇은 독립출판 서적을 골라 조금씩 읽다가, 서로에게 한 권씩 선물을 하기로 했다. 괜스레 구석구석 꼼꼼히 살핀다. 어느 날엔가 그 책이 손에 들렸을 때, 오늘의 공기와 기분을 기억하고 싶다. 그러던 중, 민트색 커버와 제목이 퍽 와닿는 책을 골라 들었다.
서점에 가서 아무런 사전 정보 없는 책을 볼 때, 대충 중간쯤을 홱 열어 아무 곳이나 문장을 휘리릭 읽어본다. 쭉 읽히면 그 페이지를 다 읽고, 그러고 나서도 다음 내용이 궁금해지면 앞으로 돌아가 어떤 책인지 작가를 살피고, 목차를 보고, 책의 첫 문장을 읽는다.

홱, 열었는데. 분명 책의 가운데를 열었는데, 양쪽이 모두 색이 조금 바랜 아이보리색의 백지다. 책장을 앞으로도 뒤로도 넘겨보았지만, 글자가 하나도 보이지 않는다. 이런 책을 잘도 골라냈다. 책 뒤편엔 견출지에 손으로 적어 붙여놓은 ₩4,500 이라는 헌책의 가격이 보였다. 그리고 그 순간 내 입꼬리가 올라간다. 바로 이거다. 


아무것도 인쇄되어 있지 않다며 사장님이 2천 원을 깎아주셨다. 요철이 있는 책의 하드 커버에 손바닥을 올려 뱅글뱅글 돌리며, 의미 있는 글들로 책을 채워보자고 마음먹었다. 그런 나를 미소 지으며 가만 바라보던 그 사람이 묻는다. 

- 좋아?

그리고 내가 1초도 망설이지 않고, 냉큼 대답한다. 

- 응! 너무 좋아. 세상에서 제일 특별한 책이야.


그날 우리는 근처에서 맛있다는 한정식집에서 특별할 것 없는 식사를 마치고, 예쁘게 2,3층 높이로 지어진 건물들이 가득한 출판 단지의 잡초가 높이 올라온 한적한 길을 천천히 걸었다. 고즈넉하달까, 을씨년스럽달까. 사람이 뜸한 길을 걸으며 혼자서 말도 안 되는 스릴러나 미스터리 같은 이야기를 막 지어낸다. 맞추어 걷는 발끝에 눈을 고정한 채로 내가 어이없고도 디테일한 스토리를 조잘거리면, 그 사람이 사이사이 호응도 해주고, 반전도 만들어 주고 한다. 

나는 걷는 일을 아주 즐기지는 않는 편인데, 그와 손을 잡고 함께 걷는 일은 언제든, 어디든, 어떤 날이든, 참 좋아라 한다. 함께 걷는 동안 우리는 한 시도 쉬지 않고 이야기를 나눈다. 눈에 보이는 것들을 그냥 읊기도 하고, 요즘 한참 고민 중이던 일들을 상의하기도 하고, 함께 아는 지인의 근황을 나누기도 한다. 그리고 지금, 이 순간 내가 얼마나 행복한 지 말해 주기도 한다. 

- 나, 오빠랑 이렇게 손 잡고 세계 일주도 할 수 있을 것 같아. 

내 체력을 아는 그 사람이 그럴 리 없다는 조로 소리 내어 웃어, 눈을 동그랗게 뜨고, 왜 못할 것 같으냐고 괜히 달라들어 보기도 하면서, 우리의 특별한 날을 기념했다. 


큰 의미 없는 것들에도 온갖 의미를 다 부여하게 하는 사람, 특별한 것들을 더 특별하다 느끼게 해주는 사람. 그런 그 사람과 함께인 매일이 나에게는 한없이 감사한 기념일들만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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