남편 회사가 정말 멀다. 본사로 출퇴근할 땐 하루 6시간도 걸린다. 회사가 멀다는 핑계로 학군을 바꾸고 싶다는 생각도 했다. 부끄럽지만 솔직하게 말하면 내가 사는 곳에서 아이를 ‘남들만큼’ ‘공부 잘하게’ 키우기 자신 없었다. 한창 이사 고민으로 골치 아플 때, 서울 여러 지역에 소위 잘나가는 지인 무리를 만났다. 일부는 부모님의 도움을 받아 아이를 양육하기에 자신의 영역에 대한 자부심이 대단한 이들도 있었다. 그날 나는 ‘다구리’라는 은어를 몸소 체험할 수 있었다. 내가 사는 지역에 단 한 번도 와본 적 없는 그들은 말도 안 되는 편파적인 경험을 언급하며 입을 모아 이 지역 비난에 열을 올렸다. 마치 나를 구해주듯 그곳에서 당장 빠져나오라고 안타까워했다. 얼토당토 않았고 그곳에서 한마디 못한 내 자신이 한심스러웠다. 그렇게 한마음 한 뜻으로 비난하던 사람 중 하나는 그날의 언행과 다르게 그 무리의 다른 지인을 비꼬고 낮잡아 보는 마음을 드러냈다. 슬펐다. 인간이라면 누구나 갖고 있는 면이겠지만 그들의 이중성을, 인간의 이기심을 낱낱이 보고 그들에겐 더 이상 조금이라도 곁을 내어 주지 않기로 다짐했다.
오늘 화장실에 앉아서 그날 그 무리가 떠올랐다. 나는 나를 사랑한다, 나를 소중히 여긴다고 생각하지만 때로는 작은 무언가로 마음이 흔들리기도 한다. 흔들림의 모든 씨앗은 기준점이 내가 아닌 남에게 치우쳐졌을 때다. 그렇다고 너무 곧은 내 안만 바라본다면 앞선 그 지인처럼 타인을 존중하는 인간미는 져버리게 된다. 나는 매일 긍정 확언으로 나를 다독이며 내게 집중한다. 남이 나를 어떻게 보는지 알고 있다. 그들에겐 때로는 순진하게, 때로는 차갑게, 때로는 가엽게 보일지도 모르겠다. 하지만 내가 보는 나는 대부분 순수하고, 대부분 따뜻하고, 대부분 현명하다. 나 또한 늘 가까이 있는 타인을 그렇게 대하고 여기고 싶다. 실상 남은 남에게 생각보다 관심이 없다.
우리는 남들에게 보이는 것과 정반대일 수도 있다. 오해하고 색안경을 끼고 바라보는 타인에게 나의 따스함이 닿지 않았다면, 인연은 또 거기에 머무는 것뿐이다. 우리는 남들에게 보이는 것보다 꽤, 훨씬 괜찮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