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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지크 Oct 15. 2019

나도 모르게 휴가 때 일을 하네??

홈쇼핑 PD의 휴가 헌납기(?)

24시간 돌아가는 홈쇼핑 회사에서 일을 하다 보면 근무시간과 휴식시간의 경계가 모호해진다. 어떤 날은 새벽에 출근했다가 어떤 날은 오후에 출근했다가 또 어떨 때는 주말 동안 방송하고 평일에 쉬기도 하는 등 불규칙한 스케줄을 소화하다 보면 이런 경계의 모호함은 굉장히 자연스러운 일이 된다. 회사에서 엄격히 금지하고 있기는 하지만 방송 직군만큼은 퇴근시간인 6시가 지나서도 업무 연락이 자연스럽다. 1년 365일 회사에서 누군가는 방송을 하고 있으니까. 나도 이런 생활에 익숙해지다 보니 이제 휴일에 일을 하는 것이 크게 힘들다거나 일과 내 개인의 삶 경계가 모호해서 슬프다거나 하지는 않다. 물론 좋은 건 아니지만 이런 것에 익숙해지다 보니 온전한 나만의 시간인 휴가 때마저 업무가 슬금슬금 휴식의 자리를 차지하려고 한다는 것이 큰 문제이다. 그것도 나의 의지로. 이번 글에서는 홈쇼핑 PD로 휴가 때마저 근로 의욕을 불태웠던 이야기를 해보려고 한다. 


터키에 암행어사 출두요!

비단 홈쇼핑만의 문제는 아니지만 여행 상품 방송을 자주 하는 홈쇼핑 입장에서 패키지여행 상품에 관련된 문제나 고객들의 불만이 끊임없이 발생하는 것은 달갑지 않다. 홈쇼핑에서도 많은 여행 상품이 선보여지는 만큼  홈쇼핑을 통해 여행을 다녀온 고객들의 불만이 종종 발생한다. 꾸준한 관리와 단속(?) 덕에 이제 사전에 고지되지 않은 쇼핑이나 각종 팁에 관한 문제는 거의 발생하지 않지만 현지 가이드의 교묘한 기술(?)에 당하거나 일정 변경 등으로 불편함을 겪은 상황 등은 꾸준히 발생하고 있다. 사실 여러 매체를 통해서도 홈쇼핑의 저렴한 여행 상품 이면에 숨어 있는 불편한 진실들이 많이 다뤄졌다. 사실 고객들은 홈쇼핑을 통해 국내 여행 업체로, 또 거기를 통해 현지 여행업체를 만나 여행을 하는 구조라 현장에서 확실히 컴플레인을 하거나 확실한 증거를 확보하지 않는 한 귀국 후 그 불편함들이 해결되기는 쉽지가 않다. 홈쇼핑에서도 자주 여행 업체에게 현지 여행 업체나 가이드 등의 관리를 요청하지만 MD가 모든 여행 상품을 몰래 경험하며 체크를 할 수도 없고 이역만리 떨어진 곳을 100% 관리하기란 쉽지가 않다.

한번은 여름휴가 여행지를 터키로 정하고 이것저것 알아보던 중에 여행 MD가 나를 찾아왔다.

"너 터키 간다며?  비행기랑 숙소 같은 거는 정했어? 일정은?"

"아 터키 가기로 마음만 먹었지 아직 아무것도 해놓은 건 없네요 하하"

"그러면 혹시 패키지로 가볼 생각 없어? 싸게는 못해주는데 선택 관광 하나 내가 해줄게"

나름 첫 장거리 여행이라 혼자 알아보고 가는 게 부담스러워 안 그래도 패키지를 알아보고 있었는데 이게 무슨 호의인가 싶었다. 자초지종을 들어보니 여행 간 김에 우리 회사에서 방송하는 여행 상품이 실제 잘 운영되는지 좀 봐달라는 부탁이었다. 그리 어려운 부탁도 아니었고 나름 여행 방송을 담당하던 PD였던 터라 나 역시 실제로 홈쇼핑 여행 상품이 잘 운영되는지 궁금하기도 했기에 흔쾌히 받아들였다. 그렇게 홈쇼핑 PD가 터키 일주 9일이라는 홈쇼핑 여행 상품으로 여행을 떠나게 되었다.  

문제는 편하게 여행을 즐겨야 하는데 아무래도 부탁받은 게 있다 보니 나도 모르게 계속 여행 일정이나 가이드의 진행 등에 대해 촉각을 곤두세웠다는 것이었다. 늘 여행 상품 정보 기술서를 가지고 다니며 기존에 고지된 일정 중에 빠진 게 있는지, 식사는 메뉴의 변경 없이 제공되고 있는지, 사전에 고지되지 않은 비용 청구가 있는지 등등 확인했다. 그러다 보니 여행을 마음 편히 즐기지 못했고 눈에 불을 켜고 잘못된 점을 찾으려다 보니 자연히 부족한 점들이 눈에 띄어 여행 내내 기분조차 썩 좋지 않았다. 그냥 왔으면 터키의 이국적인 풍경과 음식들을 즐겼을 텐데 말이다! 이렇게 투덜거리면서도 문제점들에 대해 메모하고 있는 나의 모습을 보며 이게 휴가인지 출장인지 구분이 되지 않았다. 

물론 실제로 여행 진행에 문제도 많이 발견되었다. 비용을 따로 지불해야 하는 선택관광을 무리하게 진행하려다가 밤늦도록 여행객들을 외부에 붙잡아 둔다던가 고지된 일정대로 진행되지 않아 어떤 날은 파김치가 되도록 끌려다니다가도 어떤 날은 무료하게 공원에 앉아 있는 경우도 있었다. 또 식사의 경우도 누가 봐도 가장 저렴하고 질이 낮아 보이는 식사가 계속 제공되었는데 패키지여행의 어쩔 수 없는 부분이라 넘어갈 수 있다 쳐도 한 번은 후식으로 검정 곰팡이가 슬어있는 귤이 제공되어 한바탕 난리가 났었다. 쇼핑 같은 경우도 잠시 하는 것이 아니라 두어 시간을 작은 마을회관 같은 곳에서 저렴한 패션쇼를 강제로 보게 하고 피혁 제품을 사게 하는 등 잘못 진행되는 점들이 굉장히 많이 발견되었다. 하나같이 꼼꼼하게 메모하고 증거 사진 및 동영상을 확보하여 휴가가 끝난 후 MD에게 전달했다. 그저 잘 운영되고 있겠지 하며 손을 놓고 있던 MD는 내 말을 듣고 소스라치게 놀라며 여행 상품 업체를 회사로 호출했다. 정확히 어떻게 마무리되었는지는 잘 모르지만 내가 직접 패키지여행을  처음부터 끝까지 경험하며 정리한 문제점은 크게 이슈가 되어 한동안 우리 회사 패키지여행 상품들이 굉장히 정석대로 잘 운영되었던 기억이 난다. 뿌듯한 경험이었지만 그 대가로 나의 휴가는 휴가인 듯 휴가가 아닌 듯 신경만 곤두세운 채 그렇게 끝나고 말았다.


이탈리아에서 벌어진 억지 감동극(?) 

주말이 다가오면 홈쇼핑에서는 다양한 여행 상품을 소개하며 시청자들을 유혹한다. 꽉꽉 채운 알찬 일정과 끝내주는 풍경, 푸짐하게 제공되는 식사 등을 호스트들의 유려한 설명과 함께 영상으로 보고 있자면 자연스레 '여행 한번 가볼까' 하는 생각이 든다. 나라는 또 어찌나 다양한지 해외여행의 영원한 로망 유럽부터 미주, 아시아 등 빠진 곳이 없다. 심지어 처음 들어보는 도시나 나라 등이 정말 낯설고 이국적인 풍경과 함께 소개되기도 한다. 문제는 유명한 나라와 장소는 한정되어있고 고객들이 좋아할 만한 것들도 정해져 있다 보니 비슷한 시간에 비슷한 여행 상품 방송을 하는 홈쇼핑에서는 새로운 그림 확보가 가장 큰 과제이다. 그러다 보니 해외로 여행을 가는 직원들에게 영상을 부탁하는 것이 홈쇼핑에서는 새로운 일이 아니다. 게다가 일과 삶의 경계가 모호하고 영상 분야에서는 나름 전문가인 PD는 늘 여행 담당 MD와 PD의 부탁 리스트 최우선에 위치한다. 

어느 여름휴가 때 나는 이탈리아로의 여행을 계획하고 있었다. 아니나 다를까 여행 MD가 한 달 전부터 로마의 새로운 그림이 필요하다며 은근하게 나를 압박했다. 터키의 아픈 기억(?)이 있던 나는 한사코 거절했고 그렇게 넘어가는 듯했다. 당시 나는 엄마와 함께 갈 예정이었는데 MD가 새로운 제안을 해왔다. 여행 방송 컨셉 자체를 엄마와 아들이 떠난 감동적인 여행으로 잡고 아예 현지에서 영상 통화 연결을 하자는 것이었다. 무뚝뚝한 아들이 엄마를 모시고 간 감동적인 이탈리아 여행 스토리와 그에 걸맞은 현지 그림을 보여주자는 MD의 말에 미친 소리 그만하라며 펄쩍 뛰던 나는 엄마에게도 아들과 함께 한 좋은 추억이 될 거라는 MD의 말에 홀딱 넘어가 그만 승낙을 해버렸다. 엄마와 내가 공항에서 출국하는 영상이 회사 여행 방송의 예고편으로 나갔고 실제 여행 상품 방송 중 영상 통화를 연결하여 트레비 분수의 현지 모습과 더불어 엄마와 여행하는 아들의 소감이 고스란히 방송에 나갔다. 문제는 이 1분 남짓한 영상 통화를 위해 우리의 하루 일정을 모두 미루고 정해진 시간과 정해진 장소에서 하염없이 기다렸다는 것이었다. 물론 나와 엄마에게 좋은 추억이 되었고 의미도 있었지만 여전히 휴가 때 회사를 벗어나지 못한 묘한 기분은 떨쳐낼 수가 없었다.


이게 출장이야? 적당히 좀 해!          

회사에서 셀프 페디큐어 상품을 굉장히 의욕 있게 방송한 적이 있다. 물량도 많이 확보하고 방송에 자원도 많이 투입하여 큰 스케일의 특집 방송을 기획한 것이었다. 문제는 발톱에 붙이는 페디큐어의 특성상 아무리 각질이나 큐티클을 제거하고 예쁜 신발을 신어도 고객들의 구매의욕을 자극할만큼 예쁘다는 느낌을 주기가 참 어렵다는 점이었다. 이 상품을 담당하던 나는 매일 같이 생각보다 예쁘지 않은 영상에 실망하고 이래서는 안 된다는 강박관념에 사로잡혀 있었다. 때마침 여름휴가로 하와이를 가기로 했었는데 이 일의 노예는 하와이의 아름다운 풍경을 떠올리며 머리를 식힐 계획보다는 그 풍경 속에서 페디큐어 영상을 찍으면 얼마나 예쁠까를 먼저 생각하고 있었다. 누가 부탁하지도, 시키지도 않았는데 나서서 영상을 찍어 오겠다고 공언을 했고 같이 가는 아내에게 간곡히 부탁하여 발 모델을 확보했다. 

반짝이는 모래와 티 없이 맑은 바다, 야자수가 끝없이 펼쳐진 해변, 리조트의 멋진 수영장 등을 배경으로 한 페디큐어는 찍을 때마다 예술 작품이 되었고 나는 거기서 만족했어야 했다.정말 그랬어야했다.  하지만 예술의 혼이 한껏 불타오른 나는 이국적인 풍경이 나올 때마다 아내에게 페디큐어 장착(?)을 부탁했고 일주일 가까이 나에게 시달리던 아내는 마침내 폭발하고 말았다. 이게 출장이지 휴가냐며, 이거 찍으러 하와이 온 거냐는 아내의 푸념을 듣고서야 나는 카메라를 고이 넣어둘 수 있었다. 재미있었던 점은 이렇게 찍어온 하와이 영상이 페디큐어 상품 판매를 위해 회사에서 준비한 수십 가지 영상들 중에서 고객들의 호응이 가장 좋았다는 것이었다. 회사에서도 칭찬을 많이 받았고 상품 판매에 큰 도움이 되었지만 상처뿐인 영광인 것은 변하지 않았다.


홈쇼핑 PD들은 하나같이 가늘고 길게 일한다고 이야기한다. 업무강도가 사람을 정신없게 할 정도로 강하지는 않지만 휴일은 물론이고 심지어 가끔은 휴가 때까지 업무를 위해 한 몸 불사른다. 흥미로운 점은 다들 누군가의 지시에 의해서라기보다는 본인이 먼저 의욕적으로 나선다는 것이다. 면세점을 갔다가, 마트를 갔다가, 여행을 갔다가 본인 담당하는 상품에 도움이 될만한 상황에 마주치면 누구나 거리낌 없이 카메라를 꺼낸다.  일상생활 속에서 접할 수 있는 거의 모든 상품을 다루는 회사에서 방송을 하는 직업의 숙명이 아닐까 싶다. 그래도 이제 시대가 바뀌어서 워라밸이 중요해졌으니 이제 휴가 때는  업무 스위치를 당당히 꺼놓는 걸로!  


* 최근 출판 준비로 인해 글을 오랫동안 쓰지 못했습니다. 기다려주신 분들께 죄송함과 감사의 말씀 드립니다.

* 현직 PD와 호스트들이 홈쇼핑에 대해 리얼하게 이야기해보는 팟캐스트를 개설했습니디. 

   부족한 방송이지만  홈쇼핑에 대해 다양한 이야기를 다루고 있습니다.

   http://www.podbbang.com/ch/177353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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