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지크 Aug 22. 2019

고독을 즐기는 자여! 홈쇼핑으로 오라!

자정에 가까운 시간. 숨소리 하나 들리지 않는 조용한 사무실. 새벽 방송을 준비하다 문득 고개를 들어보니 이 큰 사무실에 아무도 없다. 밤에 불 꺼진 사무실에서 일하는 게 무서웠던 적도 있었는데 이제는 오히려 그게 편할 만큼 익숙해졌다. 공중파 있을 때는 그래도 방송 하나 한다 그러면 PD도 여럿이고 작가들도 많아서 이렇게 적막했던 적은 없었던 것 같은데. 나보다 더 늦은 방송을 하는 후배가 사무실로 들어온다. 아무도 없는 줄 알고 노래를 흥얼거리다가 나를 보고 깜짝 놀란다. 그래 이제 나는 방송을 하러 갈 테니 이제 네가 사무실을 지켜다오. 


회사에서 고독하다는 감정을 꽤 자주 느낀다. 하나의 방송을 한 명의 PD가 담당하는 홈쇼핑 업무 특성상 혼자 다니고 혼자 결정하고 혼자 일하는 시간이 길다. 특히 늦은 밤이나 주말 같이 일반적인 업무시간마저 아닐 때는 이 넓은 사무실에서 혼자 뭘 하고 있는 건지 현실감이 떨어질 때도 있다. 스튜디오에 가본다. 카메라팀, 기술팀, 조명팀이 각각 '조'라는 이름으로 뭉쳐있다. 화기애애한 모습도 보기 좋지만 가끔 방송 연출에 대한 충돌이 있으면 PD는 혼자 이 모든 팀을 설득해야 한다. 

"아니 그걸 지금 하기에는 어렵다니까. 우리가 이 방송만 하는 것도 아니고"

이렇게 여러 명이 입을 모아 어려움을 토로하면 대개 PD가 양보한다. 민주주의 사회에서 혼자의 의견을 다수에게 인정받으려면 많은 노력과 근거가 필요하다. 근데 당장 방송이 코 앞이니 내가 양보하는 수밖에.


오늘은 운 없이 두 시간이 넘는 생방송을 진행한다. 스태프들은 철저히 한 시간 단위 로테이션이 있지만 PD는 그 방송이 몇 시간이건 책임지고 지켜내야 한다. 방송 시작 한 시간 후. 나름 대비를 하고 왔음에도 소변 신호가 온다. 아직은 안돼. 조금만 버텨줘. 한 시간이 조금 넘자 부조정실에는 교체 스태프들이 들어와 조용히 기존 스태프들에게 이야기한다. 

"고생하셨습니다 전달 사항 있나요?" 

부산하게 움직이던 스튜디오에서도 인터컴이 온다.

"피디님 카메라 감독 교체했습니다"

몸에서 신호가 왔는데 떠나는 스태프들을 보니 더욱 부럽다. PD도 장시간 생방송 때는 잠깐 화장실 갈 시간이라도 있으면 좋겠는데. 


방송이 끝나자 애매하게 식사시간이 지났다. 방송 직후 PD는 배고픔도 잠시 잊고 호스트, 업체, MD와 열띤 방송 리뷰를 한다. 그 사이 스태프들은 자신들의 조원들과 식사를 하러 떠난다. 호스트들은 특별한 경우가 아니면 자신의 다음 스케줄을 위해 떠나고 사무실에 있는 몇 없는 PD들은 이미 식사를 했을 것이다. 그러다 보면 식사도 종종 혼자 하게 된다. 다행히 나는 혼자 식사하는 것을 쓸쓸하게 생각하지 않는다. 오히려 즐기는 편이지만 가끔 밀려오는 고독감은 어쩔 수 없다.


새벽 방송 후 정당하게 주어진 달콤한 평일 오전 자유시간. 새벽녘에 들어와서 피곤하지만 어떻게든 평일 오전을 의미 있게 보내고 싶어 눈을 억지로 떠본다. 그 몇 시간을 알차게 보내기 위해 쇼핑, 영화관, 카페 등 여러 가지를 떠올려보지만 휴가가 아닌 담에야 평일 오전을 나처럼 자유롭게 쓸 수 있는 지인들이 없다. 고된 밤 근무 후 주어진 꿈같은 휴식 시간이지만 누군가와 같이 보낸다는 것이 현실적으로 힘들다. 결국은 혼자 TV 시청이나 운동을 하다 보면 금세 출근 시간이다.


가끔은 업무보다 고독감이 더 힘들 때가 있다. 업무의 특성상 어쩔 수 없는 일이고 적응도 되었지만 사람인지라 회사에서 외로움을 느낄 때가 많다. 모두를 이끌어야 하는 자리인지라 약한 모습을 보이면 안 되니 내색은 하지 않는다. 어쩌겠는가. 수많은 직업 중에 홈쇼핑 PD라는 직업을 선택한 건 나인데. 이 고독감마저 회사에서 내가 성장하는 밑거름이라고 생각하며 나갈 수밖에! 자 방송하러 갑시다!

이전 16화 나도 모르게 휴가 때 일을 하네??
brunch book
$magazine.title

현재 글은 이 브런치북에
소속되어 있습니다.

작품 선택

키워드 선택 0 / 3 0

댓글여부

afliean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