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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양과 May 03. 2021

코끼리는 그곳에 있어

후보 감독의 버스


 탄자니아에 있을 때, 휴가를 이용하여 수도 다르에스살람에서 서쪽 도시 끝 키고마까지 횡단하여 버스를 탄 적이 있었다. 30시간이 넘는 긴 시간, 버스 운전사의 피곤도와 더불어 엔진의 안전을 위해서인지, 버스는 20시간 정도 운전하고 나면 주변 근처 도시에 들러 몇 시간 정도 아침이 될 때까지 가만히 정차를 한다. 사람들은 화장실을 다녀오기도 하고, 버스 밖에 나가 이부자리를 깔고 잠을 청하기도 하고 가만히 버스에서 잠을 청하기도 한다. 이 정차된 곳 버스 라이트만 살짝 비추는 어슴푸레한 이 곳의 풍경은 세상의 비밀들을 살짝 비치는 알 수 없는 손전등의 플래시처럼 느껴졌다.


영화의 마지막 장면 버스의 헤드라이트가 주인공들을 비춘다.


 이 영화는 언젠가 한 번은 부딪칠 법한 인생의 막다른 곳에서 느끼는 감정들을 소개하고 있다. 죄책감, 두려움, 부끄러움, 나이 듦, 이러한 피할 수 없는 인생의 막다른 곳에서 주인공들은 어느 도시에 가면 움직이지 않는 특이한 코끼리가 있다며 그 코끼리를 보러 가는 과정 중 각자의 사연이 얽히게 된다. 결국 이들은 함께 그 코끼리를 보러 가기 위해 같은 버스를 타게 되고, 버스는 어떤 휴게소 같은 곳에서 어슴푸레한 빛을 비추는 비밀스러운 곳에서 멈춘다. 가만히 이들을 조명하는 길게 진행되는 쇼트를 보며 나는 앞서 언급한 키고마에서의 숨 막히는 풍경을 느낀다. 이 마지막 장면을 5분 이상 길게 가만히 보여줘도 나는 하염없이 빠져들 수 있을 것 같았다. 그러면서 마지막에 들리는 코끼리 소리에 소름이 돋았다


 이 영화에서 말하는 코끼리는 무엇이라고 설명해야 할까? 모두에게 다르게 해석되겠지만, 나에게 있어 이 영화의 코끼리는 신처럼 느껴졌다. 각자의 인생의 장애물 앞에서 붙잡을 수밖에 없는 어떤 초월적이고 신비한 존재, 꼭 있어줬으면 하는 존재로 말이다. 이 코끼리를 찾아가는 영화의 주인공들은 각자가 가진 고통을 나누고 연대라는 단어를 붙이기 애매한 연대를 한다. 아마도 코끼리라는 신은, 인생의 비애가 가득한 고통들 속에 공감하고 아파하는 그 어설픈 연대 어디엔가 있지 않을까 라고 조심스럽게 말하는 영화가 아닐까 싶다.


 한 때 교육청에서 학교에서 아이들 모두에게 사랑합니다.라고 인사를 시키게 한 캠페인을 진행한 적이 있었다. 아이들은 선생님을 만나면 안녕하세요 라고 인사하는 것이 아니라 고개를 꾸뻑 숙이며 사랑합니다.라고 인사를 하는 것이었다. 나는 참으로 천박한 캠페인이라고 생각했었다. 그 당시 전화를 받을 때도 사랑합니다. 교장들도 꼭 조회에 나가면 사랑하는 교직원들이라고 말을 쉽게 내뱉곤 했었다. 이토록 사랑에 대한 가치를 가볍게 여기고 천박하게 만드는 좋은 방법이 있을까?


 쉽게 정의를 말하고, 쉽게 인생의 해답을 제시하고, 또는 쉽게 자신이 겪은 고통의 위대함에 공감하라고 강압적으로 말하는 작금의 영화들 사이로 나는 관객과 직접 맞닿으려 하는, (우리들이 경탄했던 고전영화들처럼) 감독의 천재성과 비애감을 느꼈다. 그리고 이 감독이 이 영화가 첫 장편이자 유작이라는 것도 들었다. 천재는 단명할 수밖에 없는 것인가.  후보 감독은 이 영화를 통해 코끼리를 찾아가는 관객들과 호흡하고 싶어 하지 않았을까 생각한다. 후보 감독의 코끼리를 찾아가는 여정의 버스에 함께 올라탄 한 명의 관객으로 남고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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