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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꿈의정원 Feb 14. 2019

숙취에 관한 몇 가지 아무 말

거의 매일 술을 마시고, 일주일에 이틀 정도는 숙취에 갤갤대는 삶을 살고 있다. 술꾼의 슬픔이라면 이렇게 온갖 종류의 맛있는 술과 안주가 넘쳐나는 세상에 숙취 해소 기술은 음주 조장에 관한 하드웨어(?)와 소프트웨어(?)의 비약적인 발전 정도에 비해 너무나 뒤처져 있다는 것이라고 강력하게 이 연사~! 소리 높여~! 외치고 싶다! 


어쨌거나, 어제 마신 술은 오늘 마실 술의 대안이 되지 못하고, 오늘 마시지 못한 술은 내일 마실 술이 위로가 되지 못해서 오직 지금 이 순간 나의 잔을 채우고 있는 술만이 즐거움인데, 오늘의 즐거움이 내일, 도무지 어찌해도 어찌할 수 없는 고통이 되어 돌아온다는 것은 정말 너무나도 비극적인 결말이 아닌가 싶은 것이다.




숙취로 갤갤대다보면 이런저런 상상 같은 것을 하게 되는데,

그중 하나 과거로 돌아갈 수 있게 된다면


화학과에 진학하겠다. 좀 더 깊은 학문의 연구를 위해 대학원에 들어가서
노동이 숙취해소에 미치는 악영향, 숙취와 인류문화발전 저해의 상관관계에 관한 고찰 등의 논문을 발표하여 학계를 발칵 뒤집어 놓고, 45세 즈음에 숙취해소를 술의 종류에 따라 세분화하여 마시면 3초 안에 어떠한 숙취라도 완전히 사라지는 소주 숙취, 양주 숙취, 막걸리 숙취, 양주 숙취, 폭탄주 숙취 전용 드링크제를 개발 유통, 세계 최초로 노벨 의학상과 노벨 화학상을 동시 수상, 그런 나의 은덕을 기리기 위해 모든 애주가들은 술을 마실 때 자발적으로 앙망 선서를 한 후에 술을 마시는 문화 인류사에 단 한 번도 있지 않았던 기현상을 초래, 이것을 훗날 문화 인류학자들은 앙망 현상이라 명명, 명실공히 숙취해소의 아버지라는 별칭으로 불리면서 온갖 부와 명예와 권세를 누리다가 125세 즈음에 "나는 술을 사랑하여 일생을 숙취와 싸웠으나 종내엔 숙취마저 사랑하게 되었노라"라는 유언을 남긴 뒤, "숙취로부터 인류를 구원한 사내. 세상 모든 애주가들의 단 하나의 영웅. 이곳에 묻히다" 란 묘비명을 새기고 프랑스 파리의 페르 라세즈 묘지공원에 묻히는 것이었다. 


물론 지금 현재 스코어를 봤을 때 저런 인생을 살게 될 가능성은 제로에 수반할 뿐 아니라, 지금 나는 인류는커녕 내 비루한 몸뚱이마저도 숙취에서 헤어 나오지 못하고 있는 실정이다. 



숙취의 괴로움에 몸부림치다 보면 원인은 다르지만 고통의 형질은 아무래도 그리움과 좀 닮은 구석이 있다. 그리움은 먼 데서 밀려온다. 약이 없다. 머물러 떨어질 줄 모른다. 그저 시간이 흐르길, 그리하여 아픔의 원형인 그리움 자체도, 그 원형의 파생 감정인 원망도 사라지길 가만가만 기다리는 것 말고 할 수 있는 것이 없다. 어느 옛 시인의 말처럼 푸르른 날에만 그리운 사람을 그리워하지 못한다. 의지로 어찌할 수 있는 일이 아니기 때문이다. 시간이 좀 더 지나면 이런 덧없는 그리움에 고통스러워하는 나 자신마저도 원망하게 되지만, 이 또한 시간이 지나면 결국엔 아무것도 아니게 되어버린다.  


숙취는 안에서 머무른다. 이거야말로 진짜 약이 없다. 컨디션에 여명을 마셔 제켜도 떨어질 줄 모른다. 
물을 많이 마셔라, 사우나를 가라, 콩나물이 좋더라, 다 개소리다. 나는 밀란 쿤테라의 소설이 아니라 숙취에서 진정한 '참을 수 없는 가벼움'  같은 것을 느낀다. 모든 인간은 숙취 앞에 평등하다. 우리의 몸뚱이는 보잘것없기에 이 숙취를 온몸으로 받아내며 시간이 흐르길 기다리는 수밖에 없다. 그리움이 원망을 수반한다면, 숙취는 간혹 자기혐오를 동반하는데 이것이 숙취가 진짜 무서운 점이다. 몸도 아픈데 마음도 병들게 하고, 어제의 나 자신을, 그 즐거웠던 시간들을 후회하게 만든다. 하지만 숙취도 그리움도 반드시 시간이 자니면 사라진다는 믿음과 희망이 있기에 오늘의 그리움과 오늘의 숙취를 우리는 견디고 또 견딘다.

그리고 한 번도 상처 받지 않았던 것처럼 사랑하듯, 한 번도 숙취에 시달리지 않았던 것처럼 마시고, 또 마신다.



파블로 피카소는 자신의 여든다섯 번째 생일에 이렇게 말했다고 한다.
"나는 몇 시간씩 나무나 꽃을 바라보곤 한다. 어떨 때는 어찌나 아름다운지 소리 내 울고 만다."

피카소의 이 이야기에서 나는, 인간의 무력함에 대해서 생각한다. 인류 역사상 가장 위대한 예술가 조차도 늙고 병드는 일은 피할 수 없었을 것이고, 초로의 늙은이가 화사하게 핀 꽃과 나무 앞에서 할 수 있는 일이라곤 그저 소리 내 우는 일 정도였던 것이었나 보다.


피카소가 느낀 이 감정 비슷한 것을, 나는 숙취 앞에서 느낀다. 그래서 이렇게 말한다.

"나는 몇 시간씩 숙취에 시달리곤 한다. 어떨 때는 어찌나 고통스러운지 소리 내 울고 만다." 


이 글을 쓰면서 숙취가 나았고, 또다시 술을 마시러 갈 작정을 하고 있다. 인간은 같은 실수를 반복하고,  망각은 때로 축복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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