좋았던 기억만 좋구요, X 같은 기억은 영원히 X 같아요.
남자 입장에서 감히 조언하자면
상처 많고, 정서 불안정하고, 한 편으로 예술적이고, 허무와 고독이 가득하고, 마치 피 흘리는 동물 같기도 한데 나에게만 그 내면의 깊숙한 무언가를 보여주고 있는 것 같은 어떤 남자를 만나게 되었다면,
그 사람에게 자꾸 마음이 쓰이고 이 남자의 슬픔과 비애를 오직 나만이 구원해 줄 수 있을 것 같다면,
기꺼이 그 사람을 위한 유일하고 특별한 존재가 되어주겠다거나, 내가 그 사람을 길들이겠다거나, 기꺼이 저 상처 받은 영혼을 구원하겠다는 인류애적 마인드를 가질 생각일랑 1도 하지 말고 그냥 도망치시라.
당신은 절대 그 사람을 구원하지 못한다. 온갖 상처를 다 받고, 너덜너덜한 채로 연애는 끝이 날 것이(라고 확신한)다. 이렇게 단정적으로 이야기할 수 있는 이유는 위에 언급한 캐릭터가 정확히 나였기 때문이다.
온통 미움과 원망과 허무로 가득 차 있는 절망의 세상을 나는 살아가. 누구에게도 쉽게 곁을 주지 않는 탕아인 데다가, 프랑스 문학과 말러를 사랑하고 하루키 따윈 절대 안 읽어. 문화적 다양성을 존중하지만 아이돌 노래는 안 듣고, 니가 짧은 치마를 입거나 다른 남자랑 얘기라는 꼴은 절대 못 보지만 정치적으로 되게 진보적이며 가끔 집회 같은데도 가고 성매매 같은 건 하지 않지. 이런 이상하고 특별한 나를 구원할 수 있는 건 오직 당신뿐인데 넌 어떻게 할래?
이 요상하고 희한한 콘셉트(라고 할 수 없다. 실제로 그때의 나는 그랬으니까)는 예상외로 높은 연애 성공률을 자랑했지만 객관적으로 말하자면 그런 인간이 제대로 된 연애를 할 수 있을 리 없다. 더할 나위 없이 좋은 사람이었지만 나는 그러지 못했다. 관계가 시작되자마자 상처 주고 화해하고 다시 사랑을 속삭이는 과정이 반복됐다. 그 사람이 점점 지쳐갔다는 걸, 그렇게 내가 남긴 생채기는 깊이 남아 사라지지 않았다는 걸 나중에 알았다. 언제나 그렇지만 소중한 것들은 지나고 나서야 안다.
멍청했고, 치졸했고, 갈팡질팡했다. 아프게 하고 싶어 견딜 수가 없을 때 그 사람은 이별을 고했다. 후회했고, 되돌리고 싶었지만 그럴 수 없었다. 사랑만 받으면서 살아도 모자랄 사람의 수많은 밤을 눈물로 보내게 했다는 것을 그즈음에야 알았다. 너무 사랑하면 언제고 너무 증오할 수도 있는 거라고 그때의 나는 생각했고, 사랑한다면 소중히 다뤄줘야 하는 거라는 걸 지금의 나는 생각한다.
견딜 수 없을 만큼 고통스러웠지만 모든 고통이 그렇듯 커다랗던 마음도 침식과 풍화작용을 거쳐 조금씩 안정을 찾았고 가끔 돌아보면 부끄럽고, 미안하고, 행복한 기억 정도로 남았다. 아마 그 사람에게도 나는 비슷한 기억으로 마음의 서랍 어느 한 곳에 저장되어 있을 거라고 생각했다. 그러다 최근에 몇 가지 에피소드가 있었다.
에피 1.
후배들이랑 오랜만에 술을 먹게 되었는데, 술자리가 무르익자 어느 순간 그녀들이 자신의 옛 남자 친구들과의 흑역사를 이야기하기 시작했다. 그러다가 내가 물었다
- 처음엔 아프고 힘들어도 연애라는 게 시간이 지나면 다 추억이 되는 거 아냐? 과거는 다 아름다운 거잖아
그러자 후배가 말했다.
- 모르는 소리 하시네요. 좋았던 기억만 좋구요, 좆같은 기억은 영원히 좆같은 거예요...
에피 2.
함께 프로젝트를 진행하면서 꽤 친해진 동료와 일을 끝낸 뒤 함께 차를 타고 집으로 가던 중에 랜점으로 틀어놓은 노래에서 짙은의 '잘 지내가 우리'가 흘러나왔다.
'마음을 다 보여줬던 너와는 다르게 지난 사랑에 겁을 잔뜩 먹은 나는 뒷걸음질만 쳤다'
....
'분명 언젠가 다시 스칠 날 있겠지만 모른 척 지나가겠지. 최선을 다한 넌 받아들이겠지만 서툴렀던 나는 아직도 기적을 꿈꾼다. 눈 마주치며 그땐 미안했었다고 용서해달라고 얘기하는 날그때까지 잘 지내자, 우리'
아아 음악이란 얼마나 힘이 센가. 속절없이 옛 기억에 빠져 감상에 젖고 말았다.
노래를 흥얼흥얼 거리다가 말했다.
- 노래 너무 좋지 않아요?
그러자 그녀가 냉소적인 미소를 지으며 나에게 이렇게 말했다.
- 하여튼 남자 새끼들은 있을 때 잘할 것이지 꼭 차이고 저런다니까요.
기억은 다르게 적힌다는 이소라의 가사는 정말 맞는 말이구나. 부끄럽고 미안하고 행복한 기억은 '나에게만' 해당되는 사항이겠구나. 나는 여전히 여자를 참 모르는구나, 를 드디어 알았구나.
시간이 조금 지나서 김행숙의 시를 떠올렸다.
"사랑은 자꾸자꾸 답을 내놓지 너를 사랑해/ 그리고 너를 미워해도 이야기는 계속된다"
그렇다. 사랑이 끝났어도, 이야기는 계속된다. 삶이 끝난 것은 아니므로. 그저 함께 써 내려가던 순간이 끝났을 뿐이다. 살다 보면 남은 이야기를 함께 써줄 누군가가 나타날 수도, 그렇지 않을 수도 있다. 남겨진 이야기는 남겨진 자의 몫이고, 떠나간 이의 이야기는 떠나간 자의 몫이니 남겨진 내가 떠나간 그녀의 이야기를 궁금해해서는 안 되는 것이다.
지난 연애를 아름답게 포장하는 일은 그만두자. 좋은 기억으로 남았을 거라는 생각은 하지 말도록 하자. 그리고 다른 누구도 아닌 앞으로의 나를 위해 다정하고, 자상하고, 무던하고, 한눈팔지 않는 사람이 되자. 이것이 나의 지난 사랑이 내놓은 답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