tick, tick... Boom!
살아있는 것들은 모두 나이를 먹는다. 지구의 자전과 공전 횟수에 따라. 각자에게 주어진 시간의 흐름에 따라. 하루살이처럼 빠르거나 거북이처럼 느릴 순 있어도 모두 나이를 먹는다는 사실은 변하지 않는다. 모두들 나이를 먹는 만큼 무언가를 얻고 또 잃는다.
하얀 솜털을 잃고 확실한 의사표현 방식을 얻는다. 통통한 볼살을 잃고 평생 함께 할 것 같은 인연을 얻는다. 밤새 놀아도 지치지 않는 활력을 잃고 통장에 작고 소중한 잔고를 얻는다. 깊은 바다에 다이빙하는 무모함을 잃고 산을 오르며 딛고 있는 두 발에 안정감을 얻는다.
이렇게 '시간이 흐르고 나이를 먹는다'는 간단한 명제에서 우리는 노화를 분리할 수 없다. 마치 태어날 때 얼마든지 빼서 쓸 수 있는 풍족한 젊음의 잔고가 한 살 한 살 먹어갈수록 점점 적어지다 끝내 사라져 버리는 것만 같다. 젊음으로 통칭하는 건강과 체력, 패기, 열정, 아름다움 등에 매 순간 아쉬움을 느끼고 한 해가 지날수록 두려움을 느낀다. 기대수명이 무려 100세를 향해 달려가고 있는 세상이지만 우리 사회에서는 한참 어린 시절부터 나이 먹는 것을 두려워하고 끔찍하게 생각하다가 초조함까지 느끼고 만다.
만약에 과학자들이 좀 더 열심히 일해서 사람이 불로 장생할 수 있게 된다면 어떨까? 산타가 떠난 자리에 남은 엄청난 연말의 후유증이 좀 덜해질까?
영화 'tick, tick... Boom!'은 답이 '아니'라고 한다.
주인공인 조나단 라슨은 서른 살 생일을 앞두고 극한의 초조함을 느끼고 있다. 바깥에서 보면 그저 화려한 곳, 좋은 약도 좀 하고 특이하면서 재밌는 집단이지만 현실은 전기요금이 밀려서 촛불을 켜고 악보를 써야 하는 예술계. 존의 여자 친구 수잔은 미래를 그리기 힘든 그 삶의 불확실성과 불안정함에 질려 소호를 떠나려고 한다. 존의 룸메이트인 마이클도 현실에 타협해 도무지 정리가 된 구석을 찾아볼 수 없는 둘의 집을 떠난다.
1990년 뉴욕. 멋진 명함 하나로 젊은이들이 떼 돈을 벌던 시기. 마이클은 예술계를 떠나자마자 근사한 물질적 성취를 얻는다. 그의 성공이 부럽다. 나만 부러워하는 게 아니라 존도 부러워한다. 여자 친구와 가족, 친구들 앞에서 사회에 소속된 일원으로 보이고 싶다. 이제 곧 서른인데 번듯하게 앞가림하지 못하고 작품을 내지도 못하고 곡도 쓰지 못한 채로 서빙을 하고 있는 현실이 불안하다. 서른이 되기 전에 뭔가를 해야 할 것 같다. 정착하고 성공해야 할 것 같다. 안정적으로 보이는 삶을 존은 누구보다 원한다.
정말 매력적인데 착하기까지 한 수잔은 존이 보편적인 삶의 방식을 선택해서 함께 하길 진심으로 바란다. 존은 선택하지 못한다. 곡은 여전히 써지지 않는다. 수잔은 정말 참을성 있게 존을 기다려주지만 시간은 존이나 수잔의 심정 따위는 하나도 신경 쓰지 않는다. 째깍거리는 소리와 매트로눔의 규칙적인 박자는 폭탄의 타들어가는 심지 같다. 청춘의 끝이 다가오고 있다. 어쩌면 희망의 끝일지도 모른다.
영화 전반의 긴장감과 속도는 이 나이 강박 문제의 본질이 노화에 대한 두려움이 아님을 보여준다. 2021년의 끝을 살고 있는 우리도, 1990년을 살았던 존도 일반적이고 보편적인 평균 집단에 속하지 못하는 것에 대한 두려움을 안고 산다. 사회적인 인정을 받고 성공적인 결과물을 갖추는 것에 대해 걱정하고 서두르며 초조해한다. 번듯한 내 집과 멋진 차. 누군가가 대체하지 못하는 내 자리에서 일을 하는 것, 등등.
스물아홉이었던 나의 마음도 존과 같았다. 누구나 겪는 그 순간의 혼란과 불확실함, 두려움이 영화에 잘 담겨있다. 그리고 영화가 뮤지컬을 품고 있다. 극과 극작가의 삶 사이 경계를 잔뜩 뭉게 놓은 게 매력적이다. 뉴욕의 연극과 뮤지컬, 12월 달 맨해튼의 분위기를 잊지 못하는 나는 이런 연출 때문에 존에게 묘하게 더 몰입했다. 아마 뮤지컬 틱틱붐을 봤다면 영화가 더 흥미로웠을 것 같다.
조나단 라슨이 젊은 나이에 죽었기 때문에 영화 속 뮤지컬을 선보이는 결말과 현실 간의 얇은 괴리에서 적당한 씁쓸함과 여운을 느꼈다. 영화가 끝나고 존의 삶을 졸졸 따라다니면서 함께 겪은 초조함과 불안함에서 빠져나오면서 나이를 먹는 것에 대한 두려움을 직시해야 한다는 생각으로 이 글을 쓰게 됐다.
시간 좀 흐르고 세월 좀 지나는 것에 꺾이지 말아야지. 의식적으로 내가 하고 있는 일에 확신을 보태줘야 한다. 흔들리는 존에게는 권위와 안목까지 갖추고 있는 스티븐 손드하임의 말이 있는데, 아무리 봐도 그만큼의 천재성을 갖고 있지 않은 내게는 나란 백이라도 든든해야 할 것 같다. 성공은 언제 어떻게 올 지 모르고, 아무리 대단한 성공을 하더라도 그 순간은 직접 누려야겠기에. 당장의 불안함으로 도망치지 말고 삶의 하루하루를 꼭 쥐어야지. 그래서 존처럼 성공할 테다. 자신의 삶을 좋아하는 것으로 가득 채우고 죽어야지.
모처럼 연말에 보기 좋은 영화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