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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태인 Jan 26. 2024

[세버그] 진실은 승리한다

신념의 무게






2015년 전후, 페미니즘 리부트가 일어난 이후, 나는 나와 같은 생각과 문제의식을 지닌 사람들이 생각보다 많았다는 사실에 기뻤다. 이 시기쯤 해서 남자가 좋아하는 화장법이나 패션, 그리고 애교 등을 고민하던 여초 커뮤니티의 분위기도 180도 뒤바뀌어 여성의 주체성을 더 중시하는 경향이 강해졌다. 이 추세에 맞추어 그동안 여성 소비자들에게 남자 친구나 썸남에게 사랑받기 위해선 본인들의 제품을 구매해야 한다고 속삭이던 뷰티 및 패션 업계는 노선을 변경해 자기 스스로를 사랑하기 위해 본인들의 상품을 계속 애용해 달라고 설득하기 시작했지만, 그나마도 ‘꾸밈 노동’이라는 단어가 부상하면서 나를 위해서든 타인에게 잘 보이기 위해서든 일정 이상 외관에 공을 들이는 행위 자체에 의문을 가지는 목소리가 늘어났다.


내 생각을 당장 또래의 친한 친구들에게도 이해받지 못한다는 사실에 일종의 갈증을 느끼고 있던 나는 이러한 변화들이 당연히 반가웠다. 하지만 오랜 시간 묵직하고 진득하게 버텨온 기존의 구조나 사상은 하루아침에 변화하지 않는 법이다. 사이다를 한두 모금쯤 들이켰다 싶은 바로 그 순간부터 역풍이 불어오기 시작했다. 역지사지를 기대했던 ‘미러링’이라는 전술은 분명 많은 이들을 설득하는 데 성공했지만 그만큼 반발 또한 불러일으켰다. 페미니즘을 지지하는 사람들 내에서의 균열 또한 있었다. 누군가는 화장을 해서, 또 누군가는 연애나 결혼을 해서 자격 미달이라는 검증이 이루어졌다. 이와 같은 혼란 속에서 페미니즘에 반대하는 이들의 비난과 조롱의 목소리는 당연히 쉬지 않고 더욱 높아졌다. 그러다 의문이 생겼다. 이렇게 힘들어야만 하는 걸까.



우리가 진실 앞에 눈 는 한


활발하게 활동 중인 영화배우 진 세버그. 그런 진은 새로운 작품 촬영을 위해 비행기에 오르고, 그곳에서 흑인 인권 운동 단체인 흑표당의 멤버 하킴 자말을 만나게 된다. 언제나 세상을 변화시키는 일에 대한 갈증을 느끼고 있던 진은  하킴과 가까워지고, 그의 활동에 후원 및 개입하는 것은 물론, 두 사람 모두 배우자가 있음에도 연인과 같은 사이로 발전한다. 자연스레 둘의 만남이 잦아지면서 진 역시 하킴의 활동을 예의주시 하던 FBI에 의해 표적이 되고, 과거의 이력으로 인해 진에 대한 FBI의 도청과 감시의 강도는 점점 높아진다.


흑표당에 대해 더 알고자 하킴을 찾아온 진


이내 조직을 와해시키려는 FBI에 의해 진과 하킴의 불륜 사실이 폭로되고, 하킴은 진 역시 표적이 되었음을 알린다. 그동안 도청과 감시를 당하고 있었단 사실에 충격을 받은 진은 이내 신경이 날카로워지고 약에 의존하기 시작하지만, 그를 향한 FBI의 공격은 여기서 그치지 않고, 언론은 악의적인 기사를 쏟아낸다. 이를 견디지 못해 유산을 하고 자살 시도를 하기에 이르지만, 기자회견 자리에 등장한 진은 말한다. 진실은 언젠가 밝혀질 것이라고.



그럼에도 선다는 것


영화 ‘세버그’는 실화를 바탕으로 하고 있으며, 주인공 진 세버그에 대한 이야기는 한국의 TV 프로그램인 ‘당신이 혹하는 사이’에서도 다루어졌을 정도로 잘 알려져 있다. 그래서였을까. 영화를 영화로서만 보고 싶었지만 역시나 한계가 있었다. 누구나 부러워할 만한 외모에, 한창 주가를 올리고 있는 커리어, 그리고 아직은 젊은 나이까지. 이처럼 남 부러울 것 없다는 것은 다른 말로 잃을 것이 많다는 의미이기도 하다. 이 정도의 조건을 갖추었다면 대중들을 불편하게 만들지 모르는, 심지어 반대하는 사람들이 더 많을지 모르는 일에 목소리를 내기보다는 자신의 상황과 행운을 마음껏 누리며 스타로서 사랑받는 삶에 만족하는 것이 훨씬 더 쉬우면서도 현명한 선택일지 모른다.


그러나 언제나 옳은 일에 마음이 끌려 왔던, 그리고 옳은 일에 힘을 보태고 싶었던 진은 대부분의 사람들이 저항 없이 선택할 안정적인 답지를 과감하게 찢어 버린다. 그리고 결국 옳은 길에 섬으로써 자기 자신을 위험한 상황으로 내몬다. 진이 흑표당을 지지한 이후 FBI는 철저히 그의 삶을 망가뜨리기 시작한다. 언제 어디서 누군가 나를 지켜보고 엿듣고 있을지 모르는 상황은 제아무리 이성적이고 냉철한 사람이라도 견디기 힘들 것이다. 게다가 이처럼 24시간 자신을 좇는 눈과 귀의 주인이 미국 법무부 산하의 정보기관이라니, 이미 대중의 관심과 시선에 익숙해졌을 진이라도 버거울 수밖에 없었으리라.


감시와 도청을 당하고 있다는 생각에 지쳐가는 진


다행히 FBI 지부에 잠입한 운동가들에 의해서 불법 감시 작전이 폭로되었고, 의회는 이를 강하게 규탄했다. 진은 그 뒤로도 흑표당을 후원하고 지속적으로 정치적이고 사회적인 목소리를 냈다고 한다. 그러나 안타깝게도 이처럼 자신의 모든 것을 버릴 각오로 옳은 편에 섰던 진의 삶은 여느 슈퍼히어로들이 등장하는 영화들과 달리 해피 엔딩을 맞이하지는 못했다. 털어서 먼지 안 나는 사람 없다고 했던가. 진 또한 한 사람이었기에 그에게도 흠이 있었다. 그리고 그의 사소한 흠들은 그의 몰락을 바라는 이들에게 좋은 빌미를 제공했다. 이미 FBI와 언론에 의해 한동안 홍역을 치른 진은 이후에도 신념을 굽히지 않을 경우 어떤 상황이 펼쳐질지 모르지 않았을 것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는 끝까지 그의 길을 걸었다.


오랜 시간 견고하게 버티고 있는 구조를 무너뜨리는 것은 그 자체로 고되고 지치는 일이다. 그나마도 이러한 기존 구조를 지키는 이들은 언제나 다수이고, 그만큼 강하다. 그리고 그들은 가진 것을 놓치지 않기 위해 기꺼이 자신들의 힘을 활용한다. 이러한 상황에서 주변 이들에게 이해나마 받을 수 있단 보장도 없다. 하지만 작은 목소리들이 하나둘 모이고, 짧은 시간이 하나둘 쌓이다 보면 마침내 변화에 도달하는 순간은 반드시 찾아온다. 이후 찾아오는 부끄러움과 자기부정은 억압자들과 그들에게 힘을 실어준 이들의 몫이다. 진의 데뷔작 ‘성 잔 다르크’에서 연기한 잔다르크가 진 그 자신과 닮아 있다는 생각이 든다. 왜 신념을 추구하는 일은 항상 고통스러워야만 할까. 마침내 승리를 이루어내기까지, 옳은 길에 서고자 하는 모든 이들이 전부 포기하고 싶을 정도로 지치지만은 않기를. 이것이 나의 바람이다.


영화 '세버그'의 한 장면






사진 출처 : 다음 영화

https://movie.daum.net/moviedb/main?movieId=13436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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