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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태인 Oct 20. 2023

[이웃집에 신이 산다] 가부장적 권위 해체하기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럼에도 불구하고!






언젠가 한 번 이런 상상을 해 본 적이 있다. 알고 보니 인간보다 여러 의미에서 거대한, 말하자면 신과 같은 존재가 우리들을 조종하는 건 아닐까 하는. 이러한 상상에는 당연히 베르나르 베르베르 책의 영향도 있었다. 개인적으로 유신론자나 운명론자와는 거리가 멀지만 이와 같은 상 자체는 제법 흥미로웠다. 내가 유난히 집에 틀어박혀 책이나 영화 보기를 좋아하는 것도, 공포물이라면 질겁하다 어느 순간 끌리기 시작한 것도, 그리고 자칭 호빗이라 일컫는 키를 지닌 것도 모두 어떤 절대자의 놀음에 따른 것일지 모른다는 상상. 그렇다면 왜 나에게 이런 특징들을 주었는지, 순전히 랜덤인지 아니면 어떤 기준이 있는 것인지 궁금했다. 와중에 누군가는 남들보다 더 불행한 조건이나 상황을 맞이할 텐데, 이런 사람들을 볼 때 창조자로서 어떤 생각과 감정이 드는지 역시도.


그러나 신 혹은 그와 유사한 존재에 의해 농락당하는 인류에 대한 나의 상상은 항상 같은 결론에 도달한다. 그럴 리 없다. 앞서 언급한 바와 같이 나는 유신론이나 운명론자가 아니며 이런 개념이 오히려 조금은 불편하다. 이런 내가 신봉하는 것은 자유 의지이다. 그리고 입버릇처럼 하는 말은 ‘사람 일은 모른다’이고. 결국 내 선택이 중요하고, 다 내가 하기 나름이라고 믿고 사는 사람으로서 나의 이러한 성향마저 어떤 절대자의 프로그래밍에 의한 것이라고 생각하면 억울하다 못해 허망하다. 거의 살 이유가 없다고 해야 할까. 이유 운운하는 것부터 주체성에 대한 집착이 느껴지지 않는가. 그러나 강한 신념이 있다고 해서 상당한 위트와 약간의 비판 의식이 곁들여진 작품까지 마다할 필요는 없다. 더구나 영화의 시작부터 어린 딸이 한심하고 못된 하느님 아버지를 골탕 먹이는 이야기라면 더더욱.



• 하느님 아버지에 맞선 딸


통로도 없는 좁은 집에서 살고 있는 어린 소녀 에아. 그런 그의 아버지의 이름은 하느님이요, 집 나간 오빠의 이름은 J.C. 즉 Jesus Christ 혹은 예수 그리스도이다. 어머니와 에와에게 귀찮은 일들을 모두 시키기만 하고, 가출한 오빠를 비난하기 바쁜 아버지는 하루 몇 시간씩 서재에 틀어박혀 나올 줄 모른다. 어느 날 에와는 아버지가 잠든 틈을 타 서재에 몰래 들어가고, 그곳에서 아버지가 자신이 만든 피조물인 인류에게 각종 재난을 일으킴으로써 스트레스를 풀고 있단 사실을 알게 된다. 에와는 이에 분노를 느껴 아버지를 비난하다 학대를 당하고, 결국 더는 참지 못한 에와는 아버지를 상대로 복수할 계획을 세운다.


하느님과 그의 가족들


그 복수는 다른 아닌 전 인류에게 문자로 그들의 사망일을 전송해 아버지의 신뢰를 떨어뜨리는 것. 이처럼 인간 사회에 엄청난 혼란을 안겨 주고, 신의 존재에 대한 불신을 안겨준 이후 에와는 오빠의 도움으로 무사히 인간 세계로 탈출한다. 그런 에와가 먼저 착수한 일은 바로 여섯 명의 사도를 모아 새로운 신약 성서를 작성하는 일. 아빠의 서재에서 순전히 랜덤으로 고른 여섯 명의 사람을 찾아다니기 시작한 에와는 도중에 빅토르라는 노숙자를 만나 그에게 성서를 작성하는 일을 맡긴다. 한편 아빠는 뒤늦게 인간들의 뉴스 속보를 통해 딸이 저지른 일에 대해 알게 되고, 엄청난 분노에 휩싸인 채로 에와를 잡기 위해 집을 나선다.



이것이 여성이 창조한 상?


폭력적인 아버지, 무기력한 어머니, 진작 집을 나가 버린 첫째와 억눌리고 반항적인 막내까지. 어디서 많이 들어본 것 같지 않은가. 국적 불문 많은 영화와 드라마에서 흔히 볼 수 있는 설정이다. 그러나 이러한 클리셰에 한 가지 파격적인 요소를 더해 전혀 다른 이야기가 탄생한다. 바로 이 가족들이 다름 아닌 신이라는 점이다. 그리고 이 뻔함과 기발함의 조화가 영화를 시종일관 유쾌하게 만든다. 비록 내가 신의 존재를 믿지는 않지만 그동안 주입되어 온 이미지 탓에 신이라고 하면 막연하게 자애롭고 인자한 백인 남성의 모습을 떠올리게 된다. 그런데 ‘이웃집에 신이 산다’에 등장하는 신은 그런 이미지와는 거리가 멀다. 특히나 이 집의 가장이자 하느님인 아버지는 가족들에게 윽박지르고, 집안은 돌보지 않으며 몇 시간씩 서재에만 틀어박혀 있다.


그러나 아버지의 신 다운(?) 면모가 드러나는 곳 역시 바로 이 서재이다. 다만 이곳에서 그는 인간들에 대한 은혜를 베푼다기보단 자신의 스트레스 해소를 위해 재앙을 가져다주고, 마치 인류의 영원한 고통을 바라는 듯 ‘짜증 유발의 법칙’을 개발해 내는 식이다. 장성한 아들이라도 있었다면 폭력적인 아버지에게 맞서 나머지 가족들을 지킬 수 있었을까. 그러나 장남인 J.C. 즉 예수는 미래의 가부장이라는 지위를 버리고 가출했다. 무능력하고 마초 기질이 다분한 아버지에, 이런 그가 싫어 집을 나간 맞아들이 신이라니. 이 정도면 거의 신성모독이다. 그런 면에서 감독이 유신론자일 확률은 극히 낮아 보인다. 이처럼 종교에 대한 신성한 믿음을 건드린 감독은 또 다른 견고하고 오랜 믿음을 쥐고 흔든다. 그 대상은 다름 아닌 가부장제이다.


우연히 남편의 서재로 들어간 에와의 어머니 / 에와의 어머니가 재창조한 세상


큰 아들과 달리, 딸이라는 이유로 인류의 입에 오르내리지도 않았던 막내 에와는 겁도 없이 아버지에게 맞선다. 아버지의 권위를 떨어뜨리는 것은 물론 자신만의 사도를 찾아 새로운 성서를 만들기까지 한다. 에와는 마침내 아버지의 손아귀를 피해 자신의 임무를 완수하고, 그러는 동안 어머니는 의도치 않게 아버지의 컴퓨를 재부팅해 지금까지와는 전혀 다른 새로운 세상을 만들어 낸다. 하늘의 색은 마치 아늑한 집의 벽지와 같고, 사람들은 중력을 거스르며, 바닷속에서도 생활할 수 있게 된다. 심지어는 여성이 아닌 남성이 임신을 하고, 부인이 남편에게 다리털을 제모하지 않겠느냐고 묻기까지 한다. 정리하자면 남성이 망가뜨리고 외면한 세상을 여성이 구원한 셈이다.


이러한 작품을 남성 감독이 각본을 쓰고 제작했다는 사실이 일견 놀랍다. 그러나 몇몇 한계점이 보인다. 여성 출연진의 노출 장면이 쓸데없이 많다거나, 성도착자 혹은 살인자 등 문제가 있는 남성들을 마치 배식하듯 여성과 짝짓는 것은 둘째 문제이다. 진짜 짚고 넘어가야 할 점은 여성의 손에서 재탄생한 세상에 대한 지나친 낭만화이다. 감독이 같은 남성이 지배해 온 사회 구조에 환멸을 느껴온 것일까. 여성으로 살아온 나로서는 남신이 아닌 여신에 의해 변화한, 이성적인 면이라곤 없이 환상적이기만 한 세상이 썩 설득력 있게 느껴지진 않는다. 어쩌면 감독이 모두를 아우르고 돌보는 여성의 이미지를 상상하면서 자동으로 위엄 있는 신보다는 어머니라는 존재를 떠올렸을지도 모르겠다. 아니면 치열하고 복잡하고 때로는 비열한 남성의 머릿속과 달리 여성의 머릿속은 아름답고 부드러운 이미지로만 가득한 꽃밭이라고 믿었거나. 어쩌면 단순히 일차원적인 대비 효과를 노렸을 수도 있지만 아쉽긴 마찬가지이다. 그러나 모든 변화는 지금까지와는 다른 것을 꿈꾸는 데서 시작한다. 바로 그 점에서 이 영화의 의의가 있다고 하겠다.






사진 출처 : 다음 영화

https://movie.daum.net/moviedb/main?movieId=9506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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