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가 하루를 시작할 때 마치 의식처럼 행하는 것들이 몇 가지가 있다. 그중 첫 번째는 바로 아침 식사를 하는 것. 야식과 과식을 멀리하는 대신 하루 삼시 세끼를 고집하는 편이다. 아침을 거르는 사람이 많다지만 끼니를 챙긴 것 자체로는 별로 특별할 것이 없다. 소중하다기보다는 습관에 가까운 이러한 아침 식사를 마친 다음 하는 것은 다름 아닌 일기를 쓰는 것이다. 그런데 이 일기라는 것이 하루 일과를 마치고 그날 있었던 일과 그에 대한 감상을 쓰는 보통의 일기와는 다소 다르다. 쓰는 시간대부터가 아침이 아닌가. 내가 쓰는 일기는 다름 아닌 ‘소원 일기’이다.
비록 소원 일기라고 이름 짓기는 했지만 한 해를 마무리하거나, 새해가 시작될 때쯤 새롭게 세워진 목표 목록 두세 가지를 매일 같이 반복해 적는다는 점에서 ‘목표 일기’에 가깝다. 똑같은 내용을 매일 아침이면 복사 붙여 넣기 하듯 써내려 가는 행위는 아침 식사 챙기기보다 더 의식에 가까워 보이기도 한다. 혹시 해가 바뀌기 전에 이 목록들 중 성취를 해낸 것이 있다면 그 시가와 관계없이 내용이 업데이트된다.
이처럼 소원 일기를 보면서 매일 같이 의지가 다져진다거나 열정이 불타오르지는 않는다. 매일 기계적으로, 영혼 없이 쓰는 데 가까운 것이 사실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와 같은 반복 행위 덕분에 가끔씩 정신이 번쩍 들기도 한다. 매너리즘에 빠져 허우적거리고, 만사가 다 귀찮다가도 내가 하루도 빠뜨리지 않고(까지는 아니지만 꽤 성실하게)써 내려간 일기 속목표들이 새삼스럽게 눈에 들어오고, 다시 한번 마음을 새롭게 다잡는다. 그리고 깨닫는다. 나를 계속 앞으로 나아가게 해주는 원동력은 다름 아닌 바로 이 소원들이라는 것을.
• 이루어졌든, 이루어지지 않았든 그저 있는 그대로
사람들의 소원이 평화롭게 보호받고, 때로는 그것들이 이루어지기도 하는 희망이 넘치는 왕국 ‘로사스’. 그런 로사스를 깊이 사랑하는 꿈 많은 소녀 아샤는 로사스에 도움이 되는 일을 하기 위해, 모두의 존경과 사랑을 받는 국왕 매그니피코의 견습생이 되고자 결심한다. 왕비 아마야의 응원까지 등에 업고 마침내 매그니피코를 만나게 된 아샤. 꿈의 자리에 한 걸음 가까워졌다는 사실에 설레는 것도 잠시. 아샤는 매그니피코가 어떤 소원들은 결코 이루어줄 생각이 없으며, 대부분의 소원들은 내내 그렇게 성에 갇혀 있는다는 것을 알게 된다. 사람들은 자신이 무엇을 잃었는 지도 모른 채, 평생 자신의 소원을 잊고 지내야 한다는 사실도.
주인공 아샤
로사스의 사람들에게 그들의 꿈을 돌려주고 싶은 아샤는 숲에서 이 마음을 담아 별에게 소원을 빈다. 바로 그때 그의 소원에 응답이라도 하듯 눈앞에 작고 반짝이는 ‘별’이 나타나고, 별은 아샤에게 왕 매그니피코에게서 마을 사람들의 소원을 구해내자고 제안한다. 친구들의 도움까지 청해 작전에 돌입한 아샤. 그러나 곧 매그니피코가 그런 아샤의 계획을 눈치채고, 그를 방해하고자 어둠의 마법에 손을 대기에 이른다.
로사스의 왕 매그니피코
• 새해 용 맞춤 영화
한동안 주춤대는 모습이었던 디즈니가 이번 100주년 영화 ‘위시’ 역시 고전을 면치 못하는 분위기다. 100주년 기념 영화인 만큼 꽤 중요한 작품인 데 비해, 전체적으로 평이하다는 것이 중론이다. 직접 관람하고 보니 왜 이런 반응들이 나오는 것인지 알 것 같다. 우선 2D인 듯 3D인 듯 애매모호한 작화는 호불호가 갈릴만 하다. ‘겨울왕국’이나 ‘라푼젤’처럼 돈 냄새 물씬 풍기며 눈이 확 트이는 느낌도 아니고, 과거 ‘백설공주’니 ‘잠자는 숲 속의 공주’처럼 움직이는 명화를 보는 듯한 감흥도 없다. 디즈니 애니메이션만의 매력이랄 수 있는 노래들 역시 임팩트가 약하다. 그나마 주인공도 아닌, 빌런이 부른 ‘This Is The Thanks I Get’이 그나마 기억에 남는다. 정리하자면 대대적인 홍보로 팬들과 관객들의 기대를 잔뜩 높인 데 비해 다소 싱겁다. 더 지켜봐야 되겠지만, 아직까진 디즈니의 100주년 영화 치고는 성공적이라고 보기 힘들다.
그렇다고 이번 영화를 추천하지 않으냐고 묻는다면 대답은 달라진다. 디즈니 영화의 가장 큰 특징이자 장점은 영화를 보고 나면 기분이 좋아진다는 점이다. 현실과는 한참 동떨어진, 덮어 놓고 해피 엔딩. 냉소적으로 매일매일을 살아가다가도 이런 동화적인 아름답고 행복한 이야기를 보고 있노라면 마음이 얼마간 녹아내린다. 이번 영화 ‘위시’ 역시 그런 점에 있어서는 부족할 것 없이 충실하다. 앞서 호불호가 많이 갈린다고 언급한 작화 역시, 개인적으로는 디즈니의 기술력을 보여주면서도 몽글몽글한 분위기 역시 느껴져 마음에 들었다. 그동안의 디즈니 애니메이션 주인공들에 비해 ‘위시’의 아샤는 다소 톡톡 튀고 사로잡는 매력이 덜하기는 하다. 그러나 영화 ‘웨스트사이드 스토리’에서 연기력은 물론 가창력까지 인정받은 아리아나 더보즈가 연기한 아샤의 목소리만큼은 영화 속 그 무엇보다 아름답다. 주인공을 압도하는 나르시시스트 빌런 매그니피코의 매력도 영화의 확실한 장점이다. 그보다 더한 매력을 꼽자면 하늘에서 온 만큼 천상의 귀여움을 자랑하는 ‘별’ 되시겠다.
하지만 영화 ‘위시’를 추천하고 싶은 진짜 이유는 따로 있다. 바로 지금이 새해를 막 시작한 1월이라는 사실이다. 한 해를 마무리하면서. 그리고 새해를 맞이하면서 새로운 소원이나 목표를 재정비하는 것은 비단 나뿐만은 아닐 것이다. 몇 달이 채 지나지 않아 자조적으로 역시 작심삼일이라는 말을 하는 한이 있더라도 우리는 매번 새롭게 다짐을 하고, 계획을 세운다. 우리는 왜 매번 같은 일을 반복하는 걸까? 당장 오늘부터 한 달 전까지 거슬러 올라가 생각해 보자. 특별한 변수가 생기지 않는 이상 매일매일이 비슷할 것이다. 비단 지난 한 달뿐일까? 두 달, 세 달로 기간을 바꾸어도 크게 다르지는 않을 듯하다. 그러다 짧으면 몇 달, 길게는 몇 년에 한 번씩 변화가 있었을지도 모른다.
이렇게 반복되는 일상 속에서 편안함과 안정감을 느끼는 사람들도 물론 있을 것이다. 나 또한 어느 정도는 그러하다. 하지만 한편으로는 이 기간이 길어질 경우 마음속에 소중히 지켜온 촛불이 빛을 잃어 가는 듯한 기분이 든다. 이따금씩 내게 찾아오는 바로 이 느낌이 바로 영화 ‘위시’에서 왕 매그니피코에게 소원을 바친 뒤, 자신의 소원이 무엇인지도 잊어버린 사람들의 평온하지만 허전한 심정과 비슷하지 않을까 한다. 이런 기분에 마음이 공허해질 때면 나는 내 마음속 불빛을 좀 더 밝게 타오르게 만들고 싶어 진다. 다시 앞으로 나아가기 위해서, 충분히 달라질 수 있는 내일을 그려 보기 위해서. 그리고 아마 많은 이들이 나와 비슷한 느낌이 드는 시기가 연말이나 연초가 아닐까 한다. 그런 의미에서 2024년이 막 시작된 바로 지금이 ‘위시’를 관람하기에 최적의 시기가 아닐까 싶다. 영화의 만듦새나 호불호를 떠나, 바쁘고 지치는 일상 속에서 잠시 잊고 있던 나만의 소원을 다시금 들여다보게 해주는 작품이기 때문이다. 꼭 거창한 소원이 아니라도 좋다. 매달 새로운 맛집 가보기라든지, 반려견과 여행 가기 같은 일도 좋다. 꺼져 가던 내 안의 빛을 다시 반짝이게 해주는 것이라면 무엇이 됐든 분명 소중한 소원이니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