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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자몽수 Dec 23. 2021

불행한 기분을 대하는 자세

아는 기분이 더 무섭다. 아는 맛이 더 무섭듯이

새벽형 인간이 된 지 며칠 후면 3년 차가 된다.

계기는 단순했다. 작업실 때문이었다.

집에서 작업실까지 가는데 지하철을 이용했고 되도록 출퇴근 시간을 피하고 싶었다.

그래서 새벽 6시 전에 출근하고 오후 5시 전에 퇴근하는 생활을 시작했다.

처음엔 얼마나 갈까 싶었다.

워낙에 들쑥날쑥한 생활 패턴에 익숙해져 있었던 터라 오래 가봐야 한 달 정도라고 생각했다.

그런데 새벽이 주는 보석 같은 감정들이 나를 일으켜 세웠다.

씻고 집을 나설 때 어렴풋하게 승리자의 기분을 느꼈다.

부지런한 나를 칭찬해주었고,

오늘 하루를 온전히 내 힘으로 개막하였다는 자부심과 뿌듯함을 만끽했다.

밤에 글이 안 써지면 스스로를 괴롭히듯 커피를 들이붓던 과거의 나와도 작별을 하였다.

이제는 일찌감치 잠자리에 든다.

안 풀리는 글의 실타래는 내일의 나에게 맡긴 채 저무는 빛과 함께 하루를 마감한다.

자고 일어나도 안 풀리는 글은 있다.

그런 글에는 문제가 있는 경우가 대부분이다.

밤이 주는 센티함은 문제를 회피하고 은근슬쩍 넘어가게 유도한다.

그러나 새벽이 주는 신랄함은 문제와 직면하게 만든다.

그 어떤 날카로운 모서리에 부딪쳐도 치명상을 입지 않을 내면의 힘이 수면 중 충전되었기 때문이다.

누구나 문제와 마주치면 힘들다.

에너지가 소진됐을 때 만난 문제는 그야말로 태산처럼 크게 다가온다.

한계에 부딪힌 듯 스스로를 모질게 몰아붙이곤 한다.

그러나 이런 함정에 빠지지 말아야 한다.

사실 힘든 건 문제가 아니라 문제를 대하는 정신력과 체력 때문일 경우가 많기 때문이다.

일단 고갈된 에너지를 충전해보자.

자고 일어나면 태산이 아니라 작은 돌부리였음을 깨닫게 될지도 모르니까.

피하지 말고 맞서면 의외로 단순하게 답이 보일 때도 있으니까.

그런 경험들이 쌓이다 보면 조금씩 더 단단하게 성장한 나를 만나게 된다.

이건 미라클이 아니다.

사이언스다.




   제작사로부터 연락이 왔다.

기다리던 소식이 아니었다.

그 반대였다.

나의 드라마가 방송사 편성에서 거절당했다는 것이다.

실망했고 의기소침해졌다.

이런 기분은 아무리 경험을 해도 익숙해지지 않는다.

밖에 나가 공원을 걸었다.

온갖 문제들이 나를 덮쳐왔다.

제작사에서는 다른 방송사에 제안을 한다고 했지만 벌써부터 온갖 부정적인 생각들이 나의 심신을 장악했다.

아무것도 손에 잡히지 않았다.

계속 거절당할까 봐 불안하고 두려워서 단 한 글자도 다시 쓸 수 없을 것 같았다.

이미 다 아는 기분, 그건 불행한 기분이었다.

세상에서 가장 무서운 맛이 아는 맛이듯

아는 기분 역시 무서운 법이다.


하지만 이미 느껴봤기 때문에 나는 또 알고 있었다.

불행을 느끼는 건 행복을 느껴봤기 때문이며,

반대로 행복을 느끼는 것 또한 불행을 느껴봤기 때문이란 걸.

그건 단지 지나가는 바람일 뿐이라는 걸.

우리를 살게 하는 건 가끔 부는 바람이 아니라 공기처럼 평소에는 인식조차 하지 못했던 평범한 나날들이라는 걸.

변함없이 나를 기다려주는 보통의 일상들이 가장 소중하다는 걸 알고 있었다.

     

다음 날 아침, 나는 어김없이 새벽 4시에 눈을 떴고 습관처럼 준비하고 집을 나섰다.

고요하고 차가운 새벽 공기를 가르며 작업실 노트북 앞에 가 앉았다.

어제 내 마음은 온통 불행뿐이었는데 오늘 내 마음은 결코 그렇지 않았다.     


새 작품을 쓰기 시작했다.

과거의 내가 쓴 글들에만 빌붙어 오늘을 안위하고 싶지 않았다.

지금의 나는 과거의 내가 만들었듯

미래의 나는 지금의 내가 만드는 것이다.

지금의 나에게 과거의 내가 자부심이듯

미래의 나 역시 지금의 내게 그러하길.


오늘 하루쯤 불행한 기분이 들어도 괜찮다.

기분은 기분일 뿐 좀 더 자신을 믿었으면 한다.

불행한 기분으로부터 배우고 좀 더 나은 기분을 만들어나갈 수 있는 힘이 이미 내 안에 있음을 믿었으면 한다.

특별하지는 않지만 소중한 일상, 그 시간들은 생각보다 힘이 아주 세다.

관건은 오늘 느낀 불행을 통해 내일의 행복을 꿈꾸는 것.

그래서 오늘도 어제와 다르지 않은 보통의 하루를 시작하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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