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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쏭쏭이쌤 Nov 05. 2024

오늘 하루 빛났던 순간 5

교단일기

작년 제자들이었던 6학년 아이들이 우리 반에 피구 결투장을 만들어서 가지고 왔다. 


노란색 A4용지에 큰 글씨로 피구결투장이라고 쓰고 가운데에 동그란 피구공을 크게 반짝이는 것처럼 그렸다.

가운데 커다란 피구공 주변으로 공의 오른쪽 윗부분에 졸라맨의 모습을 한 사람이 오른손에 작은 공을 들고 공격하려고 한다. 피구공의 왼쪽 아래에는 크기가 좀 더 작은 졸라맨이 그려져 있고 얼굴에 5학년이라고 쓰여있다. 머리에서 화살표를 하나 그려서 공 맞은 모습이라고 써놨다. 5학년 졸라맨의 가슴팍에 공을 맞은 것처럼 그려놨다. 그리고 커다란 피구공 오른쪽 아랫부분에 키읔 하나를 써놨다.

우리 반 아이들은 그 키읔 하나가 약이 많이 오른다고 했다.

그리고 가로선이 길게 죽 그어져 있고 밑에 글이 써져 있다.


<결투를 신청한다! 피구 이길 거임 ㅋ 피구날짜 순위 1. 요번 주 금요일 2교시, 2. 다음 주 월요일 2교시, 3 다음 주 금요일 2교시 / 박OO선생님 싸인:(    )  윤OO선생님 싸인:(    )/ 2024. 11. 4. *안 하면 우리가 이긴 걸로 알겠다.>


피구를 같이 하고 싶다는 6학년 아이의 말에 장난 삼아 결투장을 만들어오라고 했는데 신나서 진짜로 만들어왔다.


우리는 유치하고 귀찮아서 안 하고 싶다는 파와 그래 덤벼봐 우리가 이겨줄게 하고 싶다는 파로 나뉘었다.


"6학년으로부터 결투장이 왔습니다. 자 모두 눈을 감으세요."


아이들은 조용히 눈을 감았다. (이럴 때 선생님들은 너무 조용해서 행복하다!!)


"다른 사람의 눈치 보지 말고, 이 결투를 하고 싶은지 손을 들어 의견을 묻겠습니다. 이 결투를 받아들여 피구를 하고 싶은 사람은 조용히 손을 들어주세요."


나는 속으로 너무 조금 들면 어쩌지 걱정했다.

결투장의 의미가 받아들여줘야 재밌는 건데 안 하겠다고 하면 기운 빠지니까.

다행히 대부분의 아이들이 손을 번쩍 들었다.


"자, 내리세요. 결투를 받아들이겠습니다. 날짜는 다음 주 월요일 2교시로 하겠습니다. 괜찮겠죠?"

"네!!!!!!!"


아이들은 대부분 신이 나서 대답했다.


우리는 곧바로 결투를 수락한다는 답장을 쓰기로 했다.

학급디자이너 두 명이 때마침 운동부에 승부욕이 강한 아이들이라 거침없이 답장을 만들었다.


<결투를 수락한다. 5학년 우리가 이긴다! 6학년은 우리가 바른다. (나이 많은 6학년 할아버지가 빌고 있는 그림) 흑...죄송합니다. 다신 안깝치겠습니다. (말풍선에) 늙은 할방구. 날짜: 다음 주 월요일 2교시, 5학년 22명 일동. 윤00 선생님 도장 (     ) >


6학년이 보내온 결투장과 다르게 답장의 디자인 퀄리티가 너무 좋아서 그냥 도장을 찍어서 6학년 교실에 붙이려다가 순간 몇몇 단어가 눈에 들어왔다.


늙은 할방구

안깝치겠습니다.

바른다.


6학년의 결투장은 약간의 약 올리는 표현만 있었을 뿐 비속어는 없었다.


그래서 우리는 이 단어들을 바꿨다.


늙은 할방구->쓰러진 어르신

안깝치겠습니다-> 도전하지 않겠습니다.

바른다->이겨드리겠습니다.


그렇게 결투 답장을 보내니 6학년들이 신나서 우리 반에 와서 또는 나에게 와서 말한다.


"쌤, 결투장 퀄리티 뭐예요. 왜 이렇게 잘 만들었어요."

"(열려있는 우리 반 앞문에 서서 우리 반 애들을 바라보며) 우리가 이겨주겠어!!!"

"쌤, 어르신 뭐예요. ㅋㅋㅋㅋ 우리가 어르신이에요?? ㅋㅋㅋㅋ"

"5학년은 저희가 이겨드릴게요. 작년에 제가 아니에요~정확도 올라갔다고요~!"


신나는 재밋거리에 아이들이 하루종일 이야기하거나 왔다 갔다 한다.

우리 반에서 조용한 아이들도 결투장을 보며 웃음을 터트렸었다.


다음 주에 이길 수 있을까?

지면 6학년이 좋아할 테니까 괜찮지 뭐.

4학년한테 지는 게 문제지 6학년한테 지면 자존심이 덜 상할 거다.

제발 다치지 않고 무사히 즐겁게 1학기 때처럼 피구 시합 할 수 있길.

아이들이 다음 주까지 설레는 마음으로 학교생활 할 수 있길 바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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