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 토문재 일기 - 9월 2일
수원터미널에서 완도행 버스는 다섯 시간을 달려 해남터미널에 나를 부려놓고 떠난다. 나의 남도 여행은 언제나 그래 듯 변함없이 이번에도 흐리고 빗방울 뿌려댄다. 먹구름 속 차장 밖은 가을을 여는 벼들이 조금씩 누런 옷을 입어가고 여기에 질 새라 붉은 고추 할 말 많은 듯 더운 열기로 더욱 붉어지고 있다.
목포 건너 해남 변하지 않을 것 같은 도시에 변한 게 있다면 전에 없던 김밥 집이 새롭게 반긴다. 목 넘김이 쉽지 않은 참치 김밥 한 줄에 늦은 점심을 걸어놓고 다시 해남터미널에서 땅끝 마을 가는 버스 한 시간을 달린다. 대죽도의 길이 열리고 있다. 썰물로 갈라지는 길 따라 건너고 싶은 마음 접으며 도착한 토문재는 언제나 편안한 위안을 준다. 여전히 손발이 바쁜 촌장님은 오늘도 열일하고 있다.
정겨운 나의 난초 실 입소다. 3년 전에도 작년에도 올해도 그대로다. 마치 고향에 다니러 온 것처럼 반갑다. 누군가가 무슨 대단한 글을 토해내겠다고 한 달 살이에 동참하였는지 묻는다면 초록의 들판과 파랑의 바다와 푸른 하늘에 악수하고 싶은 마음이라 말해줘야지.
흐린 날의 토문재 앞마당 유실수 꿀벌들의 잔치다. 달콤한 무화과 열매 깊숙이 스며들어 저희들끼리 끼들 끼들. 약치지 않은 사과와 배는 주근깨 투성이로 여름을 매달고 있다.
마을 산책길 나선다. 예전의 호박밭은 호박 다 털리고 쉬고 있는 땅, 참깨 밭은 옥수수 밭으로 변신 옥수수수염 뽑힌 자리 쉬고 있는 땅. 아무도 없는 나 홀로 걷는 이 길은 맨 땅. 방파제 끝까지 걸어본다. 썰물 때라 바닷물 빠진 자리 갈매기 저녁밥 찾아 나섰을까 갯벌 아장아장 나처럼 산책 나온 걸까.
3년 전 풋고추에 가지와 깻잎 따 주시던 할머니의 비닐하우스 지난다. 작년에 요양원으로 가시고 빈집과 싱싱하게 자라야 할 풋것들이 사라진 비닐하우스 잡풀만 무성하다. 힘들지 않으세요. 물으면 “힘들어도 이렇게 농사지어놓으면 자식들이 가져가는 재미지 뭐” 하시던 할머니가 토문재 오르내릴 때마다 생각나겠다.
아주 오래된 친구에게서 오랜만에 카톡이 왔다. 2~3년에 한 번 잊을 만하면 툭 전해오는 소식이 이번엔 아들결혼 핑계로 보고픔을 전한다며 모바일 청첩장이다. 항상 그 자리에 있는 듯 없는 듯 우리의 우정은 이어왔고 이어가고 있다. 핀 꽃 없이 무화과 열매 익어가듯 꽃핀 적 없이 시들어가는 나이에 서글퍼지는 계절 가을이 오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