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찬 소설가가 퇴소한 자리 비바람이 입주한다. 소낙비 거세게 쏟아 붙는다. 콸콸 쏟는 낙수 물소리 참 오래 만에 듣는다. 맑은 날 곱게 모셔두었던 빨래를 비 예보 무심히 넘기고 빨았다. 건조대의 젖은 옷들이 툇마루까지 들이치는 빗줄기에 또 젖는다. 내가 빨아 넌 깨끗함 보다 빗줄기가 빨고 있는게 더 깨끗하였음 좋겠다. 어릴 적 엄마는 처마 낙수물을 모아 빨래를 하였다. 수도물보다 더 때가 잘진다고 하였는데 아마도 수도세를 아끼려는 절약정신 아니었을까 짐작해본다. 비는 비끼리 젖고 바람은 바람끼리 살 섞는 끈끈한 날씨. 습도와 바닷바람이 내 마음까지 적신다.
앞마당 무화과를 따서 이윤협 소설가에게 모두 건넨다. 나눔. 내 것이 아닌데 내 것처럼 이런 오지랖은 또 뭔가?
김금용 시집 『각을 끌어안다』, 정가을 시집 『빌어먹을 다짐들』, 석연경 시집 『탕탕』, 서하 시집 『먼 곳부터 그리워지는 안부처럼』, 김지헌 시집 『심장을 가졌다』, 권달옹 시집 『휘어진 낮달과 낫과 푸른 산등성이』, 정연희 시집 『내 발등에 쏟아지는 숲』, 양해연 시집 『달팽이 향수병』, 최두석 시집 『두루미의 잠』등. 평생 하루에 이렇게 많은 시집을 읽기는 처음이다. 구부정한 등짝 갈라질 것 같은 혹사다. 무엇이 나를 이렇게 이끌고 가는 걸까. 시인들의 대단함에 부러워서를 부드러워서로 읽는다.
부드럽다는 스치거나 닿는 느낌이 거칠지 않고 연하며 매끈하다
부럽다는 자신도 그렇게 되거나 갖거나 이르고 싶어 하는 마음이 있다
의 '드'가 주는 글자하나가 이렇게 마음 베이게도 한다. 이런 땐 나도 나한테 남이고 싶다.
시인들이 몇 년을 걸쳐 이루어낸 언어의 집을 하루 만에 연과 연을 조각낸다. 행과 행을 분해한다. 난해한 부분에서 쏟아지는 졸음을 책갈피에 문질러 본다.
빨빨거리고 다니기를 좋아하는 내가 이렇게 엉덩이 붙이고 집중할 수 있는 것은 폭염이 주는 여유다. 그러나 딱딱한 의자가 주는 불편함은 크다. 소설가들이 대단한 것 같다. 오랫동안 앉아서 글을 써야 하는 장편소설이 주는 중압감과 지구력에 진득함까지 하루 종일 앉아서 시집을 탐독하고 있는 내 엉덩이가 힘들다고 한다. 도수 높은 돋보기를 썼지만 눈도 피로하다고 아우성에 인공눈물로는 해결될 수 없다. 글을 쓴다는 건 중노동이다. 쉽게 쓰인 글은 없다. 쉽게 읽을 뿐이다.
당신 참 시다, 詩다 /서하
입속에서 터져버린 고백이 샐까 봐 아무 말 못 하겠다
다 빼앗기더라도 마음만은 뺏기지 말라는 뜻을
가지가지에 붉게 매달고 상화 고택 가는 길가에
청사초롱 밝혀 든 석류나무 한 분
불을 바라보는 나와 나를 바라보는 불빛이
약속도 없이 우연히 만난 첫사랑처럼 아득하다
세상에 없는 애인은 어디로 갔고
저 불빛은 어디서 왔나
석류 위에도 석류
석류 아래에도 석류
석류 어깨에 걸린 시린 사랑 길 잃을까
미간을 잔뜩 찌푸리고 지나가는 저 여자
끌어당기지 않아도 늘어난 석양처럼 눈자위가 붉다
참 난처해라
오늘도 어제도 끝내 터뜨리지 못하고
입속에 차오르는 이름으로 침이 한가득 고이는지
그림자 입에 넣고 굴리다 사리 같은 별 툭툭 내뱉는 밤
당신 참 시다, 詩다
시집 『먼 곳부터 그리워지는 안부처럼』에서
나는 지금 어디로 가고 있는 걸까. 내가 쓰고자 하는 시는 어디쯤 머물기에 좀처럼 오지 않는 걸까. 이곳 온 목적은 열심히 시를 써보겠다는 각오로 왔는데 어문 간데 헛간 데로 한눈팔고 있다. 서하 시인의 시 한 편 올려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