바라나시
바라나시로 가는 길
네팔에서 인도로 가는 날. 조서방과 나는 비장했다. 여행 난이도 최상이라는 인도로 가는 거니까, 이제부턴 긴장의 끈을 놓을 수가 없겠구나 싶었다. 평화롭기 그지없었던 포카라를 떠나 네팔과 인도의 국경마을로 향했다. 버스터미널에서 네팔 출입국사무소가 제법 멀어서 릭샤를 탔는데, 내릴 땐 가격이 뻥튀기되어있다. 그렇게 얘기했건만, 소용이 없다. 벌써 인도 여행을 맛본 기분. 그러고 보니 미얀마 인도 대사관의 여왕같이 굴던 아줌마가 생각이 났다. 뭔 인도 비자받기가 그렇게 어려운지. 1달러 지폐 한 장이 낡았다며 거절당한 외국인이 대사관 앞에서 발차기를 해가며 욕을 했었는데... 그때 직감했다. 인도는 여러모로 안하무인인 나라겠구나. 인도 입국심사를 무사히 마치고 고락푸르 기차역까지 어떻게 가나 고민하고 있는데, 택시기사가 다가온다. 요금을 얘기하는데 4명이 모이면 탈만한 가격. 주변을 둘러보니 포카라에서부터 같이 온 낯이 익은 스페인 커플이 보인다. 여차저차 하다 하니 커플이 흔쾌히 수락한다. 자기들도 고민하고 있었다며... 한 시간 정도 가는 길이라 커플과 이런저런 얘기를 많이 했는데, 참 순하고 착한 사람들이었다. 1년 세계여행을 나왔다고 해서 우리도 2년 계획으로 나왔다니까 눈이 동그래지며 반가워한다. 그렇게 마야와 오리를 알게 되었다.
대화를 하다 보니 고락푸르 기차역에 도착했다. 우리는 미리 바라나시로 가는 기차표를 예매해 두었는데, 마야와 오리는 아그라로 가는 기차표에 웨이팅을 걸고 왔나 보다. 그런데 그게 예매가 되지 않은 모양. 아그라로 가는 표는 다 솔드아웃이라고 단호하게 말하는 매표소 직원, 하루 종일 힘들었던 마야가 울기 시작했다. 나도 마음이 안 좋아서 어떻게든 해주고 싶은데 방법이 없다. 우는 마야가 안쓰러웠는지 매표소 직원이 갑자기 사무실로 들어와 보란다. 그러면 바라나시로 가는 오픈티켓은 2석 있는데 사겠냔다. 아직도 이게 뭔지는 잘 모르겠는데 입석표 같은 개념이었나 보다. 선택의 여지가 없었던 마야와 오리는 그렇게 하겠다고 했다. 눈물과 흙먼지가 범벅이 되었던 마야의 얼굴이 그제야 편해졌다. 그렇게 우리 넷은 바라나시로 가는 기차를 탔다. 나와 조서방은 2층 침대칸에서 편히 누워가는데, 고생하고 있을 오리와 마야를 생각하니 마음이 좋지 않았다. 그런 밤이 지나고 이른 새벽 바라나시 역에 도착했다. 내려서 잠시 기다렸더니 마야와 오리가 눈이 빨개져서 나온다.
'외국인이 우리 둘밖에 없었는데, 그래서인지 사람들이 계속 뚫어지게 쳐다봐서 잘 수가 없었어'
잠이 들면 가방이나 귀중품을 갖고 가버릴까봐 불안했단다. 얼마나 불편했을까. 우리가 고생했다며 도닥여줬다. 인도 여행을 같이하면 이렇게 전우가 되는구나. 아무 준비 없이 바라나시로 온 마야와 오리는 우리 부부에게 같이 동행해도 되는지를 물었고 우리는 흔쾌히 수락했다. 바라나시 역에서 고돌리아로 가는 릭샤도 넷이서 흥정하니 왠지 더 잘 풀리는 느낌. 우리도 마야 커플도 서로가 있어서 더 든든했다.
바라나시에는 비가 추적추적 내리고 있었다. 여행객들이 많이 머무는 바라나시 구시가는 길이 너무 좁아서 릭샤가 들어갈 수가 없었다. 우리 넷은 빗물에 소똥과 진흙이 섞여 끈적한 바라나시 골목을 헤매며 숙소를 찾았다. 겨우 2 사람이 지나가는 좁은 골목을 소가 막고 있기라도 할 때는 정말 답답했다. 축축한 소꼬리에 한 대 맞으면 더 찝찝하고... 그렇게 찾은 첫 번째 숙소에는 방이 없었고, 두 번째 숙소에서 2개의 방을 구할 수가 있었다. 샤워를 하고 침대에 누우니 이제야 생각이라는 게 좀 든다.
'이제 겨우 인도에 도착한 건데, 이렇게 진이 빠지다니... 인도에 오기로 한건 잘한 결정이었을까?'
인도의 개로 산다는 것
숙소로 돌아가는 길, 어둑한 코너에서 큰 개 한 마리가 거칠게 숨을 몰아쉬고 있었다. 가까이 가서 보니 머리 위에 살점이 뜯겨나가 피부 속이 들여다보였다. 온몸에 소름이 끼쳤다. 대체 무슨 일을 겪었길래 이렇게 큰 상처를 입었을까.
바라나시에는 소도 많고 길거리를 떠도는 유기견들도 많았다. 한국의 유기견들과는 다르게 엄청나게 큰 몸집들이라 컴컴한 밤, 골목에서 여러 마리를 마주치면 꽤 무서웠다. 하지만 누군가를 공격하거나 개들끼리 싸우는걸 직접적으로 본 적은 없었다. 그저 어슬렁 거리며 먹이를 찾으러 다닌다고만 생각했는데, 간혹 피 터지게 싸우기도 하는구나 싶었다.
먹이도 구하기 힘들고, 수틀리는 날엔 싸움도 해야 하지만 그 와중에 새 생명도 태어났다. 이 귀여운 꼬물이들도 험한 세상에 적응해야 할 텐데... 예쁘지만 걱정이 앞선다.
바라나시의 개로 산다는 건 쉽지 않겠지, 하지만 우선은 푹 자자.
끝없는 경적소리
벵갈리 토라 내부는 릭샤가 들어올 수 없어서 몰랐다. 경적소음이 이 정도 수준인 줄은... 고돌리아 쪽으로 나가서 릭샤를 탔더니 빵빵 빵빵하는 경적소리가 단 1초의 공백도 없이 들려온다. 매연이 심해서 계속 구역질은 나고 시끄럽고, 이건 정말 총체적 난국이다. 안 그래도 청각과 후각이 예민한 나는 바라나시 도로를 돌아다니는 게 너무 힘들었다. 릭샤를 포기하고 다시 벵갈리 토라 내부로 돌아와서 걷기 시작하면 이번에는 소들과의 전쟁이 시작된다. 길을 막고 앉아있는 녀석, 벽에 붙은 전단지를 뜯어먹는 녀석, 폭포수 같은 소변을 쏟아내는 녀석, 가지가지다. 너무너무 괴로웠는데, 나중에 알게 된 사실. 경적소리는 안전을 위한 거였단다. 워낙에 무질서한 교통이다 보니 '나 여기 있어요'를 경적소리로 알리는 것. 그들에겐 경적을 울리는 게 오히려 매너 운전이었던 것이다. 하지만 인도를 떠날 때까지도 그 경적소리에는 적응할 수는 없었다.
강가
바라나시에 왔으면 강가 강을 봐야지. 강가 강을 따라 모든 게 이뤄지는 바라나시. 빨래터, 화장터, 사원, 호텔 등이 강을 따라 줄지어있는 모습은 보트를 타면 더 선명하게 보였다. 많은 보트 투어 호객꾼들이 있었지만 한국인들 사이에서는 한국말을 잘하는 철수 씨가 유명했다. 한때 한국에서 인도 여행이 크게 유행했던 탓일까. 인도에는 한국말을 잘하는 인도인들이 도시마다 한두 명씩은 꼭 있었다. 물론 덕분에 여행이 아주 편해진 것도 사실이었다.
한국말이 유창한 철수 씨에게 이런저런 이야기를 들으며 강가 강을 돌아다녔다. 몇 년 전이라 자세한 이야기들은 기억나지 않지만 그때의 이미지들은 아직도 기억이 난다. 강에서 몸을 씻고 그 물을 마시는 사람들, 빨래하는 사람들, 연기가 자욱한 화장터, 푸자의식이 이뤄지고 있는 가트. 장면이 확확 바뀌는 영화처럼 강가 강의 풍경은 빨리 지나갔지만 하나 같이 강렬했다.
특히 버닝가트, 화장터의 이미지는 잊히지가 않는다. 버닝가트에는 수천 년 동안 꺼지지 않는 불이 있는데, 상주가 그 불을 옮겨오는 것으로 화장이 시작된다. 캄캄한 밤, 빨갛게 타오르는 불길과 하얀 연기, 빼곡히 쌓여있는 장작더미들은 누군가 만들어놓은 뮤지컬 세트장 같았다. 삶이 끝나는 장소로 너무 적합한 분위기. 인도 힌두교인 모두가 바라나시에서 죽음을 맞기를 원한다. 그런 염원이 모여서 바라나시라는 도시가 생겨난 거니까. 바라나시에서는 종교의 힘이 얼마나 큰지, 새삼 느끼게 된다.
아르띠 푸자
푸자는 인도 힌두교인들의 종교적 의식. 바라나시 강가에서도 매일 푸자가 행해진다. 강가 강의 어머니 신에게 매일 바치는 제사인 것이다. 이 제사를 보기 위해 인도인들뿐만 아니라 전 세계에서 여행객들이 모여든다. 가트는 사람들로 가득 차고, 심지어는 강의 보트에서도 푸자를 관람한다.
5명의 브라만이 주관하는 푸자는 꽤나 경건했다. 힌두교인이 아닌 내 눈에는 공연에 가까웠달까. 왜 아르띠 [불] 푸자라고 하는지 알 것 같았다. 푸자가 끝나면 모두들 작은 디아를 강가에 띄우고 소원을 빈다. 나도 소원을 빌어볼까 하고 디아 파는 소녀에게 가격을 물었더니 100루피란다. 내가 10루피인 거 다 알고 있다고 하자 어깨를 으쓱하며 '맞아'라고 한다. 인정은 또 어찌나 빠른지. 푸자의 감동이 확 깼지만 다시 한번 정신 차려야겠다고 다짐하며, 디아를 하나 샀다.
강가의 여신이시여, 저희가 이 나라를 무사히 여행할 수 있도록 도와주세요.
그건 니 잘못이 아니야
푸자를 보러 가는 길, 마야와 오리를 만났다. 낮에 라씨집에서도 마주쳤는데... 역시 우리는 인연인가 부다 하며 깔깔 웃었다. 바라나시가 좁은 동네이기도 하고. 같이 푸자관람을 마치고, 저녁을 먹으러 가고 있는데, 누군가 내 다리를 스윽 만진다. 돌아보니 구걸하는 걸인. 내가 한국말로 욕을 한 바가지 퍼부었지만 기분이 너무 더러웠다.
'반바지를 안 입는 건데, 내가 잘못했어'라고 중얼거렸더니, 오리가 다정하게 어깨를 톡톡 친다.
'보니, 그건 니 잘못이 아니야. 널 만진 그 사람이 잘못한 거지'
정말 맞는 말이었는데, 뒤통수를 한대 얻어맞는 것 같았다. 난 왜 무의식 중에 그게 내 잘못이라고 생각했을까. 고마워 오리, 니 덕분에 오늘 큰 깨달음을 얻었다!
다 어디로 가는 걸까
가트를 따라 걷다 보면 강가에서 몸을 씻고 그 물을 마시는 사람들을 꽤 많이 볼 수가 있다. 하지만 그 옆에서는 도비 왈라[빨래꾼]들이 빨래를 하고, 사람들이 제물로 바친 디아나 꽃가루가 쓰레기가 되어 둥둥 떠다녔다. 뿐만 아니라 버닝 가트에서 태운 사람들의 재는 강으로 뿌려지고, 화장이 불가능한 어린아이와 동물의 사체는 그대로 강가로 버려졌다. 묶었던 돌이 빠지기라도 하는 날엔 떠내려가는 시체를 볼 수밖에 없었다.
이런 물을 성스러운 강가의 물이라며 퍼가는 사람들, 심지어는 이 물을 파는 사람도 있었다. 그들의 문화이고 종교이니 이해해보려고 해도 강가의 물을 마시는 사람들을 볼 때면 구역질이 나는 걸 어쩔 수가 없었다. 그들이 신성하게 여기는 강가가 실은 썩어가고 있지 않을까? 대체 강가의 하류는 어떤 모습일까? 어쩌면 이 많은 것들이 바다로 흘러들어 가는 게 아닐까?
환경이 먼저일까 신념과 문화가 먼저일까. 어려운 문제다.
더하기, 실없는 소리
인도 카스트 제도 최하층 계급 도비왈라[빨래하는 사람들]. 끝없는 세탁 노동에 시달리는 도비왈라들. 해리포터의 도비가 어쩌면 이 도비왈라에서 따온 것이 아닐까?! Dobby is free!
수수미타
바라나시에서 우리가 머물렀던 숙소는 인도 사람들이 세 들어 살고 있는 건물이기도 했다. 우리는 꼭대기인 4층에 머물렀는데, 1층에 사는 여자아기 수수미타가 자주 놀러 왔다. 나중에는 우리가 1층에 보이기만 해도 앞서서 4층까지 에스코트해주는 사이가 되었다. 어느 날에는 수수미타를 찾으러 왔던 수수미타의 오빠까지 우리 방 앞에 눌러앉아 버렸다. 수수미타의 오빠는 요가학원을 다니고 있다며 여러 동작들을 친히 시전해 주곤 했다.
하루는 장염을 앓느라 종일 누워만 있었다. 다음날 만난 수수미타가 어디 갔다 왔냐는 듯 활짝 웃어준다. 장염으로 기억될뻔했던 바라나시가 수수미타 때문에 조금은 아름다워 보였다.
수수미타는 많이 컸겠지? 수수미타의 오빠는 계속 요가 학원을 다니고 있을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