작가를 꿈꾸었다면 누구든 미문을 탐내게 된다. 그래서 흔해빠진 작법서를 마구 찾아본다. 어느 작가의 작법서, 어느 작가의 문장론, 그런 것들 모조리 찾아봐도 알 턱이 없다. 그들은 가르쳐본 적이 없으니까. 훈련해서 나온 노하우에 방법이랄 것도 없다. 자신의 문장이 몸에 밴 것이지, 작가 본인이 잘 쓰는 법을 인지하고 게임 캐릭터가 마법을 쓰듯 적재적소에 필요할 때 필요한 문장을 넣는 사람은 거의 없다. 번뜩이는 한 때를 노려 미문이 탄생하긴 하지만, 그 초고가 바로 최종본이 되는 경우는 더욱 없다. 사람의 글은 퇴고를 거쳐야 하고, 좋은 문장이란 그때 탄생한다. 그 과정은 대부분 '직감' 내지 '개인적 경험'으로 진행되기 십상이라서 '좋은 글을 쓴다'와 '글 쓰는 법을 잘 알려준다'는 거리가 멀다.
그래서 작법서를 사서 읽어보면 '세련된 표현', '좋은 문장', '예쁜 문장' 같은 애매모호한 말로 우리를 가르치려 드는 것을 볼 수 있다. 이것은 아주 자연스러운 현상이다. 가수에게 두성을 가르쳐달라 하면 목구멍을 정수리로 집어던지라고 표현하는 마당에, 글 쓰는데 '세련된' 이란 표현을 쓰는 건 못할 짓이 아니다. 다른 작가들의 좋은 문장들을 보여주고는 "이게 좋은 문장이다"라고 말하는 것은 지나가는 개도 할 수 있다. 그러나 작가들은 그 방법을 택할 수밖에 없었고, 우리들이 돈을 주고 산 작법서들은 모두 서재 깊숙한 곳에 있거나 혹은 라면 받침으로 사용되고 있을 것이다.
게다가 작법서를 쓰는 사람들은 죄다 '등단자'들이다. 문학에 한정해서 설명하는 경우가 많고, 정작 본인들이 무엇을 잘하는지도 모르면서 글을 쓰는 경우가 많다. 본인들이 본인 입으로 "제가 어째서 등단을 했는지 모르겠어요"라고 하는 것을 보면 참 안타깝기 그지없다. 그 말 그대로다. 저들은 글을 쓴다는 행위를 명예롭게는 생각했을지언정, 자기 일이라고는 생각해보질 못한 것이다. 자기 일이라면 그것에 대해 똑바로 알 필요가 있다. 단순히 '예술적 감각'이라든가, '소설가의 혼', '고통' 같은 것으로 얼버무릴 생각 따위는 버리는 것이 좋다. 글 쓰기란 고도의 정신 활동1)이다. 치밀하게, 계산적으로 행동할 필요가 있다.
그럼에도 소설은 예술이다. 그림을 그리는 것과 글을 쓰는 것은 비슷한 행위다. 랩을 하는 것과도 비슷하고, 행위예술로 저글링을 하는 것과도 비슷하다. 글 쓰기 행위를 너무 과대평가할 생각은 접어라. 글은 그저 예술이다. 고고한 예술이고, 훌륭한 예술이다. 예술 이상의 것을 바라지 말고, 즐겨야 한다. 그림 작가의 붓이 얼마나 훌륭하게 캔버스를 쏘다녔든 간에 우리의 눈에는 완성된 그림이 스쳐 지나갈 뿐이다. 소설도 그렇다. 삼라만상을 다 담는다 해도 그저 예술이라는 태생이므로 즐길 거리 이상이 되지 못한다. 그 점을 꼭 알고 갔으면 좋겠다. 우리는 화가처럼 구상할 줄 알아야 하고, 댄서처럼 연습할 줄 알아야 하고, 아이돌처럼 대중을 사로잡을 줄 알아야 하고, 발레리나처럼 미학에 고통을 숨길 줄 알아야 한다. 여태껏 모든 작가들은 자신을 과대평가해온 경향이 있다. 작가는, 그저 작가일 뿐이다.
이 책은 장르를 불문하고 '소설' 작문에 도움을 줄 것이다. 우리가 여태 호구처럼 돈을 버려왔던 "세련된", "예쁜" 같은 표현은 이제 버려도 좋다. 작가들이 어떻게 치밀할 수 있는지 알아야 한다. 좋은 글이란 어떤 글인지 아는 것보다, 대체 그걸 어떻게 쓰느냐를 알아야 할 것이다. 좋은 글을 먼저 학습하는 것도 방법 중 하나겠지만, 우리는 알고 있다. 그러한 학습법엔 '확신'이 없다는 것을. 나는 좋은 글을 쓰게 해 줄 자신이 있다.
1) 우리의 자아를 넘어서, 새로운 자아를 창조하여 공감하는 것을 유지하면서 이야기가 진행되므로 다른 정신 활동들보다도 고차원적이다. 필자는 평소에 '사색'할 것을 권장하는데, 그것은 정신 수양론을 수업해야 하므로 미신이나 사이비 종교 서적이 되어버린다. 사색(내지 명상) 훈련은 단원을 따로 만들진 않겠지만 반드시 해야 한다. '훈련'이라는 단어 때문에 거부감이 든다면 <순수 이성 비판>의 논리 전개 순서를 따라 해 보는 것도 나쁘진 않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