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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안규영 Jun 26. 2019

묘사 - 4

전문용어의 등장

     앞서 우리는 묘사의 기초를 맛봤다. 묘사를 너무 어렵게 생각하지 말길 바란다. 그저 당신의 우주를 남에게 보여주는 방법에 불과하니까. 여태 한 말을 요약하자면, 우리는 결과물만을 봐왔기 때문에 경험적인 방법 말고는 딱히 묘사력을 늘리기가 힘들었고, 나는 우리 내면에서 진행되는 과정을 보여주기 때문에 조금은 더  실용적이라는 내용이다. 이미지를 그려내고, 그 이미지의 성질에 맞게 선택하는 것. 그 성질은 표면, 비표면적 성질이 있다고까지 이야기를 했다. 조금 더 나아가고자 하는데, 지금까지의 묘사는 모두 '주부'에 국한된 말이라고 물꼬를 트고 싶다. 우리는 문장에 대해 조금 더 이해할 필요가 있다.

     이제는 심화 이론으로 가는 밑 작업을 할 때다. 그래서 문법 공부를 해야 한다. 쉽다.


     우리말은 핵심으로 주부와 술부를 꼽는다. 주부는 생략해도 된다. 술부의 종류에 따라 보어, 목적어가 추가로 붙기도 한다. 우리 모두 고등학생 때 배운 말이고, 쉽게 얘기하자면

     이런 형국이다. 문장이란 3단 봉처럼 길이가 제멋대로다. 그것을 조율하는 것은 모국어 사용자인 우리의 입맛 말고는 없다. 목적어나 보어는 술부에 따라 입맛이 제한되는 경향이 있는 데다가 명사를 쓴다는 점에서 '주부'를 다루는 일과 크게 다르지 않으므로 따로 설명은 않겠다.

     그래서, 결국엔 '주부'는 명사가, '술부'에는 동사 또는 형용사가 온다는 것이다. 몰랐대도 상관없다. 내가 알려주고 있으니까. 지난 시간까지 우리는 '명사'의 이미지를 효율적으로 그리는 법에 대해 이야기하면서 표면이니 비 표면이니 하는 것을 다루었다. 글을 조금 써본 이라면, 그 이론은 술부에는 잘 먹히지 않는다는 것을 눈치챘을 것이다. 그러나 또 아주 안 먹히지는 않는다. 왜일까.


     술부에 들어가는 어휘는 '변화'를 말하기 때문이다. "달렸다.", "(방아쇠를) 당겼다.", "목검을 휘둘렀다." 같이 인간의 행위가 온전히 상상되는(=이미지가 고정된) 술어들은 표면-비 표면 이미지를 적용시키는 데 꼭 어렵지만은 않다. 그러나 "싸움을 말렸다.", "뭉뚱그렸다.", "가져왔다." 같은 단어들은 어딘가 맥이 빠진다. 온전히 상상된다기보다는 형식적이다. 필요해서 쓴 동사라는 느낌이 든다.

     또, 이는 독자의 관용에 따라 다르다. 어떤 이는 "싸움을 말렸다."라고만 적어줘도 세부적인 행위가 떠오르고, 어떤 이는 집중이 풀려서 다시 읽거나 코웃음을 친다. 작가라면 독자 모두가 착해 빠졌을 거라는 착각은 접어두자. 우리는 순결한 이미지의 향연을 보여주어야 한다.


     변화를 보여준다는 것은 크게 두 갈래로 나뉜다. 이미지가 고정된 경우, 이미지가 없는 경우. 더 쉽게 풀어서 말하자면, 인물이 무엇을 하는지 그려내기 쉬운 단어와 그려내기 난해한 단어. 그리고 이들의 차이는 이미지를 볼 수 있느냐 없냐다. 당연히 보이는 쪽이 낫다. 그렇다고 후자를 안 쓰냐면 그것도 아니다. 이미지가 안 떠오르는 동사들로도 소설을 쓸 수 있다.


     20년 전이었다. 아버지는 항상 맥 빠진 눈빛이셨다. 그건 내가 했던 따돌림. 지체장애인 순창이를 괴롭혔기 때문이다. 아침에도 저녁에도 아버지를 보기는 힘들었고, 가끔씩 뵐 때면 그 특유의 태도로 나를 무시하며 지나쳤다.


     이렇게 긴 기간을 짧게 요약하는 독백체 문단의 경우 딱히 상상력이 필요하지 않다. 여기서 그나마 상상이 되는 건 "보기는"이라는 만남의 순간, "지나치다"라는 장면 정도다. 이것은 주인공의 전사(비하인드 스토리)를 보여주는 역할을 하고, '아버지'를 제시하고, 그 아버지가 어떤 태도를 왜 보여주는지 설명하면 그만이기 때문이다. 주인공이 아버지에게 어떤 마음을 가졌는지 보여주기도 하고.


     상상되지 않는 글로 쓸 수 있다고 해서 상상하기 어려운 말로만 쓰면 될까? 결국, 우리는 상상하기 어려운 말을 상상하기 쉬운 말로 바꿀 필요가 있는 것이다. 그 행위(술어를 골라내기)가 자연스러운 작가가 된 뒤에야 위처럼 상상하기 어려운 술어를 활용할 수 있는 것이다. 그 방법은 크게 두 가지다. '수식어 구체적으로 넣기'와 '다른 어휘를 쓰기'다.


     수식어를 구체적으로 넣으면 암만 추상적인 동사도, 형용사도 구체적이 된다. 일단은 예를 들어보자.


     그녀는 예쁘다.


     이 얼마나 추상적인 형용인가. 이것을 가장 잘 활용한 작가가 누구인지 아는가? 알면 이 방법 자체가 꽤 구시대적이라는 걸 알 수 있다. 바로 셰익스피어와 기타 고대-중세 작가들이다.


     그녀는 저 홀로 뜬 달의 여신만큼이나 예쁘다.

     그녀는 비너스 같이 예쁘다.


     조금 더 응용하자면,


     그대는 별보다도 밝구려.

     태양도 시샘하여 그대를 데려갈지 모르오.


     이런 식이다. 즉, 이 방법을 베베 꼬면 중세적 말장난을 칠 수 있게 된다. 노랫말에서도 종종 등장한다. 추상적인 술어가 가장 마지막에 배치된다는 점에서 운율감을 만들기 쉽기 때문이다. 물론 구시대적이라고 해서 안 쓰는 건 아니다. 남발하지 말라는 말이다.


     두 번째 방법은 술어 본연의 성질을 파악하는 것이다.  앞서 우리는 술어가 "변화"를 말한다고 했다. 그러나 모든 변화는 '시간'을 동반한다. 인물이 어떠한 행위를 할 만한 여건이 되는지 고려하는 게 바로 '움직임'의 맛이다. 예를 들어보자.


     우선 주인공의 마음이 급했으면 좋겠다. 상상해보자. <운수 좋은 날>의 김첨지. 국밥집에 치삼이와 함께 들어가지 않았나. 그러나 그 속은 얼른 술로 씻어내고 싶은 마음뿐이다. 왜 그런가 왜? 자본주의1)나 일제강점기의 여파로? 주인공의 시점에서 봤을 때는 아내의 죽음이다. 아내가 죽었으리라 짐작한 그는 돈 몇 푼에 휘둘려 가정을 돌보지 않았다. 후회가 밀려온다. 젊은 나이, 세를 얻어 출발한 부부는 '오늘 벌어야 오늘 살기 때문에' 부서졌다. 굶주려서, 급하게 먹다 체해서 죽었다. 자기가 데려다주는 사람들은 걷는 것을 돈 주고 남 시키는 사람들인데. 우리 마누라는 밥도 못 먹다가 죽고. 자식새끼는 그 유전자를 뻑뻑 빨고 있을 테다. 그 절망이 가장 극대화된 것은, 그 사실을 확인한 게 아니라 상상으로, 불안으로 점점 키워나갔기 때문이다.

     술로라도 씻어내고 싶다. 근데 그러려니까 돈은 있냐고 치삼이가 묻는다. 돈! 우리 부부의 인생을 종 쳐버린 돈. 이 돈. 인력거 일 말고는 빌어먹을 수도 없는 이 돈. 애초에 조금 더 잘 벌었더라면, 아니, 이런 거 상관없이 밥은 먹고 다닐 수 있었더라면. 비극의 전초가 이런 엽전 떼기 몇 장이라니.


     그래서 그가 뭘 했을까? 김첨지는 내면이 폭풍과도 같고, 염세적이 되기에 이르며, 저 혼자서는 갈등의 최고조에 이른다. 그 돈으로 독립운동 기구에 기부를 했나? 총을 사서 서울역에 테러를 했나? 분신자살? 자살? 치삼이와 싸웠나? 중국으로 밀항? 신문 투고? 술집을 불태우고 다녔나? 아니. 돈을 바닥에 던졌다.

     이 부분이 예로 들어간 것은 '갈등의 최고조'인 만큼, 행동이 [즉발적]으로 일어나야 하기 때문이다. 그게 김첨지에게 주어진 여건이다. [화가 난 지금], [할 수 있는 가장 분노 가득한 행동] 그게 돈 던지기다. 가장이 남을 죽이거나 할 수도 없다. 독립운동은 물론이고. 밀항은 너무 먼 이야기다. 당연한 것 아니냐고 말을 하겠지만, 조금 훈련된 작가들 중 몇몇에게는 감회가 새로울 것이다.


     우리는 글을 마무리지을 때쯤, 인물의 내면이 변화되는 과정을 추가한다. 원래는 A스러운 인물이 사건 a를 만나 A'라는 변화를 맞는다. 그런 방식이 대부분이다. 예를 들어보자. 성희롱에 둔감한 과장 K가, 납치당할 뻔 한 여자아이를 도와주며 여성의 삶에 대해 절실히 깨닫고는 회사에서 성희롱을 하지 않게 되었다.

     여기서 우리는 변화를 주겠다고 "더 이상 그런 말을 꺼내는 일은 없었다."라든가 하지 않는 게 좋다. 한 장면에 시공간을 너무 많이 뛰어넘었기 때문이다. 이 말은 "행복하게 오래오래 살았습니다."와 다를 게 없다. 쓸만한 표현은-, 그가 대놓고 사과를 한다든가, 오히려 다른 과장이 희롱하는 것을 면박 주는 장면을 넣는 게 자연스럽다. [그 시공간에서], [할 수 있는 최선의 변화]인 것이다.


     이번엔 정확히 '술부'의 어휘를 건드려보자. 한 사기꾼 성형외과 의사가 있다. 그는 가짜 수술을 하고, 법적 대응에는 책임이 없다는 결론을 얻으며 떼돈을 번 인물이었다. 그런 그가 위안부 피해자 할머니의 수술 의뢰를 받게 되는데, 젊은 시절 개머리판에 맞아 함몰된 광대뼈에 보정물을 넣는 것이었다. 그는 뒤늦게 의대생 시절 선배에게 조언을 얻어 제대로 된 공부를 했고, 그 형님을 초청하여 합동 수술을 한 것이다. 부작용도, 후회도 없는 수술이었다. 그렇게 그는 인기를 얻었다.

     그는 해외로 여행을 가게 되었다. 결말부. 갑자기 기내가 어수선해지고, 의사를 찾았다. 누구 의사 없냐는 말에 다급히 승무원들이 움직였지만 의사가 없었다. 결국은 그가 불려 나갔다. 환자는 갑작스레 심정지가 온 노인이었다. 환자는 제 가슴을 쿵쿵 때렸고, 혈색은 새까매졌다.


     이다음부터는 진짜 서술을 하듯 적어보겠다.


     그는 노인의 셔츠를 잡아 뜯었다. 숨도 쉬지 않았다. 심근경색일까? 그는 머릿속이 새하얘졌다. 우선은. 우선은? 뭘? 두통엔 타이레놀 정도밖에 모르는데 이 자에 대해 뭘 선고할 수 있나.

     선생님, 왜 그러세요, 이 사람 왜 이래요!

     그는 새파래진 환자의 얼굴을 봤다. 경련하는 목덜미, 죽어가는 숨. 심정지가 맞기는 한 걸까. 그는 동요한 탓에 무엇도 들리지 않았고 맥박도 느낄 수 없었다.

     전화를 해도 되겠습니까.

     1초가 급한 환자. 그렇기에 한 순간도 자체 하지 않아야 한다. 그게 그의 최선이다.

     아는 형님이, 진짜 의사입니다.

     그는 전화를 꺼내 들었다. 이제야 들린다. 환자의 생명을 돌이켜줄, 맥박 같은 수신음이.


     여기서 [최선]은 전화기를 들고, 양심에 맞게 대사를 읊는 것이다. 잘못된 예시도 함께 들어주겠다.


     환자를 본 그는 섣불리 진찰을 할 수 없었다. 당황하기도 했고, 환자가 어떤 상태인지 알 수도 없었기 때문이다. 그는 고민한 끝에 전화기를 꺼내 들었고, 전화했다. 여보세요.


     이것을 단지 길이 차이라고 인식한다면 큰 오산이다. 밑줄 친 행위들이 '상상 가능한가'를 따져보자. 왜 밑의 예문만 상상이 어려운가? 우리는 '당황'이라는 활동을 하지도 않고, 그 내적 변화가 눈에 보이지도 않기 때문이다. [그 시공간에서]는 맞지만, [할 수 있는 최선의 변화]가 아니다. '할 수 있'지도 않고, '변화'도 아니다.


     요컨대, 아주 쉽게 말하자면, 술부라는 것은 영화나 드라마의 장면에 빗대어 설명할 수 있다. 술어라는 것은 장면 속 '움직임'그 자체와 같기 때문이다. 즉, '상상'이라는 것은 그 화면 속에 인물을 넣을 수 있느냐 없느냐의 문제다. 명사를 예쁘게 묘사하는 것은 그 사물에 특별한 가치를 주입하는 일이고, 술부를 올바르게 사용한다는 것은 장면 속 명사들이 잘 움직이게끔 돕는 것이다. 그 움직임은 [그 시공간에서], [할 수 있는 최선의 변화]가 아니면 매끄럽지 않다.

     다음 장에는 위의 두 조건에 대해 더 깊게 알아보도록 하자.



1) 작법 이외의 사항은 넘어가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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