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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김지훈 Jul 04. 2020

형의 방에는 늘 스탠드가 켜져 있었다.

"지훈아, 뭐 갖고 싶어?"

 어른들은 기분이 좋으면 내게 무엇을 갖고 싶었는지 물었다. 나는 어릴 때부터 갖고 싶었던 장난감, 옷, 자동차 등 갖고 싶었던 것을 신나게 열거했다. 그런데, 그중 실제로 받은 것은 거의 없다. 오히려 형이 중학교에 입학할 때 맞출 교복비가 없어 선배의 교복을 물려받았고, 그것을 다시 친척 H가 물려받았고, 또다시 그 옷을 내가 물려 입었다. 교복은 해질 대로 해졌고, 중학교 선생님들조차도 그 옷이 12년 동안 물려받은 옷이라는 걸 알 수 있었다. 


  형은 나보다 세 살 위다. 우리 형제가 시골로 내려갔을 때, 나는 시골에 아빠가 없고 급작스런 가난에 표정에 우울이 드리웠었는데, 형은 표정의 변화가 없었다. 평온한 표정으로 시골에서의 생활을 적응해 나갔다. 당시 시골집에는 방이 3개가 있었다. 그중 한 개는 형 방, 안방은 나와 친척 H와 엄마가 쓰는 방, 또 다른 방은 친적 G와 고모가 섰다. 거실에는 고모부가 계셨다. 형은 중학교에 들어가면서부터 학교와 학원 생활을 병행했는데, 저녁 11시가 되어 집에 와도 새벽 2시까지는 공부를 하다 잠에 들었다. 그런데, 그런 생활마저도 집에 빚이 많이 쌓이면서 불가능하게 되었다. '돈도 없는데 집에서 공부하면 되지, 무슨 학원이냐'는 말로 형이 학원을 가는 상황이 찝찝해졌다. 그리고 학원을 가는 것은 형 입장에서 눈치가 없는 행동이 되었다. 형은 그날로 학원을 그만두게 되었다. 형은 내색은 안 했지만, 실망한 듯 보였고 EBS 방송으로 학교에서 채우지 못하는 내용을 보완하며 공부를 해나갔다. 


 집에 빚이 있는데 학원에 가는 상황이 찝찝하다는 것은 나도 알고 있었다. 나 역시 중학교 때 빚을 더 내서라도 학원에 다녔다. '사실 학교를 끝나고 공부를 하러 가는 게 뭐가 재밌을까'라는 생각이 들 수도 있지만, 당시 집은 늘 어떤 일이 발생하지 않으면 안 되는 평화롭지 못한 공간이었기에 집이라는 공간을 최대한 피하고 싶었다. 그래서 형이 집의 사정을 알면서도 학원에 다닌 심정을 나는 잘 알고 있다. 이른 저녁이 되면 학원에 가지 못했던 형은 방문을 닫았다. 주로 형 방에 놓여 있던 TV로 EBS 방송을 시청하거나 스탠드를 켜고 공부를 했다. 방문을 닫아 독립적인 공간이 있었다는 게 형이 가진 유일한 혜택이었다. 나와 친척 G는 연년 차로 지금은 둘도 없이 친한 사이지만, 예전에는 얼굴만 봐도 싸웠다. 같은 공간을 함께 쓰니 부딪힐 일도 많았고, '너네 때문에 이렇게 사는 거'라며 하지 말아야 할 말도 했었다. 그래서 늘 혼나는 건 G와 나의 몫이었다. 방문을 닫았던 형은 G와 내가 싸우는 것조차도 늘 있는 일인 듯 늘 방관했다. 나는 셋 중에 싸움을 제일 잘하는 형이 참여해 주길 원했지만, 형은 일을 키우고 싶어 하지 않았다. G는 지금 형을 보면, 그때 형이 방관해줘서 오히려 지훈이랑 사이도 좋고, 형에 대한 기억도 좋다고 덕담을 건넨다. 나는 웃으면서 '아니, 무슨 형이 동생 맞을 때도 안 도와주냐'며 형한테 농담을 건넨다. 

 친척 H는 "에이, 지훈아 그건 말이 안 되지, 형이랑 너랑 둘이 나 공격하면, 내가 얼마나 억울했겠냐."라며 나에게 핀잔을 준다. 이제 와서는 웃으며 할 수 있는 훈훈한 이야기들이며, 술안주로 굉장히 진한 소재들이다.


 형은 중학교 3년 동안, 집에 오면 자기 방에서 스탠드를 켜고 공부를 했다. 그리고 고등학교 기숙사로 들어가며 집과는 벗어난 공간에 들어갔다. 일주일에 한 번 오는 형은 전보다 더 표정이 밝아 보였다. 그리고 그렇게 고등학교 3년을 마치고 나서 ROTC해병대 장교 지원으로 대학교에 들어갔다. 등록금을 지원할 형편이 안 되는 집안 사정을 알고 스스로 선택한 것이다. 그때 나는 형의 그런 결정에 많이 놀랐었다. 형이 해병대를 갈 거라고는 상상도 못 했었다. 그리고 고된 군생활을 하며 휴가를 나와서는 나를 보며 웃으며 농담을 건넨다. 형의 안부는 늘 정해져 있다. 

 '야 인마, 너 뭐하고 살 거냐'거나 '직장 나와서 뭐할 거냐'거나 '사업하는데 돈 잘 버냐'이다. 말의 맥락에는 늘 생존과 연결되어있다. 나 역시 생존력에서는 타인과 견주어도 뒤지지 않을 자신이 있다. 한 번은 형이 출장 차 서울에 올라왔었다. 오랜만에 아버지와 함께 세 부자가 술과 고기를 아주 많이 마시고 섭취했다. 술에 취한 아버지가 "지성아, 네가 첫째니까 동생 잘 있는지 챙겨."라고 했다. 형은 "아빠, 얘랑 나는 서로 돈에 얽히지도 않고 알아서 잘 살고 있는 것만으로 잘 챙기는 거야. 얘랑은 마음으로 통해.'라는 답변을 했다. 


 돈에 얽히지 않는다는 것과 마음으로 통한다는 형의 말이 무슨 의미인지 알 것 같았다. 형과 나는 어릴 때부터 갑자기 생긴 빚이 싫었다. 빚이 있다는 것은 할 수 없다는 것이 많다는 것을 의미했고, 인간 사이에 갈등이 일어남을 암시했다. 특히 가족 간에도 빛을 만드는 것보다는 서로가 필요할 때 보탬이 되라고 돈을 얼마씩 주는 편이 더 현명한다는 것을 일찍 알았다. 마음으로 통한다는 형의 말도 단번에 알아들었다. 시골집에서 저녁만 되면 형방에서 세어 나오는 스탠드 빛을 보며, 나는 형이 저 방에서 어떤 생각을 할지 궁금했다. 그리고, 지금 상황을 형으로서 잘 버티길 응원했다. 형 역시도 형으로 앞장서며 동생에게 어떤 상황에서도 아무렇지 않게 나아갈 수 있다는 것을 보여주고 싶었는지도 모른다. 그리고, 그 마음이 닿아 서로 각자의 영역에서 잘 살아가고 있다. 나는 지금도 일을 할 때 스탠드를 켜놓고 일을 한다. 어두운 밤 여백조차 없는 적막에 형방에서 유일하게 흘러나왔던 스탠드 빛을 보며, 희망을 품었다. 그래서 스탠드 빛은 내게 안정을 준다. 가끔은 일을 하다 형이 잘 살고 있을지 궁금해한다. 안부는 굳이 묻지 않는다. 가끔 만나 술 한잔 하고 형이 정서적으로나 육체적으로 건강하게 제 갈길을 가고 있는 것만으로도 만족한다. 스탠드 빛 안에서 열심히 일하다가, '형한테 맛있는 것 사줘야지'라며 나 혼자 상상하고 웃는 것만으로도 힘이 되고 의지가 된다.


 그렇게 먹는 술은 또 얼마나 달까. 오늘도 나 혼자 달콤한 상상에 빠진다. 내가 동생이지만, 형이 잘 커줘서 참 다행이다. 내가 형이 잘 커줘서 고맙다는 글을 쓴 걸 알면 형이 비웃을지도 모르겠다. 그런데 우리 형은 내 글을 보지 않는다. 많은 사람들이 봤던 내 시집조차 읽지 않았다고 한다. 이유는 동생이 낸 책을 보는 게 형으로서 오글거려서 그렇단다.  

 "웃기고 있네, 형이 감성이 없어서 그런 걸 뭘 탓해."

 나는 조금의 서운함을 형의 감성이 없음으로 정의하고 훌훌 털어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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