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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김딜김 Sep 08. 2020

차원 너머의 기억과 오래된 미래, 낯선 과거

<기억의 과학>을 읽고 생각한 것

기억은 당시 무슨 일이 일어났는지에 관한 것이지만, 현재 우리가 누구인지에 관한 것이기도 하다.
(< 기억의 과학> p. 360)


페이스북의 '타임라인'은 시간 순이 아니다. 뭔지 모를 알고리즘에 따라, 어떤 게시물은 나도 모르는 이유로 인해 가장 최신의 게시물이 아님에도 최상단에 존재하기도 하고, 어떤 계정의 게시물은 유난히 빈번히 보이거나 유난히 드물게 보이기도 한다.


기억은 바로 이 페이스북 '타임라인'같은 것이다. '타임라인'이라는 말 자체는 일방향적인 시간의 흐름을 전제하고 있지만, 아이러니하게도 시간의 흐름과는 무관한 것이 바로 이 페이스북 타임라인이다. 문자 그대로의 뜻인 '타임라인'처럼, 우리는 직선의 연표에 특정 사건이 놓여있는 것이 기억이라고 굳건히 생각하지만, 사실 기억이 구성되는 방식은 시간과는 무관하다.


우리는 3차원의 공간과 1차원의 시간의 세계에 산다. 현실 세계에서 시간은 순행적으로 흐른다. 과거와 미래가 동시에 존재할 수 없으며, 한 번에 두 가지 이상의 순간은 존재할 수 없다.


그러나 기억은 시간의 차원을 넘어선다. 하나의 축을 가지고 앞, 뒤로 움직이는 것이 아니라 여러 개의 축을 가진 입체로써, 과거에 미래가 덧대어지기도 하고, 대과거의 사건이 과거보다 앞에 놓이기도 한다.


기억에서 시간을 덜어내면 한결 정처 없는 형식의 상상이 되고 미래로도 폭을 넓힐 수 있게 된다. (중략) 기억 속으로 여행한다는 것은 한 개인의 시간의 축을 따라 앞으로, 뒤로 휙휙 이동하는 것이라기보다는 실은 상상적인 공간을 돌아다니는 것에 가깝다. (p.196)
(전략) 지금의 나와 당시의 나, 이렇게 두 사람으로 동시에 존재한다. 두 사람 모두 이런 기억에서 맡은 바가 있다. 그들이 느끼는 바가 여기에 형태를 만들고, 그들의 목표가 구조를 부여한다. 과거와 현재가 이렇게 병치하면서 비로소 기억으로 느껴지게 되는 것이다. 나는 경험을 다시 체험하기보다 경험과 관계를 맺는 것이다. 기억된 단서가 기억된 경험의 단편들과 합쳐져서 새로운 무엇이 만들어진다. 로저 샤턱은 프루스트를 논의하면서 이렇게 말했다. "우리의 눈처럼 기억도 양쪽을 본다. 이어 이 두 이미지가 마음속에서 합쳐져서 하나의 '강화된 현실'이 된다." (p.359-360)


<기억의 과학>은 기억의 재구성적 성격이 기억을 왜곡할 수 있음을 역설한다. 기억은 현재의 요구를 반영한다. 기억은 경험을 사실적으로 나열하는 것이라기보다는, 오히려 현재의 나와 상호작용하며 만들어지는 "구성물"과 같은 존재다. 현재의 나는 과거의 기억을 '새롭게' 만들 수도 있고, 동시에 미래를 상상하는 것 역시 기억에 비추어 이루어진다.


이를 통해 생각해 볼 때, 만약 부정적인 기억을 잊고 싶다면 망각이 "해결책"이 아닐 수도 있다. 우리는 대개 입체적인 기억의 한 단면만을 '기억한다'. <기억의 과학>에서 트라우마 치료의 예시를 든 것처럼, 우리는 종종 기억의 세부사항을 잊고 있다가 후에 어떤 계기로 인해 기억의 다른 단면을 상기해내기도 한다. 책의 저자가 "상황에 대해 다르게 느끼기 시작하면 기억이 달라진다"라고 말한 것과 같이, 같은 경험이더라도 어떤 단면을 '기억'하냐에 따라 과거에 대한 감상 또한 달라질 것이다.


평면적인 기억에서 벗어나 입체적으로 과거를 기억하려는 시도는 현재의 내가 낯선 과거와 오래된 미래를 발견하게 한다. 과거를 기억하는 일과 미래를 상상하는 일이 유사한 기제를 통해 발현된다는 사실은 '현재의 자신'에 집중해야 할 근거가 된다. 과거의 기억을 바탕으로 오래된 미래를 구상하는 것은 결국 현재의 자신이다.


현재의 자신은 과거의 기억으로부터 만들어진 존재임과 동시에 과거의 기억을 능동적으로 불러올 수 있는 존재다. 현재는 자신이 실제로 통제하고 변화시킬 수 있는 유일한 순간이다. 과거의 기억의 어떤 단면을 불러올 것이냐, 현재의 자신과 과거의 경험을 어떻게 연결할 것이냐는 오로지 현재의 자신에게 달렸다. 현재의 자신이 어떤 사고의 구조로, 어떤 추상적인 표상을 과거의 경험에 연결하느냐에 따라, 우리는 새로운 과거를 살고 새로운 과거는 새로운 미래를 만든다.


우리는 종종 경험을 미화하려 한다. 미화를 통해 경험의 좋은 단면만을 남기려는 행위는 어떻게 보면 긍정적인 미래를 상상하려는 우리의 무의식적인 노력이 아닐까, 생각해본다.


소설 <플랫랜드>에서는 포인트랜드, 라인랜드, 플랫랜드, 스페이스랜드가 등장한다. 이는 각각 0차원, 1차원, 2차원, 3차원의 세계를 상정하는 것인데, 포인트랜드에 사는 존재는 그 자신이 세계의 전부인 줄 알고, 라인랜드에 사는 존재는 앞, 뒤로만 움직인다. 플랫랜드에 사는 존재는 평면이 세계의 전부인 줄 알다가, 3차원의 공간인 스페이스랜드를 경험하자 3차원보다도 더 높은 차원을 상상하게 된다.


기억이 어떻게 작동하는지 우리가 더 많이 인식하게 되었다는 이유 때문에라도 나는 우리의 기억이 바뀌고 있다고 생각한다. (p.357)


세계의 차원은 사고의 틀을 규정한다. 차원 너머를 상상하는 것은 사고를 확장하려는 시도다.

일직선으로 이루어져 있을 것만 같던 기억의 바깥을 내다보는 것 역시 사고의 틀을 넓힐 수 있는 계기가 될 수 있지 않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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