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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김딜김 Feb 10. 2021

'같아요'를 왜 쓰는 것 같아요?

여러 겹의 완충재를 선호하는 언어란

요즘 세대가 습관적으로 쓰는 '같아요'너무 거슬린다던 사람의 글을 읽은 적이 있다. 나 역시 그 글을 읽기 전까지는 크게 인지하지 못하다가, '같아요'를 쓰지 않고는 말을 이어나갈 수 없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어제는 일을 하다가 업무 공유 채널에 어떤 의견을 제안하고자 글을 썼는데, 문장을 '같아요'로 끝맺지 않고는 단 한 줄도 쓸 수 없는 나 자신을 발견했다. 내가 쓴 문장은 다음과 같다.


"어쩌구 저쩌구는 적합하지 않은 것 같아요. 어쩌구 저쩌구할 가능성이 큰 것 같습니다. 그래서 어쩌구 저쩌구하는 것이 어떨까 싶어요. "


스스로도 굳이 이렇게 써야 하나 싶어 다른 표현을 생각해 보았는데 역시 '같아요'라고 쓰는 게 마음이 편하고 또 고민할 필요가 없어 편리해 보였다. 가령 이렇게 썼다고 생각해보자.


"어쩌구 저쩌구는 적합하지 않습니다. 어쩌구 저쩌구할 가능성이 크니까요. 그래서 어쩌구 저쩌구 하는걸로 합시다."


참고로 나는 일한 지 몇 개월 되지 않은 일개 말단 구성원이다. 내가 '이렇게 합시다'라고 말할 수 있는 상황이 아니다. 말하고 싶은 건 많지만 조직 내에서는 의외로 괜히 눈치를 보는 유교결인 나는 타자로 치는 언어만큼은 조심스럽게 고르고 싶었다. 그래서 나는 내가 생각한 방향을 제시하고는 싶지만 이것이 의심의 여지없는 명백한 사실 아닐 수도 있다는 가능성을 은연중에 열어놓고 싶었다. 내 생각을 적극적으로 제안하고는 싶지만 보다 완곡한 표현을 사용하고 싶은 마음. 그런 일련의 사고 과정을 반영하는 언어가 '같아요' 였던 것이다.


명백한 사실에 '같다'라는 표현을 쓰면 어색하지만, 개인의 느낌에 '같다'라는 표현을 쓰면 자연스럽게 들린다. 어제 영화를 본 것 같다, 라는 말을 듣는다면 기억 상실증인가, 혹은 어떤 시트콤의 대사인가 싶을 거다. 언어의 교묘한 틈을 파고 들어가서 익숙한 세계에 균열을 만들면 우스꽝스러운 상황이 연출된다는 걸 가장 잘 아는 사람이 바로 시트콤 작가다. 이 메커니즘을 날카롭게 짚고 웃음으로 이끄는 것이야말로 대단한 일이다.


'~한 것 같다'라는 말은 주로 자신의 생각을 나타낼 때 사용된다. 영어의 I think나 it seems like 정도와 유사한 용법으로 사용되는 듯 보인다. 물론 이 영어적인 표현이 우리말에서도 보편화되어 '같아요'라는 표현이 더욱 빈번하게 사용된다고 볼 수도 있다. 그러나 나는 요즘 우리가 특히 '같아요'라는 표현을 많이 사용하는 주된 이유는 이전보다 생각을 표현할 일은 훨씬 많아졌지만 동시에 급격한 변화의 충격을 완화하는 완충재의 필요성을 느끼기 때문이라고 생각한다.


어떤 표현이 자연스럽게 받아들여지는 사회라면 그 표현이 밟고 선 문화를 봐야 한다. 단순히 '같아요'를 습관적으로 사용하는 언어 습관을 지적할 것이 아니라 왜 그런 습관이 만연하게 되었는지부터 짚어보면 흥미로운 부분이 있다. 물론 '같아요'라는 말이 제 자리가 아닌 곳에 끼어들어 이상한 경우가 많다는 건 부정할 수는 없다. '지금 기분이 좋은 것 같아'가 아니라 '지금 기분 좋아'라고 말하는 것이 더 자연스럽기는 하다. 하지만 이 언어 습관도 결국은 정확하게 표현하는 것보다 완곡하게 표현하는 것이 더 중요시되는 문화권이 닦아놓은 길일 뿐이다.


우리 문화의 화자들은 본래 여러 겹의 완충재를 선호한다. '부탁합니다' 대신 '부탁드립니다' 대신 '부탁드리겠습니다' 까지. 이 문화에서 '같다'라는 말이 유행하는 현상은 사실 그리 놀라운 일은 아니다. 굳이 위계가 철저한 조직에 속하지 않더라도, 한국 사회에 사는 사람이라면 누구나 자연스레 학습한 눈치가 있다. 다만 이 눈치는 굳이 발휘하지 않아도 될 상황에서도 끊임없이 자동으로 발동된다. 그래서 눈치가 언어에 배어들어 많은 '같다'와 같은 완충재를 습관화했다.


자신의 생각 뒤에 '같아요'라는 말을 붙이는 것은 자신의 생각에 확신이 없어서가 아니라 사회에 적응하기 위해 의도적으로 완충재를 탑재하는 행위로부터 비롯되었다. 틀릴 가능성을 어느 정도 전제해 놓고 조금이나마 겸손하게 보이는 언어를 택하는 거다. 그래야 자아 표출의 욕구도 미루지 않고 한국어 화자들의 문화에도 적응할 수 있을 것만 같으니까.


기성세대는 요즘 세대가 개인주의적이라거나 자기주장이 강하다는 말을 많이 한다. 그들의 입장에서는 요즘 세대가 급진적으로 변화한 세대라고 여겨질 수 있다. 그도 그럴 것이, 우리는 개인의 생각을 전달하고 전달받는 데에 익숙하지 않은 문화권이다. 그래서 우리는 수신자가 받을 충격을 완화하고, 자신 나름의 의견도 표현하는 일종의 절충안으로 '같아요'라는 말을 사용해 생각을 전달하게 된다. 생각을 적극적으로 표현하고자 하는 욕구를 지닌 사람은 많아졌지만 영어처럼 직설적인 표현을 선호하는 문화권이 아니기에 완만하게 변화를 이끌 수 있는 충격 방지턱이 필요하기 때문이다. 한국어 문화권에도 어느 정도는 무리 없이 적응할 수 있고, 또 변화하는 시대의 흐름에도 어느 정도는 발맞출 수 있는 중간 성격의 언어.


생각은 언어에 영향을 주고, 언어는 생각에 영향을 주듯이 이 완만한 변화가 계속되면 언젠가는 완충재를 사용하지 않아도 표현하는 것이 가능해지지 않을까. 완곡하게 표현하는 것보다 정확하게 표현하는 것이 더 중요해지는 날이 올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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