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람이란 일단 선택을 내린 후에는 자기 삶의 우연성에 만족하기 마련이고 그것을 사랑할 수도 있으니까. (야간비행, 생택쥐페리)
사주를 본 적이 있다. 심리테스트부터 (유사)MBTI에 이르기까지, 모든 것에 의문을 달고 사는 사람이 웬 사주냐, 하면 정말 미래가 보이지 않아서 극도로 불안했을 무렵, 급하게 붙잡을 무언가가 필요했었다. 좋은 불안은 현재에 집중하는 삶을 가능케 하지만 나쁜 불안은 미래를 비관하게 만들 뿐이다. 더 이상 현재에 집중하기 어려워졌을 때, 내 의지 너머의 영향력을 믿고 싶은 순간이 있다. 물론, 막상 까고 보니 뻔한 얘기와 어디서 들어본 것 같은 말들이 대부분이었지만.
가장 비과학적으로 여겨지는 것은 그것의 사실 여부에 관한 논쟁과는 별개로 기능적인 필요를 충족시킨다. 각 사람에게 정해진 앞날이라는 것이 있을 수는 없지만, 혹은 있다고 하더라도 그것이 여전히 적용될 것이냐는 또 다른 문제지만, 운명을 믿는다는 것과 과학을 믿는다는 것은 같은 층위의 문제가 아니다.
물론 진짜로 운명이라는 것이 존재한다고 믿는 사람도 있겠지만, 나의 경우에 운명이라는 것은 삶의 흐름에 집착하지 않게 만들어 주는 존재다. 그것이 실제로 존재하는지는 알 수 없지만, 어딘가 한구석에 존재할 수도 있지 않을까, 하고 어렴풋이 상상하는 것 자체로 그 기능을 다하는 것이 운명의 역할인 셈이다.
삶은 우연성과 필연성의 혼합으로 이루어져 있음에도 불구하고, 각 선택들의 총합이 결국은 예견된(혹은 좋은) 방향으로 흘러갈 것임을 믿는 것은 나로 하여금 각각의 개별적인 선택에 크게 연연하지 않게 해 준다. 지금 당장은 터무니없는 선택을 하더라도, 혹은 내 의지와는 무관한 일이 벌어지더라도, 거시적인 눈으로 보면 결국 특정한 방향으로 향하고 있는 그래프를 그리고 있는 중이라고 믿는 것이다.
과거의 미련한 선택을 후회하면 스스로의 탓을 하게 된다. 선택의 주체는 오로지 스스로였던 탓에, 후회는 필연적인 자기혐오를 낳는다. 적어도 나에게는, 스스로를 갉아먹는 행위처럼 몸에 해로운 행위로부터 나를 보호하는 수단이 '그래도 어딘가에는 운명이라는 것이 존재할 것'이라고 상상하는 행위였던 것이다.
낙관 섞인 삶은 지나간 선택에 연연하지 않고, 앞으로의 선택을 두려워하지 않는 것으로부터 온다. 운명을 믿는다는 것은 흘러간 것은 흘러간 대로 보낼 수 있는 일종의 심적 부적이다. 실제적인 효능보다는 상징적인 의미로 지니고 다니게 되는 부적처럼, 나에게 하늘의 영향력이 실제로 미친다고 믿는다기 보다는 삶의 낙관이 필요할 때마다 꺼내 볼 수 있는 것이 운명이었던 셈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