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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큼삶 Aug 14. 2019

결정

고작 두 달만에 내린 결정이었다

생각보다 새 팀으로 옮기는 프로세스의 진행은 더디었다. 서로의 핏이 잘 맞다고 생각된 이후 꽤나 적극적이었던 새 팀의 매니저 L의 이메일 답장 속도가 눈에 띄게 느려지고 있었다. 본사 출장 때 직접 대면하여 미팅한 이후 다시 취리히로 돌아간 매니저 L과는 이메일로 주로 커뮤니케이션을 이어갔는데, 다른 실무자인 P에게 나와의 후속 커뮤니케이션을 토스하고 본인은 거의 잠수인 상태. 처음부터 적극적으로 나온 L 때문에 나는 거의 이 팀이 나를 원하는 게 확실하고 이제 내가 결정만 하면 되는 문제인 것으로 생각했는데, 이는 착각이었다. 사실 매니저 L은 나 외에도 다른 여러 후보자들을 물색 중이었고 아직 누구를 선택할지는 결정하지 않은 상태였다.


처음에는 스위스에 있는 팀으로 옮기는 것에 대해 반신반의했다. 유럽 국가에서 잠시나마 살아보는 것은 물론 굉장히 흥미롭고 재미있는 경험이 될 거라는 생각은 있었지만, 어린 딸과 아내를 데리고 이제 막 정리된 미국에서의 안정적인 삶을 접고 모든 생활환경을 다시 바꾸는 것에 대한 부담이 컸었다. 하지만 인간은 간사한 존재라고 했던가? 새 팀을 찾아가는 상황이, 정확하게는 스위스로 이주할 수 있는 가능성을 만들어가는 과정이 생각만큼 수월해지지 않게 되자, 스위스에 대한 나의 열망이 이상하리만치 점점 커져갔다. 그전까지는 스위스 팀뿐만이 아니라 다른 몇몇 팀에도 관심을 가지고 가능성을 열어두었는데, 점점 스위스 팀과의 대화에 진척이 생기지 않게 되자 스위스 팀에 대한 집착 아닌 집착(?)이 커져감을 느꼈다.


“왠지 지금 이 기회를 놓치면, 앞으로 평생 스위스 같은 나라에서 살아볼 일은 없을 것 같아."



처음 본사에서 매니저 L을 만나 이야기한 후 한 달쯤 지났을 때, 그녀로부터 나를 포함한 총 3명의 후보자들 중 한 명을 주중에 최종 결정할 거라는 업데이트를 받았다. 그와 동시에 그녀는 회사 법률팀을 통해 나의 스위스 비자 취득 요건 충족 여부를 확실하게 알아달라고 부탁했다. 행여나 나를 선택했는데 법률적 혹은 신분적인 문제로 내가 스위스 비자를 받을 수 없는 상황이 되면 곤란해지기 때문이었다. 나는 그러노라고 이야기했고, 법률팀을 통해 6월부터 스위스에서 공식적으로 일을 시작할 수 있는 비자 취득이 가능하다는 확답을 받았다. 얼마 뒤, 매니저 L에게서 공식적으로 팀 트랜스퍼 및 비자 신청 프로세스를 시작하자고 연락이 왔다. 나를 새 팀 멤버로 뽑기로 결정한 모양이었다.


호기심과 흥미 그리고 동시에 의구심을 가지고 시작한 스위스 이주에 대한 ‘물음표'가 근 두 달만에 ‘느낌표'로 바뀌게 되었다. 사실상 회사 내에서 팀을 옮기는 과정이었고, 내 앞으로의 커리어뿐만이 아니라 나와 내 가족의 삶에 큰 영향을 주는 결정이었던 터라 꽤 스트레스를 받으며 얼른 결정이 났으면 좋겠다는 생각을 많이 했었다. 지나고 보니 이렇게도 큰 삶의 결정이었는데 고작 두 달만에 결정을 내렸다고 생각하니 이게 참 잘한 결정이 맞나 싶었다. 정말 엄청난 심사숙고를 통해서 내린 결정이 아니었던 건 사실이다. 20대 후반에 한국에서 다니던 회사를 그만두고, 유학 준비를 결심하고, 미국으로 대학원을 가기로 결정하고, 30대 초반에 지금의 아내와 결혼하기로 결정한 것과 같은 인생의 굵직굵직한 결정이 이번처럼 빠르고 가볍게 결정된 건 처음이 아닌가?


이사 준비가 본격적으로 진행되면서 이 생각은 더욱더 커져갔고, 더 큰 스트레스가 이내 찾아왔다. 스위스로 이주하기로 결정을 내리고, 회사에서도 공식적으로 팀 트랜스퍼 및 비자 신청 프로세스를 시작한 이후에도 한동안은 다른 나라로 이사를 간다는 실감이 나지 않았다. 스위스 비자 취득 프로세스가 보통 8-12주가 걸린다고 했는데 실제로 정확히 언제 비자가 나올지 장담할 수 없었기 때문에 당장 비행기 표를 구할 수가 없는 상황. 당장 정확히 떠나는 날이 안 정해진 상태가 지속되다 보니 내가 곧 미국을 떠나 스위스로 간다는 사실이 도무지 와 닿지 않았다. 하지만 비자 일정의 가닥이 조금씩 잡히면서 (미국 비자/영주권 절차도 이미 밟아본 경험을 비추어 봤을 때, 스위스 이민국의 업무 처리 속도는 미국 이민국과는 비교가 되지 않을 정도로 빨랐다.)  팀 트랜스퍼 일정의 구체화도 급물살을 타게 되었고, 동시에 우리 가족도 미국에서의 삶을 정리하고 이사 준비에 본격 돌입해야 하는 상황이 곧 오게 되었다.


“와 우리 이렇게까지 해서 왜 스위스로 가기로 한 거지? 기대도 너무 되긴 하지만, 진짜 빡세다..하하"


미국 생활 정리와 이사 준비는 생각했던 것보다 훨씬 어마어마했다. 월세로 살고 있는 집의 계약 수습부터 가구 및 생활 용품 처분, 이삿짐 업체 어레인지, 자동차 처분, 비행기 예매, 취리히 임시 숙소 어레인지, 미국 영주권 관련 서류 준비, 스위스 비자 서류 준비, 등등.. 신경 써야 할 것들이 한두 가지가 아니었고 이래저래 돈도 많이 들었다. 이 많은 일들을 아내와 애기를 데리고 짧은 기간 안에 처리하면서 과연 이렇게까지 해서 우리가 왜 스위스를 왜 가기로 한 걸까라는 후회 아닌 후회를 하기도 했다. 한편으로는 얼른 스위스에 가고 싶었다. 미국에서 정리할 것들이 너무 많다 보니 모든 걸 다 끝내고 얼른 스위스에 가 있었으면 하는 마음이었다.


겨우겨우 고생을 해가며 짐을 처분하다 보니 어느덧 이제 정말 스위스로 떠나는 날짜가 다가오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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