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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이상문 Aug 27. 2019

1. 유서

유서

겨우 30분만 늦었군. 현민이 도착하자 상진이 말했다. 버스가 막혀서. 괜찮아, 너 이 정도면 엄청나게 빨리 온 거야. 상진이 강조했다. 현민은 그 정도로 약속에 늦는 사람이었다. 그래서 그의 친구들은 그와 약속을 할 때, 항상 30분 정도 당겨서 시간을 정하고는 했다.


약속만 늦으면 모를까, 매사에 ‘왜 그러나’ 싶을 정도로 미루기도 잘하는 사람이었다. 상진은 농담으로 이러다 죽는 순간까지 유언도 미루지 않겠냐고 할 정도였다. 그 정도는 아니지. 현민이 손사래를 쳤다.


“확실히 그 정도는 아니야. 유언 정도는 미리미리 준비할 거라고. 때가 된다면.”


“그래, 아무리 너라도 그 정도는 아니겠지.”


상진이 웃으며 답했다.


이 말을 확일할 때는 너무 빨리 왔다. 2020년대, 지구는 멸망의 길로 들어갔다. 평화와 번영을 희망하던 사람들은 절망에 빠졌다. 혼란도 찾아왔다. 그러나 다행히도, 이성은 빠르게 돌아왔다. 거리는 다시 조용해졌다. 사람들은 각자의 방식으로 마무리를 준비하기 시작했다.


그 마무리를 즐기기에도 인류의 운명이 하루도 남지 않았다. 대부분 유서를 작성하고, 가족과 행복한 만찬을 즐겼다. 이때 현민은 책상에 펜을 들고 조용히 앉아있었다. 그는 아직도 유서를 작성하지 않았다. 생각은 유엔 사무총장의 발표 때부터 하고 있었다.


그러나 너무 많은 일이 있었다. 날뛰는 사람들 사이에서 몸을 지키고, 식량을 사수해야 했다. 가족과 친구와 인사를 해야 했다. 하느님에게 마지막 이후에도 보살펴 달라는 예배에도 참여해야 했다. 만일 가족들 사이에서 마지막은 각자 시간을 보내자고 하지 않았더라면 유서를 쓸 시간은 아예 나지 않았을 것이다.


현민은 오히려 시간이 남은 것이 기적이라고 생각했다. 그래 이렇게 많은 일이 있는데, 유서를 쓸 시간이 어디 있어? 지금이라도 쓰면 된다고. 현민은 마음을 가다듬고 A4용지와 연필을 꺼냈다. 팔짱을 끼고 무슨 내용을 쓸지 고민을 하기 시작했다.


그러다 문득 밑을 바라보니 연필이 신경 쓰이기 시작했다. 연필이 조금 뭉툭한데? 깎을까? 요란한 소리를 내며 그가 일어났다. 책장을 둘러보며 연필 깎기가 어디 있나 찾게 되었다. 그런데 유난히 그 날 따라 연필 깎기가 보이지 않았다.


“분명 이 쯤에 두었던 것 같은데.”


현민이 중얼거리며 책장을 뒤졌다. 이곳저곳을 뒤져보아도 연필 깎기는 보이지 않았다. 30분이 지났을 때야, ‘그럼 칼로 깎으면 되겠다.’라는 생각을 할 수 있었다. 현민은 다시 자리에 앉아 연필을 깎기 시작했다.


“저희는 지금 인류 마지막 방송을 전해드리고 있습니다.”


현민이 틀어놓은 비상용 라디오에서 아나운서의 말이 흘러나왔다. 서걱서걱. 연필은 금방 뾰족해졌다.언론인으로서 최후까지도 여러분께 소식을 전달하는 사명을 다하고 있습니다. 이제 쓰면 되겠다. 현민이 다시 연필을 들었다. 쓰레기 버려야지. 다시 연필을 책상에 내려놓으며 현민이 일어섰다. 연필 깎기의 잔해들을 휴지로 감싸 쓰레기통에 던졌다.


“마지막까지도 저희는 최선을 다하겠습니다.”


아나운서의 담담한 멘트가 끝났을 때, 던져진 휴지는 절망을 맞이했다. 휴지는 휴지통과 만나지 못했다. 바닥에 떨어진 휴지는 흑연 가루와 얇은 나무 조각을 토해냈다. 이런. 현민은 짧게 탄식하며 그것을 다시 휴지에 감싸 버렸다. 다시 앉으려는 찰나, 그의 눈이 휴지통 주변을 보고야 말았다.


좀 더럽지 않나? 이런 환경에서 최후의 글을 쓸 수 있을까? 현민의 뇌가 외쳤다. 그렇지. 현민이 자답했다. 방 청소가 시작되는 순간이었다. 그는 창문을 열었다. 바닥을 쓸고, 걸레질 했다. 책상을 닦았다.


“다 되었다.”


깨끗해진 방 안을 둘러보며 현민이 말했다. 실제로는 아무 차이도 없었다. 어제도 청소했으니, 당연한 결과였다. 여하튼 그는 방이 더 깨끗해졌다고 자부했다. 걸린 시간은 1시간 정도였다. 운석 충돌까지 17시간 30여 분가량 남았습니다. 현재 거리는 매우 차분합니다. 아나운서는 계속 소식을 전했다.


이제 진짜 써보자. 진지한 표정을 지으며 현민은 다시 의자에 앉았다. 제목은 뭐로 하면 좋을까. 연필을 든 현민이 고민에 빠졌다. 그러고 보니 유서의 내용은 생각한 적이 있어도,제목은 생각한 적이 없었다.


그저 유서라고 쓰면 되지 않느냐고 말할지도 모르겠다. 그러나 현민에게는 꽤 중요한 문제였다. 혹시나 후세대에 등장할 생명체가 자신의 유서를 발견했을 때 흥미를 끌어야 하지 않겠는가. 현민의 생각은 그랬다.


‘여기 종말을 맞이하는 인류의 마지막 전언을 남기며.’ 아니야. 너무 길어. 인류의 마지막 전언?그런데 내가 인류를 대표할 수 있나. 나 따위가. 나중에 인류의 대표로 남으면 창피하지 않을까. 인류의 명예를 위해서. 그건 아니지.


‘삶을 마치며’는 괜찮나? 진부하지 않나. 소사(小史)는 또 어떤가? 작은 역사. 그래 이거면 괜찮겠다.나의 소사. 이렇게 하자. 적당히 무게 있으면서도, 겸손해 보이는 제목으로 훌륭해.


현민이A4 용지 위에 ‘나의 소사’라고 적었다. 이제 운석 충돌까지 16시간 30분이 남았다. 종이는 빠르게 채워져 갔다. 일단 그는 자신의 짧은 인생에 대하여 간단히 정리했다. 다음 그에 대한 감상을 남기고, 고마웠던 사람들과 용서해야 할 사람들에 대해서 적었다. 마지막으로 자신이 어떤 사람으로 기억되고 싶은지 적었다.


‘하늘에서 다 같이 웃는 얼굴로 보았으면 좋겠습니다. 이현민.’


휴우. 현민은 고개를 돌려 시계를 보았다. 이제 14시간 정도가 남았습니다. 종말이 점점 다가오고 있습니다. 종말이 다가오고 있음에도, 아나운서의 어투는 여전히 차분했다. 좋아. 잘했어. 마지막까지 미루지는 않았군. 스스로를 칭찬했다. 이제 유서를 봉투에 넣고 책상에 올리기만 하면 된다. 다시 일어나서 서랍에 있는 봉투를 꺼내왔다.


‘법의 정신’


현민이 자리에 와서 유서를 넣으려고 할 때 눈은 잠시 그 책의 제목을 보았다. 법. 그래 지난 교양 시간 때 생활과 법률을 들었는데. 잠시 과거를 회상하기 시작했다. 특유의 미루기는 대학 수업이라고 해서 예외는 없었다.


지각을 자주 했다. 과제 제출은 마감 기한을 넘기는 것이 일상이었다. 성적은D였다. 좀 더 열심히 해볼걸. 현민이 한숨을 쉬었다. 하지만 이제 어쩔 수 없지. 유서라도 미루지 않은 것이 얼마나 다행이야? 현민은 자신을 위로했다.


그런데 만약에 인류가 전부 멸망하지 않으면 어떻게 될까. 갑자기 뇌가 말했다.어 그렇네. 만일 나만 죽고 유서는 남는다면 어떻게 될까.머리는 열심히 생각을 시작했다. 유서를 접던 손이 행동을 멈췄다. 스피노자는 내일 지구가 멸망한다고 해도 내일 사과나무를 심겠다고 했습니다. 다행히도 인류는 그런 여유를 찾은 것 같습니다.


만일 그렇다면. 현민이 중얼거렸다. 유서가 남은 사람들 손에 들어갈 텐데. 아 그럼 이런 내용을 보여줘도 될까. 더욱이. 그의 뇌가 강조했다. 국가 기능이 회복되지 않을까. 그렇네.


“그럼, 법률 형식에 맞춰서 써야지!”


현민이 내린 결론이었다. 어차피 죽을 것이 확실했지만, 만약을 위해 그것도 나쁜 선택이 아니라고 생각이 들었다. 법률 형식에 맞춰서 유서를 다시 쓰자.


이미 내용은 있으니까 시간은 많이 안 걸릴 거야! 조금만 더 수고하자고 자신에게 파이팅을 외쳤다. 각 가정집에서는 사람들이 옹기종기 모여 서로 간의 나쁜 감정들을 털고 있습니다. 그것마저 끝난 사람들은 조용히 마지막을 기다릴 뿐입니다.


문제는 현민이 법정 형식에 맞춘 유서를 어떻게 쓰는지 모른다는 데 있었다. 인터넷도 되지 않는 상황, 물어볼 사람도 없었다. 어떻게 하지. 현민은 눈을 감고 고뇌에 빠졌다. 생활과 법률. 현민은 그 단어를 다시 기억해냈다.


그래. 그 때 수업 시간 때 유언과 관련된 내용이 있었던 것 같아! 현민은 그것을 생각해 낸 자신이 자랑스러워 스스로의 머리를 쓰다듬었다. 강의안이 어디 있지? 여기 있었던 것 같은데. 현민이 다시 일어서 책장을 뒤적거렸다. 이제 12시간 남았습니다. 인류가 만든 시간이라는 개념도 이제 12시간만 지나면 최후를 맞이하는 것입니다.


기억은 쉽게 했으나, 찾는 것은 상당히 어려웠다. 한참을 찾다가 포기하려고 할 즈음에야 겨우 구석에 처박혀 있던 강의안을 찾을 수 있었다. 다행이다. 현민은 이 상황을 긍정적으로 여기기로 했다. 하느님이 그래도 ‘나의 소사’를 완성하기 위해 도움을 주시는구나. 짧게 감사 기도를 올린 후 다시 자리에 앉았다.


‘12과. 유언과 상속’


현민이 강의안을 펼쳤다. 강의안에는 유언의 종류와 방식 그리고 상속의 방법과 유류분 따위에 대해서 적혀있었다. 현민은 꼼꼼히 강의안을 읽었다. 사람이 죽고서도 법률 효과를 남길 수 있는 행위에는 무엇이 있을까요. 당연히 유언이지. 현민이 강의안의 질문에 답했다. 유언의 종류에는 자필 유언, 녹음 유언, 유언 공증, 비밀 유언, 구수 증서에 의한 유언이 있다. 이거 기말고사 1번이었는데.


현민이 아쉬운 표정을 지었다. 시험장에 지각하느라 답안지를 대충 써서 제출했는데, 달려와서 숨이 가쁜 나머지 1번 문제를 적지 못하고 패스했기 때문이었다. 답은 알고 있었지만, 다른 긴 답안부터 쓰는 것을 중요시하다가 시험 시간이 끝나고 말았다. 정시에 도착했다면 일어나지 않을 일이었다. 정확히 11시간 30분 남았습니다. 저희는 지금도 이곳에서 여러분에게 지구 최후의 소식을 전해드리고 있습니다.


방송이 현민의 귀에 계속해서 박혔다. 시간이 얼마 남지 않았다. 이제는 정말 써야 한다. 현민은 펜을 들었다. 그리고 형식에 맞추어 유서를 작성하기 시작했다. 한 줄씩, 정성스럽게 또박또박 글자들이 흰 종이 위에 적혀지기 시작했다.


“저는 이런 제 삶이 행복하다고 생각합니다.”라고 적는 순간이었다. 정확하게는 현민이 ‘저’를 쓰고 ‘행복’이라는 글자를 적기 시작할 때였다. 종이의 글자가 갑자기 괴이해졌다. ‘행’까지는 그럭저럭 봐줄만한 수준이었으나 ‘복’의 ‘ㅂ’자부터 글씨가 삐뚤어지기 시작하더니 ‘ㄱ’을 쓸 때에는 도저히 무슨 글자를 썼는지 알아보기 어려웠다.


곧이어 쿵 하는 소리와 함께 연필이 책상 아래로 떨어졌다.현민은 고개를 숙이고 있었다. 유서는 더는 작성되지 않았다. 종이 위에는 현민의 입에서 나온 액체들이 조금씩 스며 들어가기 시작했다.


“11시간 남았습니다. 저희는 지금까지 흘러온 인류의 역사에 대해서 생각합니다.”


아나운서가 말했다.


“수치상으로 한 개인에게 인류의 역사란 엄청나게 긴 것입니다. 그러나 지구의 입장에서는, 우주의 입장에서는 그럴까요? 아주 짧은 기간일 것입니다. 그 기간 동안에 우리는 어떻게 살아왔습니까. 거대한 진보를 이룩했습니다. 문명은 찬란하게 빛났습니다.”


코 고는 소리가 아나운서의 말에 참견했으나 아나운서는 개의치 않고 계속 멘트를 이어갔다.


“하지만 그 문명은 우리 인류의 문제를 최종적으로 해결하지 못했습니다. 우리는 지구 입장에서 볼 때 아주 짧은 기간 사이에 서로 화해조차 하지 못했습니다. 세계 대부분의 나라는 운석이 충돌할 때가 되어서야 화해하는 시늉만 했을 뿐입니다. 그것마저 국가가 무너진 이후에는 아무것도 아니게 되었습니다. 국가 사이의 화해는 실패로 끝났습니다. 개인끼리는 어떨까요? 여러분은 화해하고 계십니까? 용서하고 계십니까? 아니면 혼자서라도 자신의 죄를 뉘우치고 계십니까? 이제 정말 시간이 얼마 남지 않았습니다.”


현민의 코 고는 소리는 계속 방안에 울려 퍼졌다. 아나운서는 멘트를 마치고 음악을 내보냈다. 방 안에는 코골이와 클래식 음악 소리가 조화를 이루며 새로운 음악을 만들어냈다. 현민의 소사는 침으로 물들어서, 그나마 형체까지는 알아볼 수 있었던 ‘행’이라는 글자도 번져서 무슨 글자인지 알아볼 수 없게 되었다.


“3시간 남았습니다.”


현민이 깨었을 때, 아나운서가 말했다. 현민은 멍한 표정으로 잠시 주변을 둘러보았다. 아 3시간이나 남았구나.


“3시간…. 3시간…!!!”


그는 일어난 지 10분째가 되어서야, 그 3시간이 운석 충돌까지 남은 시간임을 깨닫게 되었다. 하지만 ‘나의 소사’는 침으로 엉망이 된 상태였다. 현민은 한숨을 쉬었다. 어쩌다가 자버렸을까. 본인도 알 수 없었다. 하지만 이제 정말로 시간이 얼마 남지 않았다. 후회보다는 어서 빨리 ‘나의 소사’를 끝내야 했다.


현민은 종이를 꺼내 다시 유서를 옮겨 적기 시작했다. 최대한 빠른 속도로, 하지만 그러면서도 혹시 누가 볼지 모르니 깨끗한 글씨로 그는 자신 인생의 마지막 작문을 진행했다. 종이는 다시 깔끔한 글씨들로 채워지기 시작했다.


“저는 이런 제 삶이 행복하다고 생각합니다.” 이번에도 다시 여기까지 왔다. 다시 졸지 말자. 현민은 다짐했다.하지만 자고 일어나자마자 이렇게 에너지를 소비하다 보니 현민은 피곤하다는 생각이 들었다. 무언가 보충할 필요를 느꼈다.


무엇이 좋을까? 현민이 눈을 감고 생각을 시작했다. 커피를 마실까. 주스를 마실까. 지금 그의 집에 남은 음료의 전부였다. 커피는 쓰니까 잠을 깨는 데 효과적이지. 더욱이 카페인도 그렇고. 그럼 커피로 정할까. 현민이 일어나서 커피를 가지러 가기로 했다.


“하지만”


그의 머릿속에서 다른 목소리가 말했다. 지구가 멸망한다는 데 마지막이니까, 좀 더 맛있는 걸 마시지 그래. 그런가. 그래. 현민이 커피를 찾으러 가다 말고 멈추어 섰다. 커피냐 주스냐 머릿속에서는 논쟁이 끊이지 않았다.


“1시간이면 이제 모든 것이 끝납니다.”


“오, 이런.”


아나운서의 멘트가 논쟁을 재빨리 종료시켰다. 현민은 음료수는 포기하고 ‘나의 소사’를 마저 완성하기로 했다. 다시 자리에 와서 유서 작성 현황을 점검했다. 이제 몇 문단만 더 쓰면 된다. 평소 속도대로 하면 15분 정도가 남을 것이다. 보관까지 하면 10분 남을 것이다.그래도 침대에 누워서 종말을 맞이할 시간은 충분히 확보된다.


현민은 안도의 한숨을 쉬고 다시 유서 쓰기에 열중하기 시작했다. 30분. 30분입니다. 아나운서는 여전히 차분히 말했다. 현민도 조금 전에 비해 차분해졌다. 자신의 쥐꼬리만 한 재산에 대한 이야기를 마치고, 이제 마무리만 하면 되었기 때문이었다.


“이제 저는 제 짧은….”


그 순간 현민은 펜을 책상 아무 곳에다 던져 놓고 급히 일어났다. 현민의 방문이 쾅 하는 소리와 함께 닫혔다. 현민은 아무 생각도 하지 않고 화장실로 달려갔다. 그리고서 그는 곧 변기 위에 앉아 마지막 배설물을 뱉어내기 시작했다.


“하마터면 못 참을 뻔했네.”


현민은 기특한 자신을 스스로 칭찬해주었다. 그러나 그에게는 아직 할 일이 남아있었다. 그는 어서 그 일을 해결해야 했다.


“10분 남았습니다. 이제 저희도 방송을 마치고 최후의 순간을 맞이하려고 합니다. 청취자 여러분, 지금까지 들어주셔서 감사합니다.”


현민이 방 안으로 들어가자 아나운서는 이 말을 마지막으로 더는 멘트를 하지 않았다. 라디오에서는 지지직거리는 소리만이 시끄럽게 울려 퍼졌다. 현민은 재빠르게 의자에 앉아, ‘나의 소사’ 마지막 문단을 마무리하기 시작했다.


시간이 없어. 빠르게 쓰자. 현민의 손이 빠르게 움직였다. 하지만 아주 빠르지는 않았다. 그동안 깨끗하게 쓴 글씨들 뒤에 갈겨 쓴 글씨들을 놓는 것은 더 싫었기 때문이었다. 5분. 이제 7줄만 더 쓰면 되었다. 아직 승산이 있었다.


그러나 글씨에 신경 쓰느라 3문장을 남겨놓고3분밖에 남지 않은 상황이었다. 현민은 그 사실을 모르고 있었다. 그에게는 시계도 없었고, 시간을 알려주는 인류 최후의 방송도 이제 들을 수 없었기 때문이었다.


“저는 이제 이 말로 제 삶을 마무리하려고 합니다.”


1문장밖에 남지 않았다. 거리에서 비명이 들려오기 시작했다. 창문은 점점 크게 떨리기 시작했다. 하늘에서는 두 개의 태양 중 하나가 점점 커지는 모습을 관찰 할 수 있었다.


잠시 아프게 일한 손을 들고 기지개를 켰다. 좋아 이제 ‘감사합니다.’만 쓰면 된다고. 현민은 아슬아슬하게 마친 자신이 대견했다.


현민이 다시 연필을 들었다. 그리고 곧 그의 방이 환하게 밝아졌다. 현민은 자신의 방을 환하게 비친 빛을 바라보았다. 그것은 잠시뿐이었다. 곧 그는 아무것도 볼 수 없었고, 쓸 수도 없었다.


‘나의 소사’는 단 5글자를 남기고 완성되지 못했다. 더욱이 흔적마저 말끔하게 사라졌다. 하지만 현민의 인생에서 가장 일을 미루지 않고 이렇게까지 제시간에 맞춰 거의 일을 완성한 것은 매우 드문 일이었다. 다시 갱신될 일은 없겠지만, 이번이 10번째였다.


-fin.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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