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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클로이 Jan 30. 2022

100개의 영화 단상 4. 찬실이는 복도 많지

찬실이는 복도 많지(2020)


*스포일러가 있습니다.



  다 망했네, 아주 망했어.


  그런 생각이 명징하게 들 때가 오히려 모든 걸 내려놓고 초연하게 삶을 다시 꾸려갈 수 있는 기회일 수도 있다. 아닐 수도 있고. 더 꼬일 수도 있고 더 절망할 수도 있다. 그래도 여전히 살아있음을 느끼게 하는 사건들이, 대단한 것은 아니어도 소소하게 삶에 흐른다면, 복이 많은 편일 것이다.

  인생이 다 꼬인 것 같은 때, 나도 모르는 새에 인생 제2막, 3막이 펼쳐지기도 한다. 2막, 3막에서마저 잘 안 풀려도 괜찮다. 우리의 삶은 잘 짜인 연극이 아니라, 하루하루 어떻게든 살아내 보려고 잘해보려고 애를 쓰는 가운데 생기는 무작위의 사건들로 구성된 매일이니까. 엉망진창일 수도 있고, 어떻게 이럴 수가 있냐 싶을 정도로 기대한 대로 흘러가지 않을 수도 있다. 오래간만에 안기고 싶던 남자가 나랑 취향이 너무 다르고 잘 될 것 같던 연애가 생각처럼 잘 풀리지 않고 쪽팔린 일만 생겨도 괜찮다. 별것 아닌 것 같은 순간들, 사람들, 사건들을 사랑하는 사람은 자신이 별것 아닌 것 같은 순간에도 스스로를 잘 다독인다. 좀 서글퍼도, 나름대로 씩씩하고 다정하게.

  갑자기 일이 끊겨 허망할 때 나 스스로에 대해 깊이깊이 생각하게 된다. 깊이깊이 고민하지 않아서 잘 사는 사람도 있다.(근심 소에 피할 피.) 각자의 방식대로 우리는 별 것 아닌 것 같고 그리 대단치 않은 것 같은 삶을, 사실은 대단하고 복도 많게 살아간다. 생긴 대로 사는 것이다. 소소한 삶 속에 축복이 가득하다는 것을 제삼자의 입장에서 다정한 마음으로 들여다보면 알 수가 있다.

  

  아끼는 사람들과 달밤에 함께 걸으며 뒤에서 후레쉬를 비춰주고, 주인집 할머니의 시 짓기 숙제를 도와주며 밝은 달에 아끼던 소원을 비는 찬실씨는 정말 복도 많다. 아무도 그렇게 말 안 하고 찬실씨도 그렇게 생각 안 할지도 모르지만 찬실씨는 정말 복도 많지. 마흔까지 일을 열심히 할 수 있었다는 게. 좋은 사람들이 곁에 있다는 게. 우주에서 응원하는 장국영을 만났다는 게. 휘영청, 밝은 달이 그렇게 잘 보이는 집에 산다는 게. 주인집 할머니랑 같이 밥도 먹고 운동도 하고 할머니가 투박하게 지은 시에 펑펑 울고 위로받을 수 있다는 게. <동경 이야기> 같은 영화가 가진 가치를 알고 설명할 수 있는 사람이라는 게. 원하는 게 뭔지 깊이깊이 생각해 볼 시간을 가질 수 있다는 게. 설레게 하는 남자를 만나서 꿈도 꾸고 길을 걷고 데이트를 하고 고백했다가 차인 남자랑도 친구로 오래오래 잘 지낸다는 게.

  일도 없고 돈도 없고 남자도 없고 새끼도 없고 홀로 오롯이 씩씩하게 살 수 있다는 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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