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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atti Oct 19. 2020

곁을 내주어 고마운 존재들.

사람 1, 강아지 1, 화분 3에게.

"너희가 처음 인사 오기 바로 전에 알로에 나무에 꽃이 피었어. 우리 집에 행운이 오려나, 하고 설렜는데 선물처럼 네가 온 거 있지."


결혼하고 세 달쯤 지났을까, 처음 맞는 명절에 방문한 시댁에서 어머님이 내 손을 끌고 베란다로 나가셨다. 정확히 기억나지는 않지만, 커다란 알로에 화분 속 알로에 줄기 끝에 바나나 송이 같은 꽃이 피어있었다. 알로에가 심어져 있는 화분에 클로버도 몇 개 있는데 거기에 네 잎 클로버도 피었다며, 아무래도 우리 아가가 복이 많아 이렇게 좋은 일들이 생기는 것 같다 아이처럼 웃으시던 어머님.



그리고 몇 달 뒤, 남편과 밖에서 한잔 하고 집에 들어와 술이 좀 모자란 느낌에 맥주를 마시고 있는데 입이 궁금한 거였다. 늦은 밤이라 무거운 안주는 부담스럽기에 에어프라이어에 간단하게 고구마 몇 개를 돌려 먹기로 했다. 그렇게 고구마가 구워질 동안 맥주 한 캔을 비웠고, 부쩍 오른 취기 덕에 부주의해진 나는 결국 고구마를 꺼내다가 그만 손목을 데었다. 당시에는 살짝 화끈거린다는 느낌만 들었기에 오빠 이거 봐! 하고 빨개진 자국을 보며 주며 웃었는데, 다음날 일어나 보니 손목 안쪽에 선명하게 데인 흉터가 죽 그어져 있는 거 아닌가.


며칠 뒤 방문한 시댁에서 그 흉터를 본 어머님께서는 "그런 건 네가 했어야지!" 하고 단박에 남편을 타박하시더니 곧장 베란다로 가서 알로에 줄기 하나를 끊어오셨다. 질긴 겉껍질을 벗겨 투명하고 미끈한 속을 잘게 잘라 거즈에 올린 뒤 환부에 붙여 주시고는, "앞으로는 네가 하지 말고 오빠 시키렴."하고 속삭이셨다. 그리고 그날 집으로 돌아가려는 우리 손에 들려주신, 꽃이 핀 알로에 옆에 있던 또 다른 알로에 화분 하나.





이 녀석이다. 걱정해주시는 마음에 주신 거라 거절하기도 뭐해 덜컥 받아왔지만, 자칭 타칭 연쇄(식물) 살인마인 나는 이렇게 큰 화분은 키워본 적이 없어 슬쩍 겁이 났다. 어머님께서 아끼며 기르시던 알로에인데 죽이면 어쩌나, 나는 쪼만한 선인장도 죽이는 사람인데.



하지만 알로에는 2년이 지난 지금까지도 잘 살아주고(?) 있다. 정말 알로에의 존재를 잊을 때쯤 물 한번 주는 게 다인데 좁은 화분 안에서 뭘 먹고 저리 쑥쑥 자라는지 날이 갈수록 몸집이 점점 커지는 통에, 얼마 전 마사토를 잔뜩 사다가 큰 화분으로 옮겨주었다. 난생처음 해본 분갈이였다. 인터넷에 '알로에 화분 분갈이'를 검색하고, 흙을 사러 가고, 그 무거운 흙들을 이고 지고 와서 커다란 화분에 순서대로 속을 채우다니. 식물이 있으면 벌레가 꼬인다고 늘 멀리하던 내가 화분 분갈이를 하다니.  

나이가 들면 식물이 좋아지고, 길가에 핀 작은 꽃 하나도 그리 기특하고 대견하게 느껴진다던데 나는 그 시기가 꽤(?) 빨리 온 것 같다. 요즘은 아스팔트 사이에 올라온 잡초 한줄기만 봐도 주책맞게 괜히 마음이 찡하다.





부담스러운 증명사진

세상을 살며 어느 하나 당연한 것 없었던 내 곁에도 어느새 함께해주는 생명이 하나 둘 생기더니 이젠 꽤 많아졌다. 약 10년 전, 그 좁디좁은 원룸에서부터 지금까지 내게 체온을 나눠준 우리 집 터줏대감 강아지 A, 늘 가족에게 채찍 대신 당근만 듬뿍 주는 든든한(건강은 덜 든든한) 오빠, 얼마 전 집들이 선물로 받은 산세베리아 화분 하나와 스투키 화분 하나에 어머님의 알로에까지. 이 작은 집 안에서, 각자의 자리에서 잘 살아 주어서. 내게 곁을 내주어서 참 고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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