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atti Oct 06. 2020

프로 불편러로 산다는 것

다름이 불편하신가요.



난 어릴 때부터 호불호에 대한 주장이 유독 강하고 취향이 확실했다. 학창 시절에도 좋아하는 가수, 노래에 대한 취향이 친구들과는 조금 다른 방향으로 확실했고, 20대에는 옷을 고를 때 일정한 기준 없이 그저 디자인이 내 맘에 든다고 생각되면 덜컥 사서 입는 통에 '가끔씩 특이한 옷을 입는 애' 취급을 받기도 했었다. 대충 다들 이렇게 사는 줄 알았고, 남들과 다르다고 해서 딱히 불편하거나 불안함을 느낀 적은 없었다.



그렇지만 회사생활은 달랐다. 학창 시절까지는 내가 무슨 옷을 입건, 무슨 이야기를 하건 누구를 좋아하던 그게 친구들이 생각하는 평범한 취향과 다르다고 해도 문제가 될 게 없었다. 오히려 눈치가 없는 거였는지는 몰라도 나 스스로도 전혀 아무렇지 않게 생각한 덕분에 자기 취향이 확실한 애로 그냥저냥 잘 지냈는데, 회사를 다녀보니 웬걸. 정말 사소하게는 옷차림부터 정치 성향, 심지어는 점심 메뉴까지 기호에 대한 암묵적인 룰이 설정되어 있었다. 심한 곳은 반대되는 자기 성향을 얘기하는 직원을 불편해하며 그들을 '별종'으로 분류하기도 했다.





"뭐 뭐 씨. 그런 옷은 회사에는 조금 안 어울리지 않아요?"라거나, "뭐 뭐 씨는 요즘애들 답지 않게 아이돌을 안 좋아해서 참 신기해. 이승환은 아빠뻘인데 뭐가 좋아요?"라는 둥의 내 취향을 누군가 평가하는 말을(보통은 낮추는) 하루에 한 번은 꼭 듣고 살다 보니, 사회 초년생이었던 나는 점점 나 자신에게 의문을 갖게 되었다. '내가 아직 회사생활을 오래 해보질 않아서 어떤 옷을 입어야 하는지를 아직 잘 모르는구나.'라고 생각하거나, 메뉴를 통일해야 음식이 빨리 나온다고 은연중에 압박하는 과장의 말을 따라 평소에는 먹지도 않는 자장면을 시키고는 반 이상 남기거나 하면서.



그렇지만 고나리질을 뱉은 사람이 아닌, 나 자신에게로 화살을 돌리며 사는데 생활이 멀쩡하게 돌아갈 리가 없었다. 늘 또 내가 튀는 건 아닐지 말 한마디 하는 것도 끊임없이 스스로 검열을 해댔고, 늘 머릿속엔 생각이 많았다. 머지않아 새 직원이 들어왔고, 그 신입 직원 또한 '튀지 않는'직원으로 미리 다져놓기 위해 내게 했던 것과 똑같은 루틴으로 접근하는 모습을 보며 그제야 나는 깨달았다. '취향이 다른 것'이 잘못된 게 아니라, '왜 너는 다르냐고 되묻는 것'이 잘못된 것이었음을.




그런 사회 초년생 시절을 보내며, '불편해하는 사람을 불편해하기 위해' 많은 노력을 했다. 이제는 스스로를 의심하기 전에, 상대가 취하는 태도에 대해 다시 한번 생각을 해보도록 말이다. 서로가 다를 수 있는데 저 사람은 그것을 기본적으로 이해하고 말하는 것인지. 아니면 이 자리에서 단순히 자신의 생각을 이야기하고 있는 척하면서 사실은 자신이 옳다고 믿는 어떤 것을 설파할 목적으로 마주 앉은 사람의 취향을 무시하고 있는 것은 아닌지. 그렇다면 그런 대화의 기본적인 태도도 갖추지 않은 사람이 한 말에 내가 상처 받고 영향을 받을 필요가 있는지.




이렇게 비판적으로 생각하다 보면 어느샌가 스스로가 프로 불편러처럼 느껴지기도 한다. 프로 불편러에게 누군가가 자신의 생각과 취향을 '내 생각이 맞다.'고 말하며 동의를 구하기 시작하면 상대를 점점 더 불편해다가, 종국에는 상대와의 관계를 이대로 지속할 것인지를 고민하게 된다. 내가 불편해하는 부분은 '자신의 생각이 정답이라고 말하며 내게 강요하는 것'밖에는 없는데, 실제로 세상을 살다 보면 저런 행동을 하는 사람을 생각보다 꽤 많이 만나게 되고, 의도치 않게 꽤 자주 불편해진다.




"나는 다른 생각을 가지고 있어."라고 말한 상대 앞에서, 상반되는 자신의 의견을 계속해서 이야기하며 상대가 설득당하길 바라는 행동은 상대를 불편하게 만드는 것이며 굳이 그럴 필요가 없는 일이다. 그랬구나, 너는 그렇게 생각하는구나. 하고 말면 된다. 물론 명백하게 윤리적 문제가 없는 사안에 한해서.

그러나 이후에도 몇 번이나 같은 상황이 반복된다면 그때부터는 나도 이제 자기 검열을 멈추고 비슷한 수준으로 응수할 때도 있다. 대개는 내가 말을 아끼며 참다가 결국엔 폭발하는 때다. 하지만 똑같이 응수하고 난 후의 뒷맛이 생각보다 상쾌하지만은 않다. 정말이지 대화라는 게 자신의 생각을 말하는 것에서 그칠 수는 없는 걸까. 왜 꼭 상대의 동의를 구하고, 자신의 의견과 다른 상대의 의견이 틀렸음을 구태여 증명하고 싶어 하는 건지 도대체가 모를 일이다. 아아. 글을 쓰다 보니 또 불편해진다.







가끔은 불편해하며 사는 게 나를 더 불편하게 만드는 건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들 때도 있다. 하지만 반복된 고민의 끝은 항상 '그래도 내가 무엇을 불편해하는지, 어떤 말을 듣기 싫어하는지를 정확히 알고 사는 편이 훨씬 낫다'고 마무리된다. 편한 사람, 나와 마음이 맞는 사람은 뜻이 같은 사람이 아니라, '자신의 뜻을 내게 강요하지 않는 사람'이다. 서로 강요하지만 않는다면 나와 뜻이 다른 사람과도 충분히 잘 지낼 수 있다. 어쨌든 이렇게 불편함에서 오는 불편함을 감수하면서, 사람들과의 거리를 조절하며 살다 보면 결국엔 나와 맞는 사람들이 주변에 남지 않을까. 좋아하는 사람들로만 주변을 채우며 살아도 모자란 시간들이다.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