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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봄뫼여울 Mar 01. 2023

주왕산과 주산지

봄, 여름, 가을, 겨울 그리고 가을

역시나 이번에도 너무 늦어 버렸다. 제대로 된 주왕산의 단풍을 즐기려면 10월 말, 늦어도 11월 초순을 넘겨서는 안 될 것 같다. 늘 그렇듯 단풍이 절정을 이룰 무렵이면 주말, 평일을 가리지 않고 몰려드는 행락객으로 인산인해를 이룰 게 뻔하다.


이런 번잡(煩雜)함이 싫어 조금 이르거나, 혹은 조금 늦은 시기를 찾다 보니 늘 아쉬움이 남는다. 어차피 모두를 다 가질 수는 없으니, 하나를 잃는다 해서 너무 아쉬워할 일도 아니겠지만 사람의 욕심이란 것이 또 그런가.


꿀맛 같은 단잠의 유혹을 물리치고 새벽 일찍부터 서둘렀지만 벌써 대전사 앞마당은 형형색색의 등산복으로 차려입은 산행객들로 가득 찼다. 모처럼 안개 자욱한 주왕산의 고즈넉함을 홀로 누려볼까 했던 기대는 언감생심(焉敢生心) 이었나 보다.

주왕산은 정상의 높이가 720m에 불과하지만 주변에 1,000m 가까운 태행산, 대둔산, 왕거암 등의 산들이 말발굽처럼 이어져 위풍당당한 모습을 자랑한다. 우리나라 3대 암산으로 손꼽히는 아름다움을 간직하고 있어 1976년에는 열두 번째 국립공원으로 지정되었다. 경북 청송군 주왕산면을 중심으로 진보면, 영덕군 지품면과 달산면에 걸쳐 있다. 주왕산에서만 자생한다고 알려진 둥근잎꿩의비름과 천연기념물 제324호인 솔부엉이를 국립공원 깃대종으로 삼고 있다.


주왕산 오르는 초입에 있는 대전사는 그리 크지 않은 절이지만, 주왕산의 기암과 어우러지는 아담한 산사의 모습이 참 아름답다. 보고 또 봐도 질리지 않는 모습이다. 제아무리 아름다운 것도 여러 번 접하다 보면 쉬 식상해지기 마련인데도 늘 같은 듯하면서도 매번 조금씩 다른 느낌을 주는 것이 주왕산과 대전사의 진면목이 아닌가 싶다.

대전사는 조계종 제10교구 본사인 은해사에 딸린 말사로 신라 문무왕 12년(672)에 의상대사가 창건했다는 설과 그보다 한참 뒤인 고려 초기에 눌옹 스님이 세웠다는 설이 있다. 절이 놓여 있는 주왕산의 이름과 절의 이름 모두 주왕 설화에서 유래한다.


『주왕내기(周王內記)』라는 책에 다음과 같은 기록이 전한다. 중국 당나라에 살던 주도(周鍍)가 스스로를 후주천왕(後周天王)이라 하고는 군사를 일으켰으나 크게 패하고는 주왕산으로 숨어들었다. 당나라가 주왕을 없애 달라 부탁하자 신라 조정에서 마일성 장군 오형제를 보내 주왕을 죽였다는 이야기다. 그래서 주왕이 숨었던 산을 주왕산(周王山)이라 하고, 주왕의 아들 대전도군(大典道君)의 이름을 따서 절의 이름을 대전사라 하였다는 것이다. 신라의 주원왕(周元王)이 수도했던 산이라서 주왕산이라고 부른다는 설도 있다.


작은 절이라 전각도 그리 많지 않다. 보광전(普光殿)과 명부전, 산령각, 요사채 등이 주왕산 기암 아래의 여백을 채우고 있다. 정면 3칸의 다포계 맞배지붕 건물인 보광전 안에는 임진왜란 당시 명나라 장군 이여송(李如松)이 유정대사에게 보냈다는 친필 서신을 목판으로 음각한 것이 보관되어 있다.


절 오른쪽 밭에는 우물을 메운 자리가 남아 있는데 여기에도 재미있는 옛 이야기가 전한다. 본래 부처님께 올리는 물을 매일 냇가까지 가서 길어오곤 하였는데 이를 귀찮게 여긴 승려들이 조선 중기에 앞뜰에 우물을 파고 그 물을 청수(淸水)로 사용하였다고 한다. 그러자 곧 불이 나서 전각이 불에 타고 말았다.


뒷날 한 도인이 와서 “절의 지세(地勢)가 배가 바다에 떠서 다니는 부선형(浮船形)인데 우물을 팠으니 마치 배 바닥에 구멍을 낸 것과 마찬가지”라며 불이 난 이유를 설명했다. 결국 우물은 메워졌고 스님들은 냇가로 물을 길러 다녀야 했다는 이야기다.


절이 놓인 자리가 참 좋다. 조금은 분주하고 번잡한 절 앞의 식당가를 지나 표를 끊고 절에 들어서면 주왕산의 상징과도 같은 기암이 우뚝 서 맞아준다. 정상에 오르려는 사람들은 바쁜 걸음을 재촉한다. 절의 넓은 마당은 여유로운 사람들의 차지다. 느린 걸음으로 절의 구석구석을 살펴보기도 하고, 그림 같은 풍경에 잠시 빠져들기도 한다. 가을이면 은행나무의 샛노란 이파리들이 비처럼 흩날리는 모습이 황홀한 장관(壯觀)을 이룬다.

충분히 즐겼으니 걸음을 옮겨본다. 이번에도 급수대와 시루봉, 학소대를 거쳐 제1폭포인 용추폭포에 이르는 평탄한 길을 선택했다. 아름다움으로 치자면 어느 산에도 뒤지지 않을 주왕산의 단풍은 이미 절정(絶頂)을 지나 버렸다. 그래도 안개 속에 묻힌 계곡과 기암들의 모습만으로도 주왕산을 찾은 이들을 달래주기에는 충분할 것 같다.


산을 좋아하는 사람들이 많이 찾다보니 여러 탐방코스를 만들어 놓았다. 가메봉코스는 길이는 짧지만 가장 험난하고 고되기로 유명하다. 산행 끝에 오른 가메봉에서 주변의 풍경을 둘러보고 있으면 모든 걱정과 근심거리가 사라진다고들 한다. 주왕계곡코스는 가족 단위의 산행객들이 비교적 편하게 즐길 수 있어 가장 많이 찾는 구간이다. 계곡을 따라 오르다 보면 용추, 절구, 용연폭포의 시원한 물줄기를 감상할 수 있고, 그 길의 끝에 당도하면 오래전 사람들이 살았던 내원동이 나온다. 이 구간 외에도 주봉코스, 절골코스, 월외코스 등 모두 일곱 탐방로를 조성해 놓아 각자의 시간과 체력을 고려해 ‘골라 걷는’ 재미가 있다.


오랜 가뭄 때문인지 계곡의 물이 많이 줄었다. 한여름 시원스럽게 물줄기를 쏟아부었던 용추폭포도 그 세찬 물소리가 잦아든 느낌이다. 폭포에 당도하니 새벽안개 사이로 비친 햇빛 덕분에 가을 단풍이 제법 울긋불긋한 맛이 난다. 정상 도전은 또다시 다음으로 미루고 주산지를 향해 발걸음을 옮겨본다.


봄, 여름, 가을, 겨울마다 다양한 아름다움이 따로 있지만 역시 그중 제일은 가을의 주산지 풍경이 아닐까 싶다. 이른 새벽 물안개가 피어오르는 주산지에 형형색색 붉게 타오른 단풍이 비친 모습은 환상적이기까지 하다. 그 아름다움을 맛보기 위해 사람들은 몇 시간을 달려 이른 새벽부터 이곳을 찾아오는 수고를 마다하지 않는 것이다.


단풍이 물들면 용이 승천(昇天)한다는 전설이 전해지는 주왕산 별바위, 파란 하늘과 울긋불긋 불타오르는 울창한 숲이 배경을 이루는 주산지는 자연이 주는 선물이다. 계곡을 따라 불어오는 바람이 버드나무 가지를 흔들며 내는 소리가 어우러져 환상적인 분위기를 만들어 낸다. 이런 날에 주산지를 느릿느릿 걸어보면 선계(仙界)가 따로 있지 않음을 느끼곤 한다.


주산지의 신비로움은 물에 잠긴 채 오랜 세월을 버티고 있는 왕버들 고목이다. 국내 30여 종의 버드나무 중 가장 으뜸으로 꼽히는 왕버들은 숲속에서 다른 나무와 경쟁하지 않고 아예 호숫가를 비롯한 물 많은 곳을 택해 자란다고 한다. 나무는 습(濕)한 곳을 피하는 법인데 아예 물속에 뿌리를 내리고 사는 것 또한 왕버들 나름의 생존전략(生存戰略)이라 할 수 있겠다.


주산지는 조선 숙종 때인 1720년에 축조(築造)를 시작하여 이듬해인 경종 때 완공되었다고 한다. 이후 한 번도 바닥을 드러내지 않을 정도로 주변 농경지의 용수 공급원으로 그 역할을 지금도 계속하고 있다. 물에 잠긴 왕버들의 모습을 사진에 담으려면 미리 주산지의 저수율을 확인해 보는 것이 중요하다. 간혹 헛걸음하는 경우도 있고, 기대를 한껏 품고 갔다가 실망만 안고 돌아오는 사람도 여럿 보았다.

주산지의 아름다운 풍광에 대한 입소문이 나면서 이제 이곳은 많은 사진사들이 꼭 한번 가봐야 할 필수 출사지로 꼽히고 있다. 단풍이 절정을 이루는 가을 새벽에 주산지는 수백여 명의 사진사들로 발 디딜 틈조차 없을 정도다. 사람들의 발길이 지나쳐 주산지의 자랑이자 상징인 수백 년 넘은 왕버들 상태가 많이 좋지 않다고 한다. 이 아름다운 모습을 다음 세대에도 온전히 물려줄 수 있기 위한 노력이 필요해 보인다.


주산지는 영화 한 편을 통해 유명세를 타기 시작했다. 김기덕 감독의 영화 <봄, 여름, 가을, 겨울 그리고 봄>의 촬영지가 바로 이곳 주산지였다. 이 영화는 한 인간의 평범하지 않은 삶을 계절의 흐름과 불교의 윤회사상(輪回思想)에 투영(投影)하여 잘 표현한 것으로 평가받고 있다. 영화 속에서 주산지를 신비롭게 떠다니던 절집은 철거되어 이제 볼 수 없지만 주산지의 신비로움은 더 이상 훼손되지 않기를 바랄 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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