깊어가는 가을, 아름다운 전나무숲길을 걷다
호남의 이름난 고찰 내소사는 백제 무왕 때인 633년에 창건 되었다고 전한다. 두타 스님이 이곳에 절을 세워 큰 절을 대소래사, 작은 절을 소소래사라고 하였는데, 큰 절은 불타 없어지고 작은 절만이 남아 지금의 내소사가 되었다.
내소사에는 수령이 약 5백여 년 된 느티나무인 할아버지 당산과 높이가 약 20미터요 둘레가 7.5미터이고 수령은 약 천여 년쯤 되는 할머니 당산 느티나무가 있다. 봉래루 앞마당에는 하늘을 찌를 듯한 거목 보리수가 자리하고 있다.
절에 이르는 울창한 전나무 숲길은 전나무 향기 가득한 매력적인 산책로다. 전나무 숲길을 지나면 일주문 앞까지 거대한 단풍나무 터널을 이루고 있어 가을이면 단풍 나들이의 진수를 맛 볼 수 있는 곳이기도 하다.
내소사를 찾았던 것은 온전히 그 유명한 전나무숲길을 걸어보고 싶어서였다. 부안 내소사 전나무숲길은 일주문과 천왕문 사이를 잇는 500미터 길이의 숲길인데 150여 년 전에 조성된 것으로 알려져 있다. 우리나라 3대 전나무숲길로도 유명한데 나머지 두 곳은 강원도 오대산 월정사 전나무숲길과 경기도 남양주에 있는 광릉수목원의 전나무숲길이다.
월정사 전나무숲길을 다녀왔을 때도 그 풍성하고 울창한 숲길의 아름다움에 흠뻑 빠졌었는데 이번 내소사 전나무숲길은 그보다도 훨씬 더 좋았다. 월정사 숲길이 작위적(作爲的)인 신작로 같았다면 내소사 숲길은 말 그대로 숲길의 느낌 그대로여서 걷는 내내 참 행복했다.
하늘을 향해 기세 좋게 곧게 뻗어있는 전나무숲에서 뿜어져 나오는 상쾌한 공기는 돈을 주고도 살 수 없는 귀한 것이다. 주변은 온통 붉고 노란 빛으로 옷을 갈아입고 있는데 전나무숲은 여전히 푸른빛을 잃지 않고 있었다. 그리 길지 않은 길이에다 평탄한 길로 이어져 있어 남녀노소 누구나 부담 없이 걸을 수 없는 이 길은 내소사를 찾는 이에게 자연이 주는 최고의 선물이다.
이 전나무숲길을 걷는 것만으로도 충분히 만족스러운 내소사 여행이었다. 한창 단풍철이라서 그런지 수많은 인파가 내소사를 찾고 있었다. 번잡한 걸 싫어하다보니 얼른 한번 사찰 경내를 둘러보고 나오려는 심산으로 천왕문을 넘어섰다. 그런데 그냥 전나무숲길만 걷고 내려갔으면 정말 후회할 뻔 했다.
숲길 못지않게 단아하고 소박한 아름다움이 있는 내소사를 만났다. 규모도 그리 크지 않은데다 건물들도 화려하지 않다. 하지만 주변에 솟아있는 여러 봉우리의 품에 들어앉아 있는 모습이 자연과 조화를 이루며 티 나지 않는 아름다움을 은은히 드러내고 있었다. 단청도 빛이 바래 그 자체로 고풍찬연한 멋을 뽐냈다.
내소사 대웅보전과 얽힌 재미있는 얘기가 있다. 조선시대 인조 임금 때 대웅보전을 건축하면서 사미승(沙彌僧)의 장난으로 나무토막 하나가 부정 탔다는 이유로 하나를 빼놓은 채 지었다는 얘기다. 그 얘기를 듣고 이곳저곳을 두리번거려 봤지만 역시 문외한의 눈에 보일 리가 만무했다.
또 하나 대웅보전 정면 여덟 짝의 문살에는 연꽃, 국화, 해바라기 등의 꽃무늬가 새겨져 있는데 전문가들은 나무를 깎아 만들 수 있는 최고의 아름다움을 보여준다고 평하고 있다. 그 어떤 채색도 하지 않은 소박한 문살이지만 인간의 손으로 어떻게 이렇게 만들 수 있을 지 그저 놀라울 따름이다.
대웅보전과 정면으로 마주보고 서 있는 봉래루에서는 위엄이 느껴진다. 지금은 누각 아래로 사람들이 출입을 할 수 있는 구조로 되어 있는데 1987년에 해체 복원하는 과정에서 당초보다 60cm 정도 높이를 들어 올렸다고 한다. 모양이 제각각인 바닥돌 위에 오랜 세월에 빛이 바랜 누각을 바라보고 있으니 오래된 친구를 모처럼 만난 것처럼 반갑기만 하다.
절 마당 한가운데에는 할머니 당산나무가 주인인 듯 자리를 잡고 있다. 마을에서 당산제를 지날 때면 이 나무에서 먼저 제를 올리고 일주문 앞의 할아버지 당산나무까지 마을 주민들과 스님들의 행렬이 이어지는 진풍경을 선사한다고 하니 때를 맞춰 찾아오는 것도 내소사의 숨겨진 매력을 맛볼 수 있는 좋은 여행법일 것 같다.
평지에 지어져 걷기에도 참 좋은 절이다. 낮은 기단을 쌓아 전각들을 적재적소에 배치함으로써 어디에서도 막힘이 없이 전망이 시원스럽다. 능가산 중턱에 있는 관음전에 오르면 내소사는 물론 멀리 곰소항의 전경까지 한눈에 들어온다고 하니 잠깐의 수고스러움을 감수해 볼만 하다.
사람들에 치이면서도 그저 내소사 구석구석의 아름다움에 빠져 한참을 머물렀다. 다음 행선지가 있음을 깜빡할 정도였다. 이내 정신을 차리고 길을 다시 내려 왔다. 오르는 길에는 미처 보지 못했던 작은 연못이 보였다. 이 연못에서 드라마 <대장금>이 촬영되었다고 한다.
전나무숲길은 여전히 많은 사람들로 붐비고 있었다. 단풍이 절정으로 치닫고 있는 계절에 이토록 푸르고 짙은 녹음을 만날 수 있다는 것도 독특한 경험이다. 근처에 내소사 같은 절이 있어 마치 동네 숲길을 걷듯 언제든 걸을 수 있다면 참 좋겠다는 생각을 잠시 했다. 멀리 내소사를 품어 안고 있는 능가산의 산줄기가 유달리 포근하게 느껴졌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