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우시카, 곤충 그리고 평화의 생태학

#싸우지 않는 힘에 대하여

by 닥터파브르
붉은 바람을 가르는 소녀, 나우시카 포스터

1984년 작, 〈바람계곡의 나우시카〉. 더 놀라운 사실은 이 애니메이션이 내가 태어난 해에 세상에 나왔다는 점이다. 마치 같은 시간대에 태어난 두 생명처럼, 나는 나우시카와 함께 자라왔다고 느낀다. 내 또래라면 누구나 한 번쯤은 미야자키 하야오의 세계를 통과해 왔을 것이다. 어린 시절엔 모험과 비행에 설렜고, 어른이 되어서는 그 안에 숨겨진 환경 철학과 인류애의 무게를 뒤늦게 깨닫는다.


얼마 전, 우리 집 청개구리와 함께 이 영화를 다시 보았다. 아이의 눈에는 거대한 곤충이 괴물처럼 보였을지도 모르지만, 내 눈에는 전혀 다른 풍경이 펼쳐졌다. 파괴된 세계 속에서도 끝내 희망을 포기하지 않는 한 존재의 조용한 투쟁. 자연과 인간의 공존 가능성을 묻는, 오래된 질문이자 아직 끝나지 않은 이야기였다.


영화의 배경은 핵전쟁 이후다. ‘불의 7일’이라는 대전쟁으로 문명은 붕괴하고, 지구는 유독한 균류의 숲 ‘부해(腐海:썩은 바다)’로 뒤덮인다. 사람들은 남아 있는 숲과 문명의 잔해에 의지해 겨우 살아간다. 부해에는 ‘오무’라 불리는 거대한 곤충들이 서식한다. 공벌레를 닮은 그들의 모습은 기묘하면서도 어딘가 애처롭다. 인간에게는 공포의 대상이지만, 사실 그들은 파괴된 생태계를 정화하고 균형을 유지하는 숲의 수호자다.


그 순간, 문득 투구게가 떠올랐다. 인간의 필요에 의해 피를 내어주고, 생태계를 지탱하며, 말없이 희생되는 존재. 영화 속 오무와는 달리, 그들은 우리 눈에 잘 보이지도 않고 이름조차 낯설지만, 여전히 세계의 균형을 지키고 있다. 부해의 곤충이 거대한 몸으로 숲을 지키듯, 현실의 작은 생명들도 인간이 만들어낸 위험 속에서 조용히 자신의 역할을 수행한다.

투구게의 파란 혈액 속 성분은 의약품과 백신의 독성을 검사하는 데 사용된다. 사진: Jan van de Kam / 한국과학기술정보연구원, 출처: 한겨레.

미야자키 하야오는 자연을 선과 악의 이분법으로 재단하지 않는다. 자연은 때로 인간에게 위협적인 얼굴로 나타난다. 그러나 그것은 악의가 아니라, 스스로를 회복하려는 몸부림이다. 나우시카는 부해의 지하에서 오염되지 않은 정화된 숲을 발견하며 이 진실에 다가간다. 인간이 두려워하던 것은 자연이 아니라, 자연을 파괴해 온 자기 자신이었음을 깨닫는 순간이다.


그럼에도 인간은 여전히 싸운다. 톨메키아는 고대 병기 ‘거신병’을 부활시켜 부해를 불태우며, 오무를 포함한 자연을 위협한다. 자연을 통제할 수 있다는 오만, 힘으로 문제를 해결할 수 있다는 착각. 이는 영화 속 이야기이지만, 현실과 너무도 닮아 있다. 오늘날의 기후위기, 자원 분쟁, 전쟁은 이 애니메이션이 과거의 우화가 아님을 증명한다.

오무의 눈을 바라보며, 평화를 선택한 나우시카

이 절망적인 세계 속에서 나우시카는 전혀 다른 선택을 한다. 그녀는 싸우지 않는다. 이해하려 한다. 적국의 병사에게도, 분노한 오무에게도 연민의 손길을 내민다. 작은 곤충 하나의 생명도 귀하게 여기며, 오무의 분노를 멈추기 위해 기꺼이 자신의 몸을 내던진다. 폭력 대신 소통을, 정복 대신 공존을 택하는 힘. 그것은 가장 연약해 보이지만, 동시에 가장 강력한 힘이다.


나우시카는 영웅이지만, 우리가 익숙한 영웅의 얼굴은 아니다. 그녀는 자연의 섭리를 이해하는 존재이며, 인간의 한계를 인정할 줄 아는 존재다. 미야자키 하야오가 그려낸 진정한 인류애는 승리나 지배가 아니라, 모든 생명체의 고통을 이해하려는 태도에 있다.


그리고 미야자키의 작품 세계는 일관되게 환경주의와 반전주의를 말해왔다. 그리고 그 중심에는 언제나 강인한 여성 캐릭터가 있었다. 나우시카는 그 철학의 출발점이자 응축된 결정체다. 감독은 자연을 정복의 대상이 아니라 함께 살아가야 할 존재로 바라보며, 인간의 오만이 결국 자신을 파멸로 이끌 것이라는 조용한 경고를 남긴다.


지금 우리는 여전히 같은 질문 앞에 서 있다. 기후위기는 심화되고, 환경을 둘러싼 갈등은 끝날 기미가 없다. 과연 우리는 자연과 다른 생명체들을 이해하고 공존하려는 노력을 하고 있는가. 자연의 위협은 정말 자연으로부터 오는 것일까, 아니면 인간 자신으로부터 비롯된 것일까.


〈바람계곡의 나우시카〉는 말한다. 기존의 방식으로는 더 이상 살아갈 수 없다고. 싸우지 않는 힘, 조화로 살아가는 용기만이 남은 길이라고. 그리고 그 메시지는, 1984년에서 지금 이 순간까지, 조용하지만 단단하게 우리를 따라오고 있다.

푸른 옷을 입고 황금 초원을 걷는 나우시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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