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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도토리 Feb 29. 2024

담담한 긍정

2월 29일. 4년 만에 '난 여기 있었어요!' 하며 짠하고 나타나는 듯한 그런 날짜다. 이런 덤 같은 날에는 뭐라도 하고 싶어 진다. 오늘 벼르고 벼르던 휴가를 냈다. 휴가를 낼만한 특별한 사유가 있는 것은 아니었다. 하루쯤은 그냥 쉬고 싶었다. 설 연휴까지도 출근하며 바쁘게 동동거리며 산 2월이기에 하루쯤은 고생했노라고 나에게 쉼을 주고 싶었다. 초심을 잃지 않고 휴가를 정말 휴가로 보낼 계획을 짜야 되는데 쉬는 게 익숙지 않아 다시  어젯밤에 할 일들을 적기 시작했다. 자동차 검사, 병원 진료, 미뤄둔 미용실 등등. 내 계획을 들은 친구는 하루 안에 다 할 수 있겠냐고 되물었다.


계획은 계획일 뿐. 아침에 잠을 깨니 세찬 빗소리가 들리고 몸 무거운 돌덩이가 누르고 있는 느낌이 드는 순간 모든 계획은 기약 없이 조용히 사라졌다. 걷어둔 빨래도 마룻바닥에 그냥 둔 채로 일어나 커피를 내리고 하염없이 창밖을 바라봤다. 등 뒤에서 아이가 문제를 풀다 뭔가 안풀리는지 씩씩 거린다. 그 소리가 달궈진 주전자에서 내뿜는 수증기처럼 들리지만 끓는 물이 식듯이 가라앉기를 기다린다.


익숙지 않은 신맛이 나는 커피를 한 모금 들이키며 나의 2월을 되돌아봤다. 가끔 행복하고 자주 불행했다. 1,2월은 쉼 없이 바빴다. 사람들을 상대하는 일들이 많은 직업이다 보니 예민한 성격인 나는 늘 피로감이 심했다. 내 마음은 편치 않은데 아무렇지 않은 척 웃으며 상대하는 일이 유독 잦았다. 한 달 동안 준비한 중요한 일을 끝내고 나니 3일 동안 극심한 피로감과 우울감이 스며들었다. 일로 몸과 마음이 지치니 집에서도 아이에게 따뜻한 말이 나오지 않았다. 하루 겨우 2시간 얼굴을 마주하는 아이인데 여러 날 날 선 신경전이 펼쳐지기도 했다. 아이도 나도 지쳐가며 늘 따뜻하던 집이 되려 불편해져 버렸다. 어디에서도 쉬지 못한다는 기분이 들었다. 이 낯선 기분이 들며 머릿속에 번뜩 어떤 단어가 떠올랐다. '번아웃'. 스스로 번아웃이라고 진단을 내리고 나니 오히려 마음은 가벼웠다. "요즘 지쳐 보여요" 하며 걱정스러운 눈으로 바라보는 동료의 말에 "번아웃이에요"라고 당당하게 말하고 나니 짐이 덜어지는 기분이 들었다. 그들의 이해 간다는 끄덕임이 위로가 됐다.


어느 날 '지치다'라는 단어 밖에 머릿속에 떠오르지 않던 날. 차가운 공기가 얼굴로 훅 밀어 불어오던 그 순간. 지금 내가 느끼는 이 불행이 작년 이맘때 얼마나 가지고 싶은 불행이었던가 싶었다. 그때는 '내게 이런 일을 할 수 있는 기회가 주어진다면'이라는 가정법을 얼마나 내가 품고 있었던가! 생각이 그렇게 연결이 되자 다시 명랑해지고 싶었다. 내가 느낀 2월의 불행은 어느 책의 제목처럼 작고 기특한 불행이었다. 수영장 바닥까지 눈을 질끈 감고 숨을 꾹 참고 내려간 듯 한 며칠이었다. 바닥을 확인했으니 이젠 그 바닥을 차고 물 위로 다시 올라올 때이다. 내일이면 3월 1일이라는 사실이 퍽이나 위로가 된다. 20년 넘게 교사생활을 해 온  몸이 기억하는 새해의 시작은 3월 1일이다. 3월은 다를거라고  담담하게 긍정해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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