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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엘슈가 Nov 29. 2024

폭설 온날 굳이 아보카도 샀던 이유

삶의 [굳이]를 찾아

매번 겨울이 오면 이번 첫눈은 언제 올까 기다리게 된다. 첫눈이 오고 나면 무엇인가 공통의 숙제를 했다는 듯 안도의 마음이 들기도 한다.


올해 첫눈은 잊지 못할 첫눈이 될 것 같다. 첫눈인 동시 폭설이었으니까. 뉴스에서는 몇십 년 만의 폭설이라고 쉴 새 없이 보도 중이었다. 그날 아침 아이 학교 라이딩 해주는 길이 살짝 언덕길이라 돌아가야 했고 돌아오는 길 음지에 살얼음에 차가 살짝 돌아서 긴장했었던 나는 오후가 되자 조금 지쳐있었다.


그러나 톡으로 하나 둘 들려온 지인들 소식은 정신을 바짝 들게 만들었다. 어느 아파트 단지는 간밤에 폭설로 정전되었단다. 정전이 되자 휴대폰이며 노트북이며 배터리가 별로 남아있지 않게되자 휴교령으로 집에 남겨진 아이들을 데리고 근처 스타벅스라도 가야 하나 친구는 고민하고 있었다. 친구의 냉장고 상태를 걱정해 주는 다른 친구도 있었다. 또 다른 친구는 주택살이를 하고 있었는데 눈이 마당을 점령해버려 대문이 열리지 않아 온 식구가 집안에 칩거 중이란다.


나는 친구들의 일상이 얼른 정상으로 돌아가기를 바랐다. 그날 나는 회사 업무를 하고 있었는데 매월 가는 병원 진료가 예약된 날이기도 했다. 한 달에 한번 가는 병원 예약을 미룰까? 꼼수를 부리던 중이었다. 그러던 중 한 톡방에서였다. 그 글귀가 날아든 건.


우리 모두에겐 '굳이' 하는 일들이 있죠. 그 굳이'를 한번 떠올려보세요. 흥미롭게도, 그 굳이'에 당신이 중요하게 생각하는 가치가 숨어 있을 겁니다. <인생의 해상도, 유병욱>


나는 일하던 것을 정리하고 밖으로 나갔다. 그 글귀를 보자 더 지체할 수 없었다. 추워지면 입어야지 하고 세탁소에서 찾아다 놓은 패딩의 비닐을 벗겨낸뒤 걸치고 나섰다. 병원까지 거리는 15여분 정도. 버스를 탈수도 있었지만 나는 그 거리를 굳이 걸어갔다.


오는 길에 늘보던 야채 가게를 지날 때였다. 한 달 자릿세를 내고 팔다가 없어지기도 하는 그런 곳. 거기엔 다른 곳에서 좀 값어치가 나가는 야채도 종종 싸게 팔고 있었다. 이를테면 여름에 배, 이젠 금값이 된 방울 토마토라든지, 반짝 한철 나오고 마는 무화과라든지. 이번엔 아보카도였다.


세상에 아보카도가 6개에 5천 원이다. 아보카도가 뭐라고 가슴이 두근거렸다. 나의 아보카도 사랑은 유난했는데, 비싸도 사서 먹어야지 하면 고를 줄 몰라서 푸릇한 걸 사다가 후숙 한다고 묵혔다가 너무 익어 먹지 못하고 버린 경험, 친구네 부부가 놀러 온다고 해서 샐러드 만들어 주려고 샀는데 안 익어서 제때 못쓴 경험, 어느 날은 너무 먹고 싶어 울며 겨자 먹기로 한 개에 삼천 원 주고 산 경험까지.


나의 아보카도 흠모를 거슬러 올라가다 보면 적당히 한적한 카페 브런치 풍경이 있다. 토치로 마무리한 구운 새우나 닭가슴살이 들어간 오픈 샌드위치에 정신이 팡! 드는 아이스 아메리카노를 서너명이 이야기 나누며 먹는 그 느릿하고 즐거운 시간. 그 시간을 줌인 해보면 한쪽에는 꼭 아보카도가 있었다. 나는 아무 맛도 안나는 아보카도를 좋아하는 게 아니라 그 시간을 열망해서 아보카도를 흠모하고 있다는 것을 최근에 알아차렸다.


그 시간에 대한 흠모면 어떻고 아보카도 자체에 대한 흠모면 어떠랴. 나는 어느새 야채 가게에서 아보카도를 고르고 있었다. 어서 값을 치르고 아보카도 여러 개를 받아서 집에 돌아와 샐러드를 만들 참이었다. 창밖에 펑펑 내리는 눈을 액자삼아 오후의 샐러드를 먹을 거다. 돈을 지불할 때 알았다. 아보카도 6개의 값은 5천 원이 아니었다, 3천 원이었다.


이런 행운이! 내일이면 아보카도 가격이 달라질지도 모른다 생각하니 행운이 증폭되는 느낌이었다. 아보카도 행운에 보답이라도 하듯 또 하나의 굳이를 실행히기로 했다. 15분 정도 걸리는 집까지 양손에 약봉지와 아보카도 봉지를 들고 걸어가기로 한 것이다. 그게 오늘 고생하고 있을 내가 아는 사람들과 내가 모르는 사람들에게 예의 같은 것이라 생각이라도 한 것일까. 일 년 중 아니 몇십년 중 가장 눈이 많이 내리던 날에 산책이다. 집에 도착하니 우산이 무색하게 패딩 양쪽 소매가 다 젖어있었다.


돌아와 몇 장의 로메인을 씻어 물기를 선 뒤 샐러드 접시에 담는다. 아보카도의 허리쯤에 칼을 대어 선을 죽 긋는다. 살짝 트위스트하여 아보카도를 두 개로 분리한 뒤 요리할 때 쓰는 계량 스푼으로 아보카도를 푼다. 마치 아이스크림 가게에서 형형색색 아이스크림을 스쿱으로 떠내듯이.


거기에 얼마 전 모임에서 받은, 생각지 못했던 서프라이즈 선물, 발사믹 식초를 나선을 그려가며 뿌린다. 점심 대용이니 인심이다, 듬뿍 뿌린다. 아몬드 몇 알을 넣을까 생각했지만 오늘은 아보카도가 주인공이므로 생략하기로.


그 샐러드는 그날 내가 선택한 [굳이]가 만들어낸 선물 같은 샐러드였다. 삶에 [굳이]라는 부사를 오랜 친구로 곁에 두고 살기로 다짐한다. 오늘 폭설이 내리던 날 아보카도 사온 것 같은 [굳이]들이 모여 삶을 더욱 풍요롭게 만들어 줄 것이라 믿기 때문에.


여러분의 [굳이]는 무엇인가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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