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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박재형 Oct 30. 2020

회사를 정리하기로 마음먹고 2년이 지났다

빚은 배움의 비용이고, 빚은 원동력이 된다


날이 추운 겨울이었다. 투자사와 폐업을 하기로 합의하고 얼마 지나지 않은 어느 날이었다. 배송 때문에 우체국을 들렸다가 따뜻한 작업실에 들어오니, 여느 때처럼 소파에 늘어져있고 싶어 졌다. 엄마에게 전화를 했다. 텅 빈 작업실의 공기를 엄마의 목소리로 채우고 싶었던 것 같다. 그날따라 평소에 하지 않던 이야기를 했던 것은 작업실의 따뜻한 공기가 내 마음을 누그뜨려서 였을까?


"엄마, 창업 안 하고 다른 친구들처럼 대학생활 열심히 하면서 공부에 집중했었으면 어땠을까?"

"왜 갑자기 그런 얘기를 하노"

"아니 그냥, 사실 다 잘못된 것 같기도 하고 후회되는 것 같기도 해서"

"뭐가 그렇게 후회되는데"

"지금 나이에 이렇게 갚아야 할 빚이 많은 것도 그렇고, 정리한다고 생각하니까 지금까지 뭐한건가 싶기도 하고"

"재형아, 네가 만난 사람들, 네가 했던 경험들, 그리고 네가 만들어낸 것들을 생각하면 아깝지 않은 비용이다. 네가 도트윈 하면서 배운 거를 학교에서 가르친다고 했어도 아마 그 정도 비용은 내야 했지 않겠나"


한때는 엄마가 아무것도 모른다고 생각한 적도 있었다. 엄마는 법인사업 같은 거 잘 모르니까, 엄마 걱정시키지 않게 내가 알아서 잘해야지 하고. 수화기 너머 엄마의 목소리는 그날의 나를 위로했다. 당신은 늘 나의 결정과 선택을 후회하지 않게 만들어줬다. 처음에는 '빚'이 되어버린 지난 시간을 후회하기도 했다. 내가 했던 도전에 대한 후회가 아닌 계획적으로 사업을 이끌어나가지 못한 것에 대한 후회였다. 그래, 세상에 후회할만한 것은 없다. 그것을 통해 배운 것이 있다면, 그저 그에 합당한 배움의 비용을 지불했을 뿐이다. 그때부터였다. 지난 시간들을 후회하지 않고, 앞으로 어떻게 빚을 갚아나가야 할지에 집중했던 것이. 스물넷의 나에게는 많은 빚이었지만, 좌절하지 않고 담담하게 그것을 갚아나가고자 했다.


투자사와 폐업을 하는 방향으로 합의했지만, 회사의 모습은 크게 달라지지 않았다. 투자사에게 상환해야 할 융자금이 남았기에, 융자금을 모두 다 상환할 때까지는 회사가 계속해서 운영됐어야 했다. 투자를 받아 운영했던 2년에 비해, 폐업을 결정하고 빚을 갚아나가던 2년 동안 나는 자금을 더 계획적으로 운용했다. 매달 상환하기로 약속한 금액이 있으니 매달 얼마의 수익을 만들어야 하는지, 또 그 수익을 만들기 위해서 내가 어떤 것을 할 수 있을지를 고민하고 또 계획했다. 어찌 보면 빚을 갚아나가는 2년 동안 나는 사업에 대해 더 많은 것을 배운 것 같다. 결과적으로 내게 남은 ‘빚’은 나에게 고통이었다기보다 성장의 시간이 되어줬다.


회사를 정리했던 2년의 시기는 도트윈에게나 나에게나 사업가로서 제2의 시간이었다고 할 수 있다. 제2의 시간은 나를 인정하는 단계를 넘어서, 내가 변화할 수 있었던 시간이었다. 브랜드를 운영하며 늘 ‘가치’를 중요시했던 나는 처음으로 ‘수익’을 중심으로 회사를 이끌게 되었다. 또한 주변에 도움 한번 청하지 않았던 내가, 이곳저곳 도움을 요청하며 일을 받아냈고 이를 수익으로 이끌어냈다. 내가 빚진 돈을 내가 직접 다 갚아보는 경험은 내게 소중한 경험이었다. 마냥 낙천적이고 이상적이었던 내가 현실적이고 계획적으로 변했고, 보다 영리하게 생각하고 이성적으로 판단하게 되었다. 빚을 갚아나가는 시간들은 진정으로 나라는 사람을 변화하게 했다.


다른 이들은 어떻게 빚을 상환해나가는지 모르겠지만, 빚을 갚아나가기 위해 내가 가장 먼저 했던 것은 '불필요한 것'을 파악하는 것이었다. 물이 새는 구멍을 막아놓지 않는다면, 아무리 물을 많이 부어도 물의 양은 줄어들기 마련이다. '불필요한 공간', '불필요한 시간', '불필요한 지출', 그리고 '불필요한 자산' 들을 하나씩 정리해나갔다. 그중에서도 가장 먼저 정리했던 '불필요함'은 공간이었다. 우리의 작업실은 30평이 넘는 넓은 작업실이었는데, 그 당시는 나는 홀로 그 공간을 쓰고 있었더. 그 당시 작업실은 나에게 심적으로나 물적으로나 꽤나 큰 부담이었다. 작업실의 계약은 1년이 남았고 제품을 제작하고 회사를 운영해야 할 공간이 필요했기에 공간을 바로 처분할 수는 없었다. 그래서 내가 생각해낸 방법은 작업실이 필요한 누군가에게 이 공간을 공유하는 것이었다.


(c)도트윈 | 쉐어작업실로 운영했던 도트윈의 작업실


내가 사무공간으로 썼던 디자인실과 제품 제작을 위해 썼던 제품 제작실을 제외한 모든 공간을 다른 작업자들과 공유하기로 했다. 내가 공들여 만든 작업실이자 집 외에 가장 사적인 공간이었던 작업실을 모르는 누군가와 함께 사용한다는 것이 쉬운 결정은 아니었다. 하지만 그 당시 나는 우울을 겪고 있기도 했기에, 누군가와 함께 작업실을 쓴다는 것이 나에게도 도움이 될 것이라는 생각을 했다. 마침 그 시기에 오피스를 쉐어해주는 플랫폼의 대표님을 만나게 되어 플랫폼에  작업실을 등록하면서, 작업실의 쉐어를 시작하게 되었다. “이 공간으로 얼마나 벌고 싶으세요?”라는 대표님의 질문에, “수익은 상관없고, 사람들이랑 같이 쓰고 싶어요”라고 했던 대답이 기억난다. 실은 수익보다 사람이 더 그리웠나 보다.


(c)도트윈 | 쉐어작업실로 운영했던 도트윈의 작업실


쉐어작업실을 필요로 하는 사람이 많을 것이라고는 생각지 않았다. 한두 명씩 연락 오기 시작하던 사람들은 곧 작업실의 자리를 다 채워 일러스트레이터, 공예가, 화가, 1인 창업가, 웹툰작가 등 다양한 이들과 함께 작업실을 쓰게 되었다. 작업실을 쉐어하면서 물적으로는 고정적인 임대료 지출을 줄일 수 있었지만, 새로운 인연들 덕분에 심적으로 안정감을 느낄 수 있다는 건 생각지 못한 이득이었다. 작업실을 쉐어하며 때로는 작업실의 임대료보다 더 많은 수익을 만들기도 했다. 예전의 나였다면 내가 애써 만든 공간을 누구와도 공유하고 싶어 하지 않았을 텐데, 빚을 갚아나가면서 ‘수익’을 만들기 위해서라면 어떤 결정을 하는 것이 더 영리한 해결책인지를 생각할 수 있게 되었다. ‘수익’을 만들어내기 위해 했던 일이지만, 작업실을 쉐어했던 것은 나에게 더 나은 ‘가치’를 주기도 했다.


쉐어작업실을 운영하며 평소에 생각하지 못했던 또 다른 니즈를 발견했다. 작업실을 쉐어하는 이들의 대부분이 1인 창작자들이었는데, 그들은 대중에게 직접적으로 작업을 보여줄 수 있는 채널이 한정적인 것이었다. 작업실이 위치했던 성수동이 주말 상권이라는 점에 착안하여, 평일에는 쉐어작업실로 사용하고 주말에는 작업실을 오픈하여 성수동을 놀러 오는 이들에게 열어보기로 했다. 작업실을 사용하는 이들은 그들의 작업과 상품을 직접 소개하며 판매할 수 있어서 좋았고, 나 또한 도트윈 제품뿐만 아니라 일부의 수수료를 통해 서로가 상생할 수 있어서 좋았다. 도트윈이 관심 가졌던 사회적 이슈는 아니었지만, 나는 주변을 통해 또 다른 니즈를 발견하고 해결책을 만들어가는 그 과정들이 좋았다.


(c)도트윈 | 작업실의 주말상점


작업실의 계약이 만료될 때까지 약 1년의 기간 동안 쉐어작업실을 운영했다. 많은 인연들이 우리의 작업실을 거쳐갔다. 그들 덕분에 작업실은 나름의 온기로 가득 찼고, 나는 그 시기를 잘 이겨낼 수 있었다. 예상하지 못했던 수많은 일들이 있었지만, 그럼에도 나에게 소중하게 남은 인연들이 있는가 하면 그 시간들을 통해 배운 것들이 많았다. 작업실을 쉐어한 덕분에 나는 작업실에 온종일 앉아있지 않아도 나의 시간을 유연하게 쓸 수 있었다. 회사를 혼자 이끌어갔던 내게 시간을 통제하는 것은 꽤나 중요한 이슈였다.


쉐어작업실의 운영이 어느 정도 안정적 여질 때쯤, 나는 또 다른 ‘불필요함’ 고민해보기 시작했다. 그 당시 나는 여전히 도트윈을 혼자 이끌어가고 있었기에, '불필요한 시간'을 줄여나가고자 했다. 이에 대한 첫 시도가 도트윈의 사업모델을 바꾸는 것이었다. 개개인의 문구를 주문받아서, 모든 제품을 수작업으로 제작했던 도트윈은 하나의 제품을 만드는데도 많은 시간이 소요될 수밖에 없었다. 도트윈을 통해 진심을 전했던 개개인의 고객들에게는 아쉬운 마음이었지만, 나는 혼자서 일을 해야 했기에 시간을 아끼고 수익을 극대화할 수 있는 방향으로 사업을 이끌어가야만 했다.


나는 차차 도트윈의 사업모델을 B2C(Business-to-Customer)에서 B2B(Business-to-Business)로 변경해나갔다. 도트윈의 제품은 가죽 소재이기도 하고, 개개인이 원하는 문구를 담을 수도 있었으며, 무려 점자로 각인된다고 하니, 종종 기업에서 주문을 하곤 했다. 귀빈을 위한 선물로, 단체 행사의 기념품으로, 출범식의 키트 선물로 도트윈만한 제품이 없는 듯했다. 나는 브랜드를 폐업하기로 하면서, 장기적인 관점에서 개인고객을 늘리는 것보다 기업고객 위주로 운영을 하는 것이 옳다고 판단했다. 크라우드펀딩과 플리마켓 혹은 디자인페어 등의 참여를 통한 직접 판매를 제외하고는 모든 B2C 사업을 정리하고 B2B 사업에 집중했다. 기업을 대상으로 하는 대량주문은 수익성이 좋았고, 시간도 유동적으로 쓸 수 있었다.


(c)도트윈 | B2C에서 B2B로의 비즈니스모델 변경


고정비의 지출도 줄이고, 비즈니스 모델도 변경해나갔지만 도트윈의 제품판매만으로 수익을 최대화하기에는 역부족이었다. 대량주문에 집중하면서 남는 시간들을 다른 곳에 더 쓸 수 있었는데, 그러면서 내가 시도했던 것이 디자인 서비스업이었다. 도트윈을 운영하면서 제품디자인은 물론 도트윈의 제품을 소개하는 브로셔, 카탈로그, 책, 공간 등을 하나부터 열까지 전부 디자인해왔던 나는 다른 이들의 디자인을 맡기에도 충분한 실력이었다. 브랜드를 운영해온 경험이 있던 나는 디자인만했던 이들보다 더 현실적인 방안을 제시할 수 있었고, 클라이언트의 요구에 대한 이해도 빨랐다. 도트윈의 제품 판매보다 디자인서비스업이 더 수익성이 좋을 것이라고 판단하고, 나는 도트윈이라는 브랜드명을 대신하여 법인명이었던 도트윈스튜디오를 이름으로 사용하며 디자인스튜디오로의 피봇을 결심한다.


 피봇은 "제품, 전략, 성장 엔진에 대한 새롭고 근본적인 가설을 테스트하기 위해 경로를 구조적으로 수정하는 것"을 말하는데, 쉽게 말해서 사업의 방향을 전환하여 사업모델은 변경하는 것을 말한다. 디자인스튜디오로의 피봇이란, 도트윈이라는 브랜드를 디자인하고 운영해왔던 경험을 바탕으로 더 이상 제조업이 아닌 디자인서비스업을 시작해보겠다는 뜻이었다.  돌이켜보면 그때의 피봇은 나에게 옳은 선택이었다. 브랜드로서의 도트윈을 생각한다면 아쉬운 일이었지만, 도트윈스튜디오는 디자인스튜디오라는 새로운 정체성 아래 운영되었다. 혼자서 일을 했음에도 불구하고, 도트윈이 벌어들인 수익보다 도트윈스튜디오가 벌어들인 수익이 더 많았다. 피봇은 통상 예상했던 것만큼 시장성이 보이지 않거나 성과가 나오지 않을 때 비상수단으로 여겨지곤 한다는데, 나에게도 피봇이 비상수단이 되어줬다. 나는 주로 비영리재단, 공기업, 스타트업 등의 인쇄물 디자인과 패키지 디자인, 브랜드 디자인 등을 진행했다.


디자인스튜디오로의 피봇은 내가 '불필요함'을 정리해나가는 데에도 큰 도움을 줬다. 작업실의 계약이 만료되는 시점에서 나는 오랜 고민 끝에 작업실을 정리하게 되었다. 그럼에도 회사를 계속 운영하고 매출을 발생시킬 수 있었던 것은 사무실 없이도 유연하게 운영할 수 있었던 디자인스튜디오라는 비즈니스의 특성 덕분이었다. 필요한 미팅이 있으면 클라이언트의 회사로 직접 찾아가서 미팅을 진행했고(그것이 클라이언트에게도 편했다.), 대부분의 일은 작업실을 겸해서 썼던 집이나 카페에서 했다. 나의 결정은 내게 불필요한 공간을 정리하게 했고, 불필요한 시간의 낭비가 없도록 해주었다. 기존에 있던 공간을 정리하며, 예전의 나였으면 별생각 없이 폐기했을 많은 자산들도 현금화할 수 있는 것들을 최대한 현금화했다.


사회를 변화시키고자 한다고, 꼭 그 방법이 비즈니스 일 필요는 없었다. 내가 잘하는 일로 더 나은 사회를 만드는 방법들은 충분히 존재한다는 것을 배웠다. 도트윈스튜디오를 운영하며 사회적 목적성이 있는 다양한 프로젝트의 디자인을 맡아서 진행했다. 장애인이 각종 안전 문제에 올바르게 대응할 수 있도록 돕는 자원봉사 프로그램의 프로그램북을 디자인하는가하면, ‘한국청년기업가정신재단’에서 2018년도 창업교육 활성화 방안의 일환으로 주관한 청소년 기업가 체험 프로그램의 사회적 문제 해결형 워크북에 대한 개발 및 디자인 총괄을 담당하기도 했다. 어쩌면 내가 꿈꿔왔던 일은 이러한 일들에 가까웠는지도 모르겠다. 특정 사회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목소리를 낼 수도 있지만, '디자인'이라는 도구를 통해 더 나은 사회를 만드는 데에 힘을 쓰고 싶었던 것이었다.


장애인 안전교육 프로그램을 위한 프로그램북 디자인


청소년 기업가 체험 프로그램의 사회적 문제 해결형 워크북


빚을 상환하기 위해 불필요한 것들을 정리해나갔던 것은 내 상황에 적합한 판단이었다. 그와 더불어 나는 그 과정에서 내가 잘할 수 있는 일이 디자인임을 찾았고, 내가 선호하는 일의 스타일이 공간과 시간의 제약이 없는 일의 방식임을 알게 되었다. 빚은 갚아나가는 과정이 내가 진정으로 원하고 잘하는 일을 찾게 해 준 것이었다. 내가 다시금 사업을 하게 된다면, 나는 그 시간 속에서 배운 것들을 바탕으로 나만의 회사를 꾸려갈 것이다. 나는 모두가 같은 회사의 모습을 하지 않아도 된다고 생각한다. 당신에게 필요한 자원과 불필요한 자원이 무엇인지를 분명하게 파악하는 것이 중요했다. 그래야만 당신이 집중해야 할 것이 보이고, 당신이 잘하는 것이 보일 것이다.


그렇다고 빚을 갚아나가는 과정이 마냥 즐거운 것만은 아니었다. 약속했던 상환 예정일이 다가올수록 마음이 초조한 것은 물론이고, 프로젝트를 빨리 끝내서 계약금을 받아야 했기에 무리하게 일을 해야 할 때도 있었다. 그럼에도 이 과정을 통해 내가 하고자 하는 일이 내가 잘할 수 있는 일임을 다시금 확인했고, 내가 잘하면서도 수익이 될 수 있는 사업모델을 확인할 수 있었다. 추웠던 어느 날, 수화기 너머 엄마가 내게 해 준 말처럼 사업을 통해, 또 빚을 갚아나가는 그 과정들을 통해 나는 남들은 겪어보지 못했을 수많은 것들을 느끼고 배웠다. 내게 갚아야 할 빚이 있었기에 그것이 원동력이 되어 나는 성장할 수 있는 길이 되었다. 마냥 빚이라고만 생각했던 것이 내게 배움이 되고 가르침이 되어 돌아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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