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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박재형 Oct 30. 2020

작업실과 함께했던 시간들에 안녕을 고하며

우리는 사무실이 아닌 작업실에서 일했더랬다


트럭에 정신없이 짐을 싣고 나니 저녁이 되었다. 전날 저녁부터 꼬박 밤을 새워 짐을 쌌고, 날이 밝은 오전이 되자 작업실 짐을 실을 트럭이 도착했다. 하루 온종일 짐을 싣고 난 시간은 저녁이었다. 별 생각은 들지 않았다. 엄두조차 나지 않았던 일을 끝내고 나니 그저 홀가분했다. 남은 것들을 다 정리하기 전에 우선 밥부터 먹자며, 동생과 함께 늦은 저녁을 먹으러 갔다. 그날은 날이 추웠다. 추위를 달래러 들어간 버섯탕집은 뿌연 습기로 가득 차있었다. 앉아서 주문을 하고 차가운 물 한 잔을 마시는데, 웬일인지 목이 뜨거웠다. 뜨거워진 것은 목뿐만이 아니었다. 차가운 물은 곧 눈으로 옮겨와 뜨겁게 흐를 준비를 했다.


‘작업’이라는 말에는 묘한 멋있음이 있다. 글을 쓰는 이도, 그림을 그리는 이도, 가구를 만드는 이도, 작곡을 하는 이도 작업을 한다. 작업 作業. 지을 작 업 업. 일은 일이지만, 무언가를 만드는 일이란 뜻인가. 작업을 한다는 것과 일한다는 것이 확연히 다른 느낌을 주는 것은 바로 이 만듦의 차이가 아닐까. 우리는 이 만듦을 창작이라 부른다. 과거로부터 창작을 하는 누구든 나만의 작업공간에 대한 로망을 가져왔다. 외국에서는 이를 아뜰리에라고 불렀다지. 공예가는 공방. 화가는 화실, 프로듀서는 녹음실, 목수는 목공방, 사진작가는 암실 등 작업실이라 이름 붙인 창작자들의 작업공간이 존재해왔다. 우리가 이를 사무실이 아닌 작업실이라 부르는 것은 만듦의 속성을 띄고 싶은 창작자들의 마음이 깃든 것일지도 모르겠다. 나는 나의 공간을 작업실이라 부를 수 있음을 좋아했고, 그 말에서 오는 묘한 멋있음이 좋았다.


나의 아버지는 내가 아주 어렸을 적부터 당신의 작업실을 가지고 있었다. 그곳은 언제나 따뜻한 주광색 빛으로 채워져 있었고, 특유의 가죽 냄새들이 그 빛을 에워쌌다. 어머니의 손을 잡고 따라갔던 작업실의 유리창 너머로, 늘 긴 머리의 아버지가 보였다. 내가 기억하는 가장 아름다운 작업실. 그곳은 당신의 작업실이었다. 아버지는 일을 마치고 작업실에서 보내는 시간을 좋아하셨다. 그도 그곳에서는 나의 아버지이기 이전에 창작자였다. 아버지는 종종 내게 말했다. 작업공간과 집은 분리되어야 한다고. 작업에 대한 존중이었을 터다. 아버지는 가죽으로 무엇이든 만드셨고, 그곳에는 다양한 사람들이 오고 갔다. 함께 대화를 하고, 커피를 마시고, 때론 함께 무언가를 만들기도 했다. 그곳의 시간만큼은 꽤나 천천히 흐르는 듯 했다. 그는 그저 무언가를 만드는 것에 집중했지만 신기하게도 인연들이 그 공간으로 흐르곤 했다. 그곳에는 창작, 그리고 관계가 있었다.


(c) jaehyung park | 아버지의 작업실
(c) jaehyung park | 아버지의 작업실


시간은 흘러 스물한 살, 나는 생애 첫 작업실을 열었다. 신촌에서 홍대로 가는 어떤 골목의 1층. 다섯 평 남짓의 아주 작은. 안이 시원하게 보이는 통유리가 가장 마음에 들었다. 그 넓은 통유리가 겨울에 그리 추우리라고 생각하진 못했지만. 어머니는 내게 젊었을 적 아버지와 어쩜 그리 똑같냐고 하셨지만, 그 말이 그리 싫지 않았다. 나와 동생은 작디작은 작업실을 정성스럽게도 꾸몄다. 이태원가구거리에서 공수해온 역사가 깊은 원목 테이블과 수납장, 의자들은 우리의 시간과 함께 역사를 이어가고 있었다. 아늑했고, 따뜻했고, 낭만적이었던 우리의 작업실은 꽤 그럴듯했다. 작업이 없었던 것만 빼고는.


아버지는 아마 우리가 그저 우리만의 작업공간이라는 로망을 실현하고자 했음을 알았을 터이다. 그는 우리가 무엇을 하려고 작업실을 만드는지, 그 공간이 꼭 필요한지는 묻지 않았다. 우리의 첫 번째 작업실은 아버지의 작업들로 채워져 나갔다. 당신의 작업실을 잘 흉내 내어 구색은 꽤나 갖췄다. 여섯 달을 채 머물지 못했던 작은 작업실에서 우리는 어떠한 작업도 하지 않았다. 나도 작업실을 열었다며 들떠있던 나와 동생. 아지트가 생겼다며 함께 신나했던 친구들. 여느 젊은이들처럼 우리는 작업실로 모여들었다. 골목을 지나던 사람들, 옆집 마카롱 가게 사장님, 오랜 친구들, 연인과의 시간들은 작업실이라는 이름 안에서 특별해졌다. 작업이 없던 작업실. 미숙하고 어설펐던 첫번째 작업실. 그럼에도 그곳에 관계는 남았더라. 지난 시간 속의 그곳을 나는 인연의 작업실이라 기억하겠다.


(c) jaehyung park | 첫번째 작업실
(c) jaehyung park | 첫번째 작업실


인연의 작업실을 뒤로하고 우리의 작업실은 성수동으로 향했다. 여섯달의 고민 끝이었다. 그 무렵 우리는 브랜드를 창업했고, 작업실이 필요했다. 서울숲 바로 옆의 어떤 골목. 어떤 골목의 2층에서 그 역사를 이어간다. 바로 그곳에서 '도트윈'이라고 이름 지은. 열정 말고는 정말 아무것도 없던 소중한 우리의 브랜드가 탄생한다. 당시 ‘도트윈’을 투자했던 투자사는 새로이 사무실을 구하던 참이었다. 투자사의 사무실에 10평 남짓 남은 공간을 나와 동생이 작업실로 사용하게 된 것이다. 첫 번째 작업실에서 무려 두배나 넓어진 공간이었다. 투자사와는 벽을 두고 우리만의 공간이 생겼다. 투자사는 그곳을 사무실, 우리는 작업실이라 불렀다. 나는 늘 우리의 공간이 작업실로 불리는 것을 좋아했다.


벽 하나 없었던 그곳에 수납장이 벽이 되고, 테이블을 중앙에 놓으면 그곳은 작업공간이 되었고, 벽쪽으로 붙이면 사무공간이 되었다. 카펫을 깔아 둔 곳은 휴게공간이라고 정했다. 작은 냉온풍기에 의지해 더운 여름과 추운 겨울을 보냈던 그 공간에 우리가 만든 제품들이 있었고, 함께 일하는 동료들이 있었다. 그곳에서 우리는 흐르지 않는 인연, 시간이 오래 지나도록 곁에 함께하는 인연들을 만났다. 수많은 밤을 새웠다. 제품을 디자인하고, 디자인한 제품을 제작했으며, 글을 쓰고, 사진도 찍었다. 누군가를 인터뷰하기도 했고, 누군가가 우리를 인터뷰하기도 했다. 우리는 그곳에서 벌어지는 수많은 일들을 대부분 작업이라 불렀다. 두번째 작업실에는 창작이 있었고, 관계가 있었다. 우리는 그곳에서 처음으로 창작과 관계의 작업실을 이뤘다.


(c)jaehyung park

한 해를 다 보냈던 추운 겨울 즈음, 투자사로부터 더 넓은 사무공간으로 이사 갈 것을 제안받는다. 생산과 사무, 재고까지 뒤섞인 작업실이 좁아 보이기 시작했던 때였다. 성장에 혈기를 올리는 청년창업가들은 이때쯤 더 큰 사무실을 성장이라고 생각하곤 한다. 우리가 제안받은 공간은 바로 옆 골목에 위치한 어느 지하. 30평 가까이 되는 넓은 공간이었다. 텅 빈 공간을 보고 있노라면 가슴이 두근거렸다. 더 크게 성장한 회사, 진짜 작업실다운 작업실이라는 또 한 번의 낭만. 그곳에서는 이룰 수 있을 것만 같았다.


넓은 공간만큼이나 채워야 할 것이 많았다. 새롭게 이사한 세 번째 작업실은 나와 동생의 애정이 가장 많이 담긴 공간이기도 했다. 우리의 움직임을 담아 벽을 세웠고, 목적에 따라 공간을 분리했다. 작업공간과 사무공간, 재고를 보관할 공간이 따로 있었고, 쉴 수 있는 공간도 충분했다. 우리는 내 방이 생긴 아이들처럼 좋아했다. 봄에서 여름이 될 쯤 완성된 그곳은 따뜻했고, 아름다웠다. 무엇보다 아버지, 당신의 작업실보다도 더 멋있었다. 그곳에서 도트윈과 함께할 새로운 팀원들을 채용했고, 3명이었던 우리의 멤버들은 6명이 되어 넓은 공간을 가득 채워나갔다.


아쉽게도 가득채워진 작업실은 그리 오래가지 않았다. 다시금 서늘한 계절이 올 때쯤 나는 작업실에 혼자 남게 되었다. 동생과 함께 시작하고 나의 동료가 되어준 많은 이들이 있었지만, 넓은 작업실이라고 그들을 지켜내진 못하더라. 늘 북적였던 작업실 테이블을 보고 있노라면, 동생과 동료들은 작업실이 아닌 곳에서 작업실과의 안녕을 고했을 것이라 생각하곤 했다. 관계가 사라진 작업실은 꽤나 외롭고 쓸쓸했다. 캄캄한 어둠에 불을 켤 때면, 따뜻했던 조명이 그토록 차갑게 느껴질 수 없었다. 창작만 남아버린 작업실은 내가 알던 작업실과 달랐다.


(c)designed by jaesung park
(c)designed by jaesung park
(c)designed by jaesung park
(c)designed by jaesung park
(c)designed by jaesung park


남는 공간을 채우고자 작업실을 공유하기 시작했다. 내가 채우고 싶었던 것은 그저 공간만은 아니었다. 작업실을 공유하며 그곳은 자연스럽게 새로운 인연들과 관계들로 가득찼다. 다시금 채워졌던 그 온기를 여전히 기억한다. 작업실을 공유하며 수많은 창작자들의 작업이 공간에 흘렀다. 그들은 모두 다른 창작을 했지만, 관계가 되어 공간을 함께 채워나갔다. 시간은 흘러 그들에게도 상처를 받고, 또 상처를 주고, 춥고 더웠던 계절이 셀 수 없이 지났다. 수많은 사람들의 작업과 관계들이 뒤섞였던 차가운 계절. 작업실의 창작과 관계가 모두 끝나가고 있다는 것을 느꼈다.


작업실은 창작과 관계로 완성된다. 때로는 관계만이 존재했고, 때론 창작만이 존재했지만, 창작과 관계가 함께할 때 작업실은 온전히 작업실로 존재했더라. 가장 오랜 시간을 함께한 세 번째 작업실이 사업을 하며 함께했던 나의 마지막 작업실이었다. 많이 사랑했던 공간이었지만, 많이 쓸쓸하고 외로웠던 공간이기도 했다. 로망을 실현해줄 것 같았던 작업실은 때론 부담이 되어 찾아왔고, 관계를 지켜줄 것 같았던 넓은 작업실은 쓸쓸함이 되어 돌아오기도 했다. 당신의 작업실은 무엇으로 완성되고 있는가.


우리의 열정, 아픔, 시간, 흔적들이 3.5톤의 트럭에 가득 실렸다. 이렇게 가득차도록 우리는 열정적였고, 그만큼 아파했다. 이제 전부 짐이 되어버린 것일까 생각할 때쯤 주체하지 못하는 눈물을 흘리며 나는 텅 비어버린 작업실 바닥을 쓸고 있었다. 그 넓은 작업실을 정리하며 진정으로 나의 사업이 끝나가고 있었다. 다시는 돌아오지 않을 시절이 지나가고 있었다. 이십대의 절반을 함께해왔던 작업실들과의 시간이 한순간에 내 기억속을 스쳐갔다. 아버지의 공간을 닮아 늘 따뜻한 빛으로 가득했던. 나, 동생, 그리고 함께 했던 수많은 인연들의 작업실은 그들의 기억속에 여전히 따뜻하게 빛나고 있기를.


여전히 젊고 젊은 창작자들은 작업실을 꿈꾸는지 모르겠다. 당신의 작업실에도 늘 온전한 창작과 관계가 흐르기를. 그리고 묘한 멋있음이 있기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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