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다큐멘터리 개그우먼]
KBS 출신 개그우먼들 6인의 잠들어있던 과거 영상을 소환하고,
오늘날 변화한 예능판 속의 개그우먼들의 생각을 들어본다.
※ 코미디언이라는 단어를 더 선호하지만, 이번 편만큼은 다큐멘터리 제목에서 사용된 '개그우먼'으로 표기.
또래 친구들이 아이돌을 좋아할 때 혼자 코미디언을 좋아했던, 코미디를 좋아하고 개그우먼들에게 진심인 사람으로서 KBS에서 방영된 다큐 인사이트 [다큐멘터리 개그우먼] 편을 안 볼 수 없었고, 보고 나니 감상평을 안 쓸 수가 없었다.
다큐멘터리는 이성미, 송은이, 김숙, 박나래, 김지민, 오나미 6명의 개그우먼과 KBS 김상미 PD의 인터뷰로 구성되어 있다. 개그우먼들의 행보와 진솔한 이야기들, 방송계의 흐름, 개그우먼들의 설자리가 어떻게 점점 사라지게 됐는지, 그리고 그 부당함 안에서 어떻게 새로운 판을 짜 개그우먼들의 희망과 가능성이 되었는지를 보여준다.
박나래, 김지민, 오나미│너구나, 미녀 개그우먼, 개그우먼의 위치
아무것도 모르던 시절엔 개그맨들을 좋아했다. 물론 신봉선, 박지선과 같은 개그우먼들도 좋아했지만 항상 남성을 유혹하고 연애에 목말라 있는 혹은 '못생긴 얼굴'로 웃기는 역할만을 하는 그들이 그 당시엔 개그맨들보다 덜 매력적으로 다가왔다.
하지만 다큐멘터리를 보니 개그우먼에겐 그런 역할만이 허락됐었다. 주된 역할을 맡기보다는 [치고 빠진다]라고 하는 극의 진행을 원활하게 하는 깔아주는 역할. 주된 역할을 하더라도 위에 언급했던 여성 혐오와 맞닿아 있는 역할들만이 개그우먼들에게 주어졌다. "치고 빠지는" 개그우먼들의 무대 장면이 연달아 나오는데 가슴이 쓰렸다. 자신의 캐릭터가 있는 것이 아닌 극의 진행을 위한, 다른 개그맨을 돋보이기 위한 소품 같은 역할. 하지만 그것조차 개그우먼들에겐 간절했으리라.
박나래 - 칼국수를 시키면 큰 그릇에 바지락이 가득 든 칼국수가 나오거든요. 그 옆에 겉절이가 나와요. 근데 칼국수는 시켜야 나오는 거고 겉절이는 매일 그 자리에 있거든요. 저는 매일 그 자리에 안 시켜도 나오는 겉절이보다는 시켜야 나오는 칼국수가 되고 싶었거든요.
너구나. 신인이었던 박나래에게 다가와 '너구나.', 박지선, 오나미에게 '올해는 너구나.' 단 3음절이지만 많은 바를 시사하는 듯한 '너구나.' 너구나는 까놓고 말해 못생긴 개그우먼을 말한다. 못생겼구나, 얼굴로 웃길 만 하구나. 그 이전 많은 이들이 있겠으나 내가 기억하는 최초의 '너구나'는 신봉선이었다. '신봉선한테 왜 못생겼다고 하는지 모르겠다'고 하는 나에게 사람들은 '너 신봉선 닮았어' 라 너무나 쉽게 웃음 어린 말투로 말했다.
신봉선, 박나래, 박지선, 오나미로 이어진 ‘너구나.’ 얼굴로 웃기고 싶지 않았고, 그렇게 생각하지 않았음에도 당시엔 그런 게 통했다. 대중에게 더 빨리 다가가고 웃음을 주는 가장 빠른 방법. 웃기다는데, 빵빵 터진다는데 개그우먼들에게 다른 선택지가 있었을까? 시청자들에게 더 다가가기 쉽고 이름을 알리기 쉬웠지만 그것뿐이었다. 딱 거기까지다.
미녀 개그우먼도 같은 양상이다. 친한 인간들끼리 코너를 짜고, '여자' 역할이 필요하면 '김지민 너 와서 할래?' 하는 것처럼. 2006년에 많은 인지도를 올리고, 신인상까지 탔지만 코미디언이 웃기지는 않고 예쁜 척만 한다, 왜 뽑힌 거냐 하는 말들로 모순적인 삶이 되었다.
김지민을 시점으로 그런 캐릭터를 계속 뽑기 시작했다. 그러면서 김지민은 자신의 자리가 자연스럽게 대체되는 걸 지켜봤고(불청객들 김지민→성현주) 2년 뒤엔 방송이 하나도 없어지면서 정신을 차리게 된 계기가 되었다고 말한다.
미녀 개그우먼이든 너구나든 그 특성에만 부합하면 누구나 끌고 올 수 있다. 자기 캐릭터, 나만의 색으로 존재하기가 쉽지 않다. 여성들의 자리는 쉽게 허락되지 않는다. 누구나 대체제가 될 수 있고 그 대체제마저도 간절하게 만든다. 개그우먼들에겐 "캐릭터"는 허락되지 않았다. 뚱뚱한 여성, 못생긴 여성, 예쁜 여성. 그저 "특성" 별로 카테고리화 되어 그 안에서 쓰일 때까지 기다리게 만들었다.
코미디언들은 처음 컨셉이 중요하다. 예쁜 역할이면 예쁜 역할, 조폭 역할이면 조폭 역할, 깐죽대는 역할이면 계속 깐죽대는 역할만 주구장창 하는 것이다. 그 굴레에서 자의적으로 벗어날 수 있는 건 개그맨뿐이다. 제니퍼로 이름을 알렸던 개그맨이, 자신은 이제 제니퍼에서 벗어나고 싶다며 나일출을 하는 것처럼.
그래서 분장실의 강 선생님과 패션 NO.5는 센세이션이었다. 개그우먼들에게 허락되지 않던 센 분장, 센 연기, 센 캐릭터. 그리고 개그우먼들끼리만 하는 코너. 우리끼리만 하는 코너.
다큐멘터리에선 '개그콘서트 무대에도 변화가 생겼다'라고 했지만 난 그렇게 생각하진 않았다. 그것뿐이었으니까. 그 이후에 스쳐 지나갔던 코너들 역시 정형화된 여성 캐릭터에서 벗어나진 않았고, 그 사이에 개그맨이 끼어있다. 다수의 개그맨 사이에 개그우먼과, 다수의 개그우먼 사이에 개그맨은 코너와 캐릭터 양상 자체가 다르다. 개그맨들 사이 개그우먼은 하나의 소품 같지만 개그우먼들 사이 개그맨은 그 마저 캐릭터로 만들고 오히려 돋보이며 개그우먼들을 자신의 배경으로 만든다.
분장실의 강 선생님과 패션 NO.5를 얘기한 건 시발점이라서 이기도 하겠지만 사실 그것밖에 없기 때문이지 않을까라는 생각 또한 들었다. 2012, 13년 이후 개콘을 안 봤기에 잘 몰라서 하는 말일 수도 있지만(누가 여자만 나오는 조폭 개그 해줘라-https://brunch.co.kr/@skybluese/6 읽어보시오)
틀을 깨고 편견을 지우고 스스로 만든 무대에 올라선
이성미, 송은이, 김숙│방송계의 흐름, 시니어로 살아남기, 판 벌리기
이성미의 말들을 보며, 여성들은 이 부당한 현실을 진즉 깨닫고 있었구나 싶었다. 사실 모르는 척하려 해도 모를 수가 없는 환경이었던 거지만. 그래서 조금 슬프기도 했다. 개그우먼들은 이제야 시작인 거 같은데 그마저도 영 탐탁지 않아하는 거 같아서. (송은이는 친한 연예인과만 일한다? 그럼 유재석, 강호동은? - http://www.hani.co.kr/arti/society/society_general/931536.html)
이성미 - "쟤는 여자니까 저거밖에 못 해"라는 얘기를 듣기 싫어서 악착같이 연습을 했어요. 왜냐하면, 잘못하면 여자 전체를 독박 씌우는 거잖아요. 그러니까 제가 잘해야 다음에 들어오는 후배들도 잘 자리를 잡을 수 있어서 잘 다져 놔야겠다고 생각했었어요.
이성미가 활동하던 시대엔 여성 캐릭터는 보통 죽어지내는 역할이었는데 쓰리랑 부부에서 김미화가 순악질 여사를 통해 여자들의 속을 뻥 뚫어주는 코너를 선보였고 1990년 KBS 코미디 대상을 받게 된다. 1990년 김미화 이후, 2018년 연예대상 이영자. 개그우먼이 대상을 받기 위한 28년의 간극. (하지만 2019년 대상을 생각하면 약간 놀리는 건가 싶은 생각이 든다... 뭐지 다큐로 반성하는 건가;)
이성미도 언급했듯 너무 오래 걸린 28년의 기간 동안 인물이 없었던 건 절대 아니다. 박미선, 이경실, 팽현숙, 김지선, 정선희, 이희구, 박수림, 엄정필, 김현영, 장미희, 서현선, 조혜련. 그리고 송은이.
개그우먼들의 관계성을 살짝 건들고 지나가는데, 아예 관계성에 대한 얘기도 다뤄줬으면 하는 마음.
송은이, 김숙이 나란히 있을 때가 제일 좋은 사람
정통 코미다 → 다양한 예능 프로그램 → 리얼 버라이어티 → 관찰 예능
송은이의 진행 능력이 빛났던 90년대 후반 2000년대 초반 예능을 지나, 대본화된 이야기를 해서 잘 마무리를 짓고 진행을 하는 MC보다는 자기 캐릭터가 보이고, 주어진 규칙을 어기는 자기 맘대로 말썽 피우는 강한 캐릭터들이 요구받는 리얼 버라이어티 시기엔 "여자들은 재미가 없잖아"라는 말이 방송계에서 통용됐다.
'여자들은 망가지지 않고 몸을 사리잖아', '재밌으면 섭외하겠지'라고 무책임하게 말하며 그렇게 자신들의 여성 혐오를 감춘다. 여자들에게 그런 캐릭터가 허용된 적이나 있었나? 송은이가 강호동처럼 제멋대로 억지 부리며 남들을 몰아가는 진행을 했다면 송은이는 방송에서 살아남았을까? 비슷한 시기에 방영됐던 무한걸스는 왜 욕을 먹었을까.
먼저 쓴 글에서도 언급했지만, 당시는 김치녀, 된장녀 워딩이 방송에 등장할 정도로 여성 혐오가 정말 들끓었던 시기였다. 남성에겐 한없이 관대하고 여성에겐 한없이 박했던 시기. 남자들끼리 하는 프로그램이 뜨니까, 너도나도 알탕 예능을 생산해냈다. 여자들은 뭘 해도 욕먹으니 남자들끼리만 방송을 꾸려나간 거겠지. 그게 '쉬운' 길이니까. 가장 쉽고 악질적인 혐오는 존재를 지우는 것이라 하지 않던가.
다큐멘터리에서도 무한도전을 먼저 보여준다.(이어지는 1박2일, 이경규 김용만의 라인업, 남자의 자격, 나는 남자다) 이 부분은 솔직히 좀 속 시원했음. 반성해라 방송계여. 1인 미디어에 밀리고 싶지 않다면 말이다.
김상미 PD - 당시 버라이어티에서는 대부분 남성 MC들이 형 동생 하는 분위기였는데 약간의 변주가 필요할 때, 어리고 예쁘고 상큼하다 여겨지는 여성 아이돌이 게스트로 초대되는 경우가 많았어요. 그 자리에도 개그우먼이 설 자리는 없죠.
호모 소셜이 극에 치달으면서 개그우먼의 설자리는 점점 사라졌다. 개그우먼뿐만 아니라 자신들에게 익숙한 여성 연예인(ex. 송지효, 이효리)들은 같은 방송인이라기보단 '여성' 역할을 하지 못하는 무언가로 취급됐다. 여자지만, 여자가 아니기 때문에 막대해도 되는, 그렇다고 남자는 아니기 때문에 중심엔 두지 않는 애매모호한 곳에 위치시킨다. 점점 주변으로 미는 듯하더니 아예 방송에서 모습을 찾아볼 수 없게 만들었다.
여성들이 자기 몫을 충분히 한다는 것을 보여줬던 무한걸스는 이제야 재해석되고 각광받지만, 그 당시만 해도 무한도전 짝퉁이라며 수많은 욕과 악플이 쏟아졌다.
관찰 예능으로 흐름이 바뀌면서 육아 예능, 가족 예능이 생겼고 결혼하지 않은 개그우먼의 자리는 아예 사라진다. 섭외가 제로.
다큐멘터리에선 '흐름'이라고 말했지만, 사실은 의도가 아니었을까라는 의문이 계속 들었다. 남성들이 주도한 흐름에 남성들만 넣고 남성끼리 즐겁고 싶은데, 그래서 여자들은 알아서 포기해줬으면 하는데 그렇지 않았기 때문에 개그우먼들이 따라올만하면 다른 흐름으로 넘어가고 따라올만하면 다른 흐름으로 넘어가서 끊임없이 여성들의 자리를 없애고, 개그우먼들의 자리를 용납하지 않는 거 같다는 생각.
송은이 - 지금 우리에게 가장 필요한 건 섭외? 나를 알리는 일? 든든한 기획사? 다 아닌 거 같은 거예요. 사람을 즐겁게 해주는 일, 내가 제일 좋아하는 일인데 그 자체를 할 수 없다는 게 가장 힘든 일인 걸 알았고 그렇다면 내가 할 수 있는 일은? 그냥 하면 되지.
불러주지 않는 방송국? 그럼 내가 일을 만들면 되지. 프로그램 시작 전날 잘린 김숙과 하고 싶은 일을 그냥 해보자 했던 송은이는 잘리지 않는 일을 만들자라는 생각으로 <송은이 김숙의 비밀보장>를, 컨텐츠랩 VIVO를 만들었다. 그리고 영수증, 밥블레스유는 정규방송으로까지 이어졌다. 자기들이 만든 판을 기존 판이 관심을 갖고 탐이 나게 만들었다.
여자들이 이렇게까지 치열하게 살아야 하나 싶긴 하면서도, 송은이는 언제 생각해도 참 대단하다. 누구나 생각은 할 수 있다. 그걸 실천하고 현실화하는 일이 어렵지. 그걸 해냈다. 그리고 자기 먹고사는 걸로 끝내는 게 아니라 동료, 후배들을 이끌어주는데 지원을 아끼지 않는다. 김신영이 선배님 저 이거 하고 싶습니다 하면 그래? 해보자 하는 송은이. 과감하게 판을 벌린다. 김신영의 상상은 송은이의 현실이 된다.
변화하는 시대 속에 방송계에 꼭 필요한 이야기. 이런 다큐멘터리가 나왔다는 것은 시대가 변했다는 걸 방송계도 눈치챘고, 무얼 잘못하고 있는지, 시청자가 원하는 게 무엇인지를 깨달았다는 거라고 생각하고 싶다. 누구도 불러주지 않고 방송계에서 밀어내기에 급급했던 개그우먼들이 자신들이 판을 짜고 점점 내 자리를 찾아가고 있다. 앞으로 이제 스케치라고 말하는 김숙과, 계속하고 안주하지 않을 거라 말하는 송은이. 든든하다. 정말 아직 멀었고 이제 시작이다. 우리의 이야기를 해주는 꾸밈(여러 의미의) 없는 '여성'의 모습을 보여주길 바라며 개그우먼들에게 응원을 보낸다.
왜 자꾸 일을 벌려. 라고 말하는 분들이 많이 있는데 그래서 우리가 뭘 완성했는데?라고 하면 사실은 전 아직 부족한 거 같아요.
계속할 거고 안주하지 않을 생각이에요. - 송은이
개그우먼들에게 애정을 담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