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 참회의 향기 나는 사람』
필자가 글을 그리려는 것은 필자 자신의 해박한 지식을 위해서가 아니라 나의 단점인 허술한 이기와 느슨한 성격의 차이와 어리숙한 내 마음의 산란함을 자정하고 안정을 찾으려는 뜻 일게다.
또한 지금까지 순탄한 길이 아니었기에 글에 옷을 입히고 맵시를 만들어 나의 독특한 문학을 그리고 싶어서 일 것이다..
물론 늦게 배운 도독의 길인지는 모르나 시를 그리고 시평을 하고 평론과 칼럼을 시작한 지가 몇 년 되지 않았으나 앞으로 필자가 글을 쓰고 문학을 연구한다면 계산한 적은 없지만 대략 10년이란 수명이면 되지 않을까 나름대로 정점이 되지 않을까 한다.
물론 유명하고 베스트셀러라는 책이 몇 권 되지 않지만 나름대로 최선을 다해 글을 그렸다고 자부하지만 중견 작가로서의 면면을 아웃사이더(outsider)라는 미명 아래 작품을 직접 창작하는 일이 내 운명이라 보기 때문에 나름대로 시평과 비평을 하면서 시보다는 수필 쪽에 안주하고 싶다. 어느 평론가들의 자리에 참석을 한 적이 있다.
물론 만나면 대부분 요즘 근황이 어떠한지 작품에 대한 언급이나 하면서도 막상 마지막에 이르면 거의 본인들의 건강 이야기가 대세인 것은 분명하다.
그리곤 티격 태격 하며 돌아서곤 한다. 티격 태격 하는 것도 어쩌면 아직은이라는 물음표가 <?>
아무튼 세상을 살다 보면 좋은 사람이 있으며 아니다.라는 사람도 있다.
물론 이런 말의 신빙성은 매우 낮고 또 자의적(恣意的)이기 때문에 염두에 깊이 새겨야 할 일도 아닐 것이다. 나와 어떤 관계 또는 나와의 어떤 맺음인가에 따라 또 다른 면으로 이해되는 길이 있기 때문이다. 어디까지나 나를 중심으로 맺어지는 일이기 때문에 신빙성이거나 객관성이라는 말레 토를 달 이유가 분명하다. 이러한 이유로 삶에는 곧 수없이 많은 파도를 넘고 넘어 원점으로 돌아오기가 부지기수이고 또 허망으로 끝나는 일도 많을 것이다.
결국 사는 일이란 인간의 관계 설정이 어떠한가의 여부에 따라 자기의 몫으로 돌아오는 느낌이 다를 수 있기 때문이다.
향기 나는 사람이 되고 싶다.라는 말을 나는 자주 한다.
왜냐하면 자기 자신이 어떤 향기를 내뿜는가에 따라 다른 생의 이력이 펼쳐지기 때문이다. 아무튼 향기가 있으면 끌림이 있어 멀리 있어도 날아오는 손님이 있기 마련이다. 그러나 무색무취라거나 혹은 냄새가 지독한 경우 일지라도 그 나름의 소용이 있기에 절망하거나 실의에 빠지는 일은 아니라야 한다.
왜 그런가 하면 존재라는 가치는 곧 필요요 필요는 어딘가 쓸모의 소용이 있다는 원론적인 말과 연결고리를 맺기 때문이다. 가령 짙은 향기는 금방 무언가의 일이 나타나고 옅은 향기는 점차 퍼지면서 모여지는 일이 현상으로 전개되기 때문이다. 사람이란 깍 기면서 다듬어지고 이런 과정을 수없이 반복하면서 결국 원점으로 돌아오는 시간이 문제일 뿐이다.
아무튼 원칙으로 보면 결국 앞서가는 사람이나 뒤에서 간다고 한탄하는 사람이나 막상막하에
이르는 것은 시간이 조절하는 기능을 갖고 있다.
가령 한 사람의 운명을 살피면 명확하게 나타난다.
잘 나가던 초창기의 사람이 언젠가는 뒤에 처진 보폭으로 인생을 한탄하는 일이 있는가 하면 뒤에 있던 사람이 마지막에는 가장 앞에서
여유롭게 진행하는 걸음도 있기 때문이다. 문제의 핵심은 자기의 향기를 어떻게 배분하는가의
여부에 따라 달라진다.
이를 본성이라 말할 수도 있고 또 그 본성이 행동으로 옮기는 일이 얼마나 조직적이고 치밀성을 갖는가의 일이 좌우에는 몫으로 남게 될 것이다.
재치가 넘치는 사람은 사상의 숙성을 시키지 못하는 흠결이 있고, 또한 다소 둔탁하고 어둔한 경우는 심사(深思)한 생각을 진행하는 경우는 얼마든지 있어, 운명으로 비교하면 결국 같아지는 원점에 이른다는 뜻이다.
그렇기에 실패했다고 서러워하거나 빨리 목적지에 이르렀다고 호들갑을 떠는 일은 어리석은 일이 된다. 그러나 성실하게 자기의 임무에 매진하는 일이 인내를 요구할지라도 결국은 보다 앞서는 걸음을 확보한다는 점에서는 할 말이 없다.
인생은 너무 어려운 것도 아니고 또한 쉬운 것도 아닌 능력을 키우면서 무거운 짐을 짊어지고 일어나는 연습이 아닐까. 한다.
자기라는 향기는 결국 자기가 만드는 일이고 자기가 이끌고 가는 마차(馬車)와 다름이 없을 때, 이를 이끌고 가는 마부는 자기 자신이기에-
오로지 자기 수련과 자기(自己) 연마(練磨)를 통해서 바른 모습을 보이는 것은 오로지 자기 귀책이 되는 것이다. 젊은 날의 호기(豪氣)가 있어 후회와 이를 쌓아오다 결국 바람에 쓰러지고 풍상을 겪고 난 다음에 모양이 형성되는 자연의 이치는 인간에게도 예의가 아니다. 여기서 나는 나다.라는 결론 앞에 겸손을 앉히고 자기의 뜻을 펼치면서
살아야 한다고 말한다.
[2. 끝내는 말]
나는 무엇이고 누구인가?
그리고 나는 앞으로 나를 이끌고 가는 보행이 삐걱거리더라도 내 삶의 이력을 이끌고 오로지 앞으로 나가는 길에 성실하면 해답이 될 것 같다.
내 哲學이 아무리 빈곤하고 부실한 철학일지라도 이것이 나의 향기라는 깃발을 들고 의롭게 살아야 할 임무만이 내 것이라는 뜻이다.
다만 원숙의 경지에 언제 오를지는 모르겠지만 늘 길을 재촉하는 일상이나 조급증이 없는 미지의 철학에 들어가기를 꿈을 꾼다.
자연 육화가 필자의 육화에는 대상과 경계를 갖지 않을 때, 더욱 많은 소리를 들을 수 있는 -
심지어 자연과 풀과의 대화나 새들과의 대화에서 있고 없음을 넘는 그런 철학의 존재가 되기를 바라는 소망에서 순수를 방문하는 되는 일상이 되고픈 갈망이며 명상의 숲을 지나면 인생의 깊이를 방문하는 의미-
무상함이 본질로 보이고 평화롭고 조용한 공간을 소요하는 그런 삶
이제 서서히 황혼의 꿈으로 들어서려는 내일이 아름답게 채색되는 분위기를 염원할 뿐이다.
참회록의 내 향기가 진동하는 그런 소망을 꿈을 꾸며 에필로그 한다.
2024. 04. 01.
[대중문화평론가/칼럼니스트/이승섭시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