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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 의식의 사물과 관찰 법]

[숲 속의 깊이]

by 이승섭 대중문화평론가
[필자]

한 개인의 시인은 우주의 숨소리를 담으려 숲의 채취와 삶의 조화에서 시의 정서가 생명으로 나타난다. 왜냐하면 자연 숲에 반응하는 시적 정서와 분리되지 않고 하나로 통합될 때, 비로소 생동하는 숲의 이미지를 구축하는 조화미에 이룰 수 있기 때문이다.

시는 자연과 시인이 어떻게 대화의 창구를 확보하는가에 여부에서 숲을 형성하기 때문이다. 이는 시인이 만드는 것이며 때로는 선택하는 이미지이지만 독자에게는 일체화된 삶의 근저(根底)를 만나는 즐거움이기에 그렇다는 것이다.

시는 결국 존재의 모양을 이미지로 구축하는 성 쌓기를 하는 것이기에 – 시인의 개성을 만나는 일이며 한 편의 시집은 그런 굴곡진 삶의 파노라마를 만나는 독자의 수용미학이 시작되기 때문이다.

시는 의식의 뼈대가 되어야 한다. 그리고 때론 patience 한 애달픔의 골목이 아슬하게 펼쳐져야 한다는 뜻이다. 뼈대는 사회의식 면이고 애수(哀愁)는 심성 바탕에 선한 감수성이 자연과 결합하여 표현미를 획득하는 결과로 독자에게 다가가야만 증명의 best seller가 되는 것이다

2. 정서 반응의 미학


1) 자연으로 들어가기


인간을 자연과 분리하는 것은, 서양의 사고라면 동양은 자연과 인간이 하나로 통합하는 반응을 중요하게 느끼기에-

이는 자연이 인간을 이롭게 하는 보조적인 수단인 정복으로 생각하는 근세 철학의 시조인 프란시스 베이컨의 사상에서 구체적인 서구정신의 배태(胚胎)를 감지하게 된다. 그러나 동양은 이처럼 자연과 인간이 어떻게 조화로의 구심점을 구축할 것인가에 자연관은 연면하게 이어왔다. 이런 현상 때문에, 자연 시선에 따른 관념 산수라는 칭호도 파생되었다.

이렇게 본다면 시 또한 자연이고 인간도 자연의 일부라는 동양 사상은 서구의 기능적인 사고가 아니라 도덕적인 상관과 시는 항상 걸음을 함께한 것이다.

서양 정신은 과학 정신을 강조하는 것 때문에, 인간사는 삭막하고 갈 곳이, 없는 방황의 시대가 연출되었다면 동양은 정관적이고 명상적인 길을 넓히는 사고가 시와 인격은 길을 함께 하게 된 계기이다. 김자연의 시는 자연이 녹아들어 시로 용해되는 시로 변환시킨다.

비 오는 날 시를 케어

큰 줄기 작은 줄기 뽑혀 나온 시를

빗줄기에 씻는다

돌밭에서 자란 우리 집 시는

생긴 것이 제 멋대로라

씻어도 내다 팔게 없다.

캐낸 시를 그냥 뜰에 두고

동물들에게 그리고

먹고 싶은 대로 나누어 먹는다.

<비 오는 날엔>에서

소박하고 질박(質朴)이 풋풋하다. 그리고 정경이 한가롭고 따스함을 유발하는, 편한 인상을 준다. 시인의 정서가 갖는 무게로 인식을 갖는 듯하다.

돌밭에서 자란 우리 집 시/말을 바꾸면 시는 푸성귀이고 푸성귀는 다시 시인의 시이며 이는 그의 소박한 정서의 일단으로 돌아가는 순환 논법이 성립된다.

동물들과 더불어 사는 어울림의 풍경이 따스하다. 칼칼하고 치밀한 도시의 정서가 아니라 비에 젖어도 안온함의 체온을 갖는 것은, 안분지족의 사고와 어울림에서 시심의 발원이 시인의 마음속에서 자발적으로 우러나오는 진솔성에서 따스한 인상을 배가 되는 듯하다.

<다리> <오미자밭에서> 또는 <감> <강낭콩 깍지> 등은 자연과 어울린 시인의 싱그러움이 드러나는 시의 숲이다.

시적인 소재로 자연을 대상화할 때는 두 가지의 태도가 나타난다. 하나는 바라보는 관념적인 자연의 즐김이 있다면, 직접 자연에 땀을 투사하여 맛보는 체험으로의 자연이 있을 것이다. 후자는 시인의 인간미를 보여주는 시로 <감자를 캐며> <감자>, <콩 들아>에는 땀의 의미가 자연을 더욱 숙성, 시키는 묘미와 어울려 시화하는 듯하다. 왜냐하면 바라보면서 느낌을 시화하는 것이, 아니라 직접 만져보고, 느끼고 거기에 생각을 더해서 시의 형태를 창조하기 때문에, 실감 나는 창조의 형태를 만들기 때문에 더욱 오감을 자극하게 되는 것이다.

길게 흙 자릴 깔고

씨감자 손에 쥐니

반의 반쪽으로 잘린 몸에서

눈곱만 한 어린 눈이 쳐다본다

눈부실라,

봄빛 얼른, 가리고 흙 덮어주면

<감자>에서

시는 사물의 뒷자락에 있는 의미를 건져 올리는 일이 시인의 임무라면 시인은 감자 씨눈에서 어떻게 감자로 생명의 환희를 잉태하는가를 통찰하고 있다. “눈곱만 한 어린 눈이 쳐다본다.”“눈부실라”의 찬란함을 감격하는 일은 그의 정서가 마치 울림을 기다리는 현(弦)의 팽팽함을 간직하였기에 느낄 수 있는 체험으로 인한 소산인 셈이다.

이렇게 시인은 자연관은 거리를 두고 바라보는 것이, 아니라 만지고, 심고 또 수확하는 데서 나오는 감수성의 파도가 그만큼 숙성된 결과로 볼 수 있다. 다시 말하면 일체화된 체험으로의 시적 묘미가 된다.

2) 정감의 표정


시인은 각 개성이 있어야 한다. 김자연의 시는 여느 사람과 다르기에 사물의 독특한 이면을 발굴하기도 하고 또는 새로운 해석으로 자기화를 달성하는 언어의 맛이 생성될 것이다. 차갑고 냉정하고 두려움을 주기보다는 대상에 접근하여 아파하고 신음하는 상태를 온화한 시선으로 바라보는 데서 김 시인은 여백이 있다. 이는 인간만이 아니다. 풀이나 나무 혹은 미생물에 이르기까지 생명에 대한 신뢰와 애정은 곧 시의 길로 연결되기 때문에 표현에는 핏기가 돌고 생동감이 살아나는 擬人化(의인화)의 생동성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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현 :금요저널 주필. 칼럼리스트. 대중문화평론가 전(사) 한국 한울문학 예술인협회 회장 3년 역임. 한국 예술인협회 사무총장 역임 (작가나 시인이 되고자 하시는 분만 일독을 권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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